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6
36화.
07.
“어, 강재희.”
재희가 옥상 정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미리 와서 앉아 있던 그림자가 손을 흔들었다. 씨름선수 저리 가라 할 체격은 낯이 익었다.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는 의 이충민 피디였다.
재희는 충민 곁에 털썩 앉았다.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는지 곁에 앉기만 했는데도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선배, 담배 끊는다면서요. 아직입니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에 충민이 정색했다.
“옛말에 담배 끊는 놈이랑은 상종도 말랬다. 내가 맘이 여려요, 이 사람아. 담배 끊겠다 하자마자 딱 끊고 그럴 정도로 독하질 못해. 알잖아, 나 섬세한 거.”
“아니, 그게 왜 안 돼요? 끊자 생각하니까 딱 끊어지던데.”
“너는 삼대가 상종하지 말아야 될 놈이야. 내가 마지못해 상종해 주는 거지.”
혀를 내두른 충민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 안을 들여다보다 에라이, 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새 다 피운 모양이었다.
재희는 쿡쿡 웃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밤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별 하나 찾기도 힘들었다. 긴 숨을 뱉은 재희는 고개를 돌려 충민을 보았다.
“그나저나 뭐 어떻게 돼 가는 거예요? 성 선배랑 김진우 앵커 인사위 회부됐다며, 진짜야?”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은 충민이 머리를 감싸며 으으,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저녁 메인 뉴스인 의 성세준 피디와 김진우 앵커가 인사위원회에 불리어 갔다는 소문이 돈 건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당장 오늘 뉴스 앵커가 주말 담당인 정수창 앵커로 교체된 건 확실했다. 충민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위원회 진행 중이야. 세준이 말로 경고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하더라고. 김 앵커한테는 그 누구야, 오진문 이사? 그 이사가 직접 몇 번을 전화했었다는 거야. 입조심하라고.”
“클로징 멘트 때문에?”
충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우 앵커의 클로징 멘트는 소위 ‘사이다 멘트’로 인기가 많았다. 유튜브에 ‘김진우 클로징 멘트 모음’이 따로 돌아다닐 정도였다. 특히 청와대나 여당 측에서 좋지 않은 뉴스가 나올 때면 반드시 묵직한 강속구 멘트가 따라붙었다.
그러니 청와대와 여당에서 와 김진우 앵커를 곱게 볼 리 만무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나 홍보수석실에서 직접 몇 차례 YBS에 경고를 했다는 소문은 계속해서 있었다.
다만 그때는 이사진이 바뀌기 전이었기에, 위에서 압박을 한다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어 별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충민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도 이번 달 내로 폐지한다고 내일 공문 내려올 거라더라. 시청률 안 나온다고. 아니 씨발, 이 개새끼들 진짜 뭐 어떻게 해야 되냐. 너희도 심의국에서 연락 왔었다며?”
“얘기 들었어요? 누구한테?”
재희가 묻자 충민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하나정한테. 너희도 기획안 미리 심의국장하고 편성국장한테 제출하고, 방송일 전에 종편 시사 하자고 그랬다며. 하 피디도 그 얘기 듣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 그랬더니 도 똑같이 할 거다 그러더라는데.”
나정은 주말 기획 다큐 프로그램인 의 피디였다. 그 얘기까지는 미처 몰랐던 재희는 미간을 좁혔다.
“그 새끼들 아주 웃기네.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릴 하고 있어.”
“넌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회의하는데 오라 가라 하면서 전화질을 하잖아. 열 받아서 갔더니 옴부즈맨 팀에서 3일자 방송에 문제가 있다고 그랬다는 거예요. 개소리하지 말라고 지랄 한 번 해 줬지. 그러고 당장 국장님 방으로 달려갔더니 국장님도 뭐 아시는 게 없는 거죠. 얘기 듣더니 완전 뒤로 넘어가시던데요.”
재희의 말에 충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님도 엄청 갑갑하실걸. 이 새끼들 아주 사장님, 국장님 손발 다 자를 생각이야. 심의국장하고 편성국장 미리 갈아 놓고 거기 다이렉트로 쏘면서 우리 긁으니까 국장님 선에서 먼저 알 방법이 없어. 그리고 다음 달 초에 세무조사 들어온다는 얘기 있더라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 그거지.”
“세무조사에서 뭐 걸리면 그거 핑계로 사장실 털고 시사보도국 털겠다?”
“그렇지.”
재희는 팔짱을 끼었다. 유동욱 사장은 앵커 출신이었다. 지금의 ‘시사교양 강국 YBS’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만든 것은 동욱의 덕이 컸다. 취임 직후부터 동욱은 ‘돈이 안 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역시 그런 동욱의 덕을 톡톡히 본 프로그램이었다.
현재 YBS 시사보도국의 요직은 소위 ‘유동욱 라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유동욱 라인이라 해서 무슨 특혜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사보도국장 백선경을 비롯한 대부분이 실무자 출신의 인사들이었고, 동욱이 필드에 있던 당시의 동료들이었다. 동욱은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쓴 것이었다.
애초에 ‘유동욱 라인’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 자체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바언진 이사진이 대거 교체된 후, 이사회에서 ‘유동욱 라인’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유동욱 라인’이라는 프레임이 생겨났던 것이다. 유 사장이 직접 이사회에서 라인이라는 건 없다고 해명했으나 무소용이었다.
