On Air RAW novel - Chapter 34
34화.
“……그게 있으면 방송해 주실 수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윤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건 자신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희경이 잠시 침묵했다. 윤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경의 어깨 너머로 두 아이가 윤을 빤히 응시했다. 새까만 눈동자 네 개가 깜빡였다. 윤은 차마 그 눈을 오래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희경이 그 정적을 깼다. 잠긴 목소리였다.
“가져가세요. 가져가시고 꼭 연락 주세요, 피디님. 꼭이요.”
“감사합니다.”
윤은 황급히 메모리카드를 지갑 안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정신으로 인사를 하고 희경의 집을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달려 나온 윤은 차에 올라타서는 시동을 걸기 무섭게 액셀을 밟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좁은 골목길에서 차가 긁힌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안에 무엇이 있든, 그건 어쩌면 진실에 조금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었다.
― 선배는 어떻게 견디는 거예요?
수도 없이 이런 일을 겪었을 정언에게 이번에야말로 꼭 대답을 듣고 싶었다. 대로변으로 빠져나온 차가 속도를 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 * *
“다녀왔습니다.”
포털 뉴스 탭에서 엄대진과 서온건설을 검색해 나온 뉴스를 읽고 있던 정언은 곁에서 들리는 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홍제동에 갔다가 지금 막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까까지는 멀쩡했던 윤의 안색이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하게 나빠진 것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정언은 눈썹을 약간 좁혔다.
“얼굴 왜 그래? 저녁 먹었어?”
“선배, 저하고 잠깐 얘기 좀 하시죠.”
대답 대신 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이 저럴 이유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설마 그만두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싶었다. 부사수들이 한두 번 나가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런 기미가 전혀 없던 윤이라 순간 입이 말랐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그래,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윤이 먼저 회의실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간 정언은 문을 닫으며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머뭇거리다 옆자리에 앉은 윤이 몇 번이고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무슨 얘긴데 그래?”
정언이 묻자 윤은 한참을 망설이다 자기 지갑을 꺼냈다. 정언은 그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윤이 지갑 안에서 조그마한 메모리카드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그것을 본 순간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달려 내려갔다. 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언은 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기 핸드폰의 슬롯을 열어 메모리카드를 넣었다.
파일 관리 앱으로 외장 메모리카드를 열자 수천 장의 사진과 많은 문서 파일, 음성파일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정언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무언의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윤이 거의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음성파일 있잖아요, 아무거나 하나 들어 보시겠어요?”
정언은 바로 가장 위의 파일을 재생했다. 볼륨을 올리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번에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더는 힘들어서 못 하겠습니다. 저 집에 애가 둘입니다. 아내하고 애 둘 키우겠다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정언은 다음 순간 즉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며 숨을 멈췄다. 머리 위에서부터 얼음물이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언은 윤을 다그쳤다.
“김 피디, 대답해 봐. 이거 뭐야? 어디서 났어? 이거 박규형 씨 목소리야?”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윤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홍제동에서 박규형 씨 핸드폰을 다시 봤어요. 사진은 많은데 용량이 너무 적더라고요. 그러면 분명히 외장 메모리를 썼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윤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된 정언은 굳은 채 윤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핸드폰 용량을 확인해 볼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싶어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졌다.
정언은 급히 윤에게 재차 물었다.
“이게 어디 있었어? 핸드폰 안에?”
“아뇨. 현장에서 가져온 박스에, 거기 숨겨 놓은 걸 제가 찾은 건데…… 선배가 보셔야 할 것 같아서 이희경 씨한테 동의 구하고 가져왔어요.”
윤은 불안해하는 얼굴로도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메모리카드가 없으니 분명 그게 어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뒤졌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기가 차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정언이 갑자기 웃자 윤이 불안한 얼굴로 정언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윤이 윗선에서 깨지고 여기로 굴러 들어온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현장 취재를 나갔을 때도 그랬다. 윤이 그 박스를 자신이 가져다줘도 되냐고 묻지 않았다면 이 증거는 아예 발견되지 않은 채로 그냥 버려졌을 수도 있었다.
정언은 미간을 문지르다 회의실 문을 열고는 민혜를 불렀다.
“송 작가님, 잠깐 좀 들어와 봐요.”
넘어온 프리뷰 파일을 뽑는 건지, 커피를 들고 프린터 앞에 서 있던 민혜가 고개를 돌렸다. 정언이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자 민혜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한 채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본 민혜가 정언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뭐야, 김 피디 까고 있었어? 나 뭐 어쩌라고, 동참하라고?”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그런 거 아니고 여기 좀 앉아요. 들어 봐야 될 거 있으니까.”
