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7
37화.
“지킬 거 없는 놈이 뭐가 무섭겠어요.”
재희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충민이 멈칫하며 뭐라고 말하려는 듯 두어 번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재희는 피식 웃었다. 이런 순간이 즐거운 건 아니었다. 충민 역시 자신의 청첩장을 받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짧은 말 안에 담긴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지연수.
재희는 문득 그 이름을 떠올렸다. 단 세 글자의 이름만으로도 순식간에 흰 얼굴과 동그란 눈, 야무진 입매와 웃는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무심코 넘기던 책장에 손가락을 베듯, 기억들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심장 위를 확 긋고 지났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재희를 위로했다.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재희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수면제의 힘을 빌려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그 순간부터 악몽은 다시 반복됐다. 깨어 있는 모든 순간 죽음을 생각했다.
존재보다 강력한 부재가 있다는 걸 재희는 그때 알았다. 더 이상 연수가 거기에 없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모든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날 그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했더라면, 특파원이 되는 건 싫다고 말했더라면, 차라리 연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어떤 후회도 소용없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재희에게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너 진짜 여자 한 번 만나 볼래?”
잠시 침묵하던 충민이 물은 말에 재희는 질색했다.
“술도 안 먹고 취했어요?”
“아니, 농담 아니고. 뭐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우리 와이프 아는 동생이 하나 있는데…….”
재희는 충민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적거렸다.
“됐어요, 됐어. 아니 내가 뭐 어떻게 사는데요. 지금 잘 살고 있는데.”
“그게 사는 거야, 자식아?”
“내 인생에 여자 이미 차고 넘쳐요.”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수가 죽은 뒤 재희가 가장 후회한 일 중 하나는 미리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식도 안 올렸는데 뭐 어떠냐, 혼인신고를 한 것도 아닌데 너한테 무슨 흠이 있냐 하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탓이었다.
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던 충민이 혀를 찼다.
“아니면 그냥 서정언 만나든가. 옆에 너 좋다는 여자 두고 뭐하냐.”
정언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재희는 바로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앞길 창창한 애 인생 말아먹는 소리 하지 마요. 서 피디가 뭐가 부족한데.”
“뭘 또 정색을 해.”
“걔 입사했을 때부터 내가 끼고 키웠어요. 자식 같은 애보고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아이고, 총각이 그렇게 다 큰 딸 있어서 좋겠다, 인마.”
더 이상 말해 봐야 씨도 안 먹힐 거라고 생각했는지 충민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재희는 짐짓 눈을 흘겼다. 이 얘기도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들은 지 오래였다. 정언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건 재희 역시 아는 사실이었다.
오래 전부터였다. 정언은 분명 자신과 가장 닮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긴 시간을 함께했고,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재희는 더욱 그 선을 넘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수의 자리는 재희에게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었다. 정언에게 그 영구적인 공백을 그저 지켜보라고 강요하며 곁에 둔다는 건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일일 게 뻔했다.
“가족들 걱정할 시간도 없는데 나한테 귀한 시간 안 써도 돼요. 그나저나 은석이가 무슨 서명 받을 거라고 하던데 그건 무슨 소리예요?”
재희가 말을 돌리자 충민이 고개를 까딱였다. 황은석 피디는 충민과 함께 에서 일하고 있는 피디였으며, 노조 사무국장이기도 했다.
“피디들 성명문 내려고. 교양국은 전원 서명했대. 기제국하고 우리 쪽도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 SNS로 공유하고 유튜브 릴레이 영상 올리고 뭐 그럴 거라고 하더라. 비정규직 인원도 아마 다 참여할 거 같고.”
“뭐 그러면 시보국도 전원 하겠네. 기제국도 별일 없으면 다 하지 않을까요?”
“그러겠지. 아, 그 교양국 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 거기 최진수 부장 밑에 있던 애 하나 굴러갔다며?”
충민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재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조선시대 있다 왔어요? 남들 다 아는 걸 이제 물어봐.”
“이 새끼는 하여튼 선배한테 버르장머리하고는…… 걔 어때? 하다 갔다며. 최 부장이 아주 걱정이 태산이더라. 그 새끼 가서 괜히 교양국 욕만 들입다 먹이고 쫓겨나는 거 아니냐고. 인사위에서 니네 팀 가면 쪽도 못 쓸 거 알고 거기다 처박았다던데?”
“내가 서 피디한테 붙여 줬는데 그 까다로운 애가 입도 뻥긋 안 하던데요. 걔들은 사람 보는 눈도 되게 없네. 나야 고맙긴 한데.”
인사위원회에서 일부러 갖다 놨다는 말에 부러 더 과장해서 말한 것도 없지 않았지만, 어쨌든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내심 둘 중 하나가 일 못 하겠다고 드러눕는 데 얼마나 걸릴까 불안했는데, 뜻밖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는 까닭이었다.
충민이 그 말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서정언 밑에서 여태 한마디도 안 들었으면 그거 난놈인데. 조만간 무슨 사고 하나 치는 거 아니냐?”
“사고 칠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네요.”
재희가 한숨처럼 웃으며 내뱉자 충민이 그것도 그러네, 하고 수긍하며 기지개를 켰다.
“에라 모르겠다, 사는 대로 살아 봐야지 뭐. 아무튼 서명하는 거하고 릴레이 영상 그런 건 은석이가 내일 오전 중으로 메일 보낸다니까 받으면 얘기 좀 잘 해주고. 몸조심해, 인마. 난 요새 진짜 너 생각하면 불안해 죽겠어.”