“노조에서 뭐 할 수 있는 게 없나, 지금?”
답답해진 재희가 묻자 충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사진에서 면담 요청 계속 거부 중이야. 지금 KTBC랑 IBS 쪽도 사장 교체설 도는 중이라 분위기 안 좋다고 하더라고. KTBC 노조에서 언론노조 전체에 연대 요청도 생각하고 있대. 일이 거기까지 가면 공영방송하고 청와대하고 맞다이 뜨는 거지, 뭐.”
“아, 진짜 폼 안 나네. 이 새끼들은 무슨 일을 이렇게 지저분하게 해? 악당도 좀 세련돼야 싸울 맛이 나지.”
재희가 투덜거리는 것을 본 충민이 쓴웃음을 뱉었다.
“더 거지 같은 게 뭔지 아냐? 눈에 빤히 보이는 개수작인데 그냥 두 눈 뜨고 앉아서 쳐 맞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거야. 환장하겠다, 정말.”
“걔들이 성 선배 어떻게 하겠다고 얘기했어요?”
“모르겠어. 기껏해야 감봉 처리 정도 할 거 같긴 한데, 분위기가 심각하더라고. 아까 인사위 들어가기 전에 세준이 잠깐 만났거든. 계속 이런 식으로 건드리면 그냥 청와대랑 이사회 쪽하고 통화한 녹취 파일 다 터트려 버릴까 그러더라.”
“이왕 터트릴 거면 나 주면 안 되나?”
충민이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재희의 이마를 뒤로 밀었다.
“주면 뭐, 방송은 할 수 있고? 모가지 간당간당한 놈이 말은 잘 한다.”
“선배는 안 간당간당한 것처럼 말하네. 우리 다 간신히 모가지 붙인 처지 아닙니까? 생각 있으면 그거 진짜 나한테 넘기라고 해요.”
“세준이가 너 안 그래도 간당간당한 모가지 아주 작두 넣고 자를 놈인 거 아는데 주겠냐?”
핀잔을 준 충민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괜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아마 습관이 된 모양이었다. 충민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히려 지금 돌아가는 거 보니까 는 살려 둘 확률도 높은 것 같아. 이사회 시동 거는 꼴이 지금 사장님이 돈 안 되는 데만 투자해서 회사에 재정적 손실이 컸다 이걸로 몰아가려는 거 같거든. 이사회에서 회사 수익 관련해서 얘기가 나왔대. 그런데 는 지금 시사 프로 중에 유일하게 광고 완판 나는 자리라 핑계가 없잖아.”
반가운 소식이어야 했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재희가 픽 웃고는 내뱉었다.
“그렇게 살려 두는 게 뭐 사는 겁니까, 죽으라는 거지.”
“그건 그렇다.”
충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없는 담배를 찾는 듯 점퍼 주머니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보던 충민은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 부근을 문질렀다. 재희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옥상 위를 스산한 바람이 휘돌고 지나갔다. 충민이 아이고, 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회사 이십 년 넘게 다니면서 이 꼴 볼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전두환, 노태우 시절만 지나면 좋은 날 올 줄 알았지. 다 늙어서 또 데모하게 생겼으니 미치겠어, 정말. 마누라가 뭐라는지 아냐? 젊을 때 화염병 좀 말아 본 짬이라도 있는 걸 다행으로 알래. 데모도 늙어서 배우려면 힘들다고.”
“형수님 화끈하시네.”
재희가 웃자 충민이 헛웃음을 뱉었다.
“말이 그렇지, 이 나이에 회사 잘리고 데모하게 생겼다는데 누가 맘 편하겠어. 그냥 와이프 볼 낯짝도 없고, 애들 볼 낯짝도 없고…… 요샌 진짜 회의감 느낀다. 이 꼴 보려고 내가 이십 년 넘게 있었나 싶다니까. 승진시켜 준다는 거 다 마다하고 평피디로 현장 있었더니 오래 살아서 못 볼 꼴 보는 건지…….”
“왜 그래요, 또. 이충민 피디님이 그런 소리 하면 우리가 어디 의지합니까.”
재희는 충민의 넓은 등을 툭 쳤다. 별명이 시보국 불곰일 정도로 덩치 좋은 충민의 등이 오늘따라 작게 느껴졌다. 입 안에 쓴맛이 돌았다. 충민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내가 그래도 강재희니까 이런 소리 하지, 어디 가서 하냐. 우리 집 가훈이 뭔지 아냐?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거야, 이거. 마누라가 애들보고 맨날 그런다고. 니네 아빠 봐라, 돈 없어도 가오 있잖아. 곰같이 생긴 주제에 가오 있어서 결혼했다. 나도 일생 그거 하나 자랑으로 알고 살았는데, 요즘은 그게 다 뭔가 싶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충민이 투박한 손으로 두 눈가를 눌렀다. 재희는 말없이 그런 충민을 보다가 허공에 숨을 뱉었다. 입김이 하얗게 흐려졌다.
“그동안도 목숨 내놓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호시절이었다 싶은 거 웃기죠. 그런데 뭐 어떡하겠어요. 이렇게 못 살면 그만두는 거고, 이렇게 살 수 있으면 가는 거고. 심플하게 생각합시다, 선배.”
“넌 진짜 무서운 게 없는 거냐, 그런 척만 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