정언은 의자를 하나 끌어다 민혜를 앉히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두 남자의 대화가 핸드폰 안에서 흘러나왔다. 어리둥절해하던 민혜가 곧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심각한 표정을 했다.
정언은 말없이 계속 다음 파일을 재생했다. 몇 개를 연속으로 듣자 민혜가 잠깐 끊으라는 손짓을 하며 눈가를 문질렀다.
“정언, 이거 어디서 난 거야?”
“김 피디가 가져왔어요. 회사에 남아 있던 개인 물품 박스 안에 숨겨 놓은 걸 찾았대요.”
“어머 세상에, 하나님 아버지.”
교회 안 나간 지 이십 년은 됐다던 민혜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며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정언은 팔짱을 낀 채 회의실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았다. 수십 개의 녹취 파일 중 고작 몇 개만 들어도 이미 이 사건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정언은 파일을 하나 더 눌러 보았다. 그새 익숙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 과장, 내일 오전에 서울 출장이야. 흑산도 미역 한 박스.』
『내일 오전에는 간담회에 출석해야 하는데요.』
『그거 뭐, 거지새끼들 데모하는 거? 그건 됐어. 거긴 사측에서 다른 사람 보낼 거니까 출장 잘 갔다 오고, 보고서 써서 올리고.』
『……알겠습니다.』
녹취 파일만 들어도 규형이 썩 내키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정언은 민혜에게 물었다.
“이거 무슨 뜻이 있는 거 같지 않아요? 출장 지역도 여러 군데고, 계속 특산물 얘기를 한단 말이야. 박규형 씨가 이 일을 그만하고 싶어 한 거 보면 분명히 뒤가 켕기는 일이다, 이건 당연한 거고.”
“그치. 그리고 잘 들어 보면 전화하는 놈이 누구한테 갖다 주라 말을 안 해. 지역명하고 특산물 얘기만 하면 누구한테 주는 거라고 이미 서로 익스큐즈된 상황인 거지. 이거 딱 비자금이나 뇌물이나, 뭐 그런 각인데. 통화한 사람이 대체 누굴까? 저쪽에서는 박 과장, 박 과장 하는데 이쪽에서는 부르지를 않네.”
“그러니까요. 보통 녹음 어플 썼으면 통화한 전화번호나 주소록 이름이 파일명으로 들어가는데 이건 그런 것도 없고.”
“따로 정리해서 넣은 거겠지, 그럼.”
민혜가 펜 끝을 책상 위로 톡톡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야, 이거 집에 들어가긴 다 글렀네. 지금 내 메일로 제보 영상 들어온 것도 꽤 되는데 뭐 단서 될 만한 거 있으려나 모르겠다. 강 피디랑 얘기한다며? 이거 작은 사이즈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강 피디 지금 어딨어?”
“선배 잠깐 일 있다고 나갔어요. 자기 아홉 시쯤 들어올 거라고 하던데요.”
“아홉 시? 아우, 미쳐. 나 일 있는데.”
민혜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프로그램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제일 기뻐한 사람이 남편이라고 했으니, 재희가 돌아오는 아홉 시까지 잡아 뒀다가 부부싸움의 원인을 제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송 작가님 먼저 퇴근하세요. 어차피 일정 얘기는 저랑 할 거니까. 만약에 컨펌 받으면 진짜 퇴근 못 할 텐데 이런 날이라도 빨리 들어가야죠.”
정언이 웃으며 말하자 민혜가 그럴까? 하고 반색했다. 정언은 얼른 가라고 손을 휘적거렸다.
“애 딸린 유부녀 하루라도 집에 보내야지 무슨 원망을 들으라고. 빨리 가요.”
“그러면 나 내일 일찍 출근할게. 이따 카톡 보내 줘.”
“알았어요.”
정언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민혜가 회의실을 나갔다. 정언은 기지개를 쭉 켜다 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은 깍지 낀 손을 입가에 댄 채 반쯤 넋이 빠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김 피디.”
가만히 그 얼굴을 보던 정언이 윤을 불렀다. 정신을 놓은 듯 멍하니 있던 윤이 사이를 두었다가 퍼뜩 놀라며 네, 하고 정언을 바라보았다. 정언은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여 윤과 시선을 맞췄다.
“저녁은 먹고 들어왔어?”
“아뇨.”
윤이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정언은 윤의 팔을 잡았다.
“그럼 일단 나가서 밥 먹자. 선배는 아홉 시 넘어야 올 텐데 기다려도 할 일 없어. 나도 밥 안 먹었으니까.”
윤이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