“내 걱정은 내가 합니다. 선배도 늙었네, 별걱정 다 하는 거 보니까. 그만 내려가요. 그 나이에 감기 들면 잘 낫지도 않아.”
“지는 무슨 이팔청춘인 줄 아네. 너도 내일 모레면 불혹이야, 불혹.”
“아직 아니잖아요. 늙은 뒤의 일은 늙어서 생각할게요.”
재희는 충민의 등을 떠밀며 옥상을 나섰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태워 충민을 내려 보낸 재희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속은 갑갑했다. 하기야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방송국에 있는 모두가 같은 마음일 터였다.
사무실로 내려온 재희는 가장 먼저 눈으로 정언의 자리를 찾았다. 윤이 돌아오면 다시 얘기하자고 했으니 당연히 자리에 있을 줄 알았는데, 윤과 정언의 자리가 나란히 비어 있었다. 무슨 심부름을 보냈길래 이렇게 길게 부재중이야,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정언이 머리를 내밀었다.
“어, 선배.”
정언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재희가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가자 정언이 문을 닫았다. 안에는 이미 윤이 앉아 있었다. 회의실에서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인 듯했다. 정언이 창으로 회의실 밖을 슬쩍 보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문은 왜?”
재희가 의아한 표정을 하자 정언이 재희를 끌어 윤 옆에 앉히더니 자기도 옆에 와서 앉았다. 오늘따라 왜 이러나 싶어 정언을 마주 보자 정언이 팔짱을 끼었다.
“컨펌하시죠.”
“뭘 컨펌해?”
“박규형 씨 사건 당장 시작해야 돼요. 시간 없잖아요.”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하다는 투로 뭐라고 하려던 재희는 다음 순간 말을 멈췄다. 아까까지만 해도 선배가 컨펌하면, 식으로 모호하게 말하던 정언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눈을 가늘게 뜬 재희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 가져왔구나?”
정언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음성파일을 재생시켜 재희에게 내밀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재희는 미간을 좁혔다. 통화 녹취 파일이었다. 내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큰 건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런 게 갑자기 어디서 났어?”
재희가 고개를 들며 묻자 정언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더니 대답 대신 윤을 돌아보았다. 윤이 긴장한 티가 역력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가만히 윤의 말을 듣고 있던 재희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는 소리를 냈다.
“여태 뭐 하러 있었어, 이게 체질인데.”
그 말에 윤이 멈칫하며 재희와 시선을 맞춰 왔다. 뭔가 불안한 듯, 형용하기 모호한 표정이었다. 혹시 놀린 걸로 알아들었나 싶어 재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칭찬이야.”
“아, 네…….”
윤이 미묘하게 끝을 뭉개는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재희는 윤을 유심히 보다 물었다.
“김 피디, 지금 취한 거 맞지?”
정언의 핸드폰 안에 들어가 있는 이 메모리카드를 윤이 어떻게 찾았는지 이해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무리 봐도 귀가 새빨간 데다 몇 번을 더듬거리는 게 술이 좀 들어간 꼴이었다.
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하고 웅얼거렸다. 그새 어디서 술을 마셨나 싶어 황당한 표정을 하기 무섭게 정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지금.”
“서 피디가 먹였어?”
윤이 자발적으로 취한 거라면 자신이 뭐라고 한 소리 하기 전에 정언이 쥐 잡듯 잡았을 게 뻔했다. 그러나 나서서 그게 뭐가 중요하냐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정언과 마신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언이 변명을 하며 말을 돌렸다.
“술 못 마시는 거 몰랐다니까, 난. 아무튼 내일부터 할 일 엄청 많은데 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이걸 어떻게 안 하냐, 해야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은 재희는 곧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거 보안 건일 텐데 일단 송 작가는 알지? 아우트라인 완벽히 나올 때까지는 나랑 송 작가, 서 피디, 김 피디만 아는 걸로 하자. 시간 아껴 써.”
정언이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일단 퇴근하고. 아, 그리고 김 피디는 대리 불러 주든가 택시 태워 보내든가 해. 얼마나 먹여서 사람이 저 지경이야? 서 피디도 늦었는데 괜히 걸어가지 말고 차 타고 가. 그거 파일은 복사해 놨어? 내가 확인 좀 해야겠는데.”
“뭐가 저 지경이에요. 소주 반병도 안 마셨어요. 내 일은 열 시도 안 됐는데 걱정 마시고, 파일은 선배 메일로 보냈어요. 확인해 봐요.”
“알았으니까 빨리 퇴근해.”
재희가 손을 젓자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비틀거렸다. 황급히 윤을 부축하는 정언의 얼굴에 재희는 잘 한다, 하고 내뱉으며 정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정언이 멋쩍게 웃고는 윤을 잡아끌어 회의실을 나갔다.
빈 회의실에 남겨진 재희는 퍼뜩 아까의 충민을 떠올렸다.
― 서정언 밑에서 여태 한마디도 안 들었으면 그거 난놈인데. 조만간 무슨 사고 하나 치는 거 아니냐?
“돗자리 깔아야겠네.”
피식 웃은 재희는 손을 깍지 끼어 머리 뒤에 대고는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더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득 더 답답해졌다. 긴 숨을 내뱉은 재희는 곧 회의실을 나서며 자리로 돌아갔다. 모니터 하단에서 메일 알림창이 재희를 반겼다.
클릭한 메일에는 두 개의 압축파일이 있었다. 다운받아 압축을 풀자 스물여덟 개의 녹취 파일과 서른두 개의 문서 파일 목록이 모니터를 꽉 채웠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사무실 안에서 재희는 한동안 그 파일 목록을 뚫어져라 보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오늘 밤에도 잠들기는 틀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