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8
38화.
08.
알람 소리에 퍼뜩 눈을 뜬 윤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신음 소리를 내며 잠시 몸을 숙였던 윤은 어젯밤의 일을 복기했다.
메모리카드를 찾아 사무실로 오자마자 정언에게 얘기했고, 정언과 저녁을 먹었고, 재희 앞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거기까지 떠올린 윤은 으윽, 하며 머리를 감쌌다. 재희가 술 취했냐고 물어보던 것이 생각난 탓이었다.
소주 반병이면 이미 치사량에 가깝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면서 마셨던 건 아마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던 것이다.
멍하니 앉아 있던 윤은 긴 한숨을 내쉬며 침대를 벗어났다. 그래도 취한 주제에 샤워는 하고 잔 게 다행이었다.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자 부스스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무슨 꿈을 꿨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깊게 잠들었던 것 같은데, 눈의 실핏줄은 새빨갛게 충혈된 채였다.
두 뺨을 탁탁 치고는 찬물을 틀어 세수를 하자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세면대를 붙들고 고개를 숙이자 물방울이 머리칼과 턱을 타고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칭찬이야.」
정언이 무심하게 내뱉었던 그 말이 뇌리를 지났다. 늘 그렇듯 그리 다정한 말투는 아니었으나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때 정언의 표정을 떠올리자 술은 진즉에 다 깼을 텐데도 불현듯 귓가가 뜨거워졌다.
윤은 눈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어쩐지 그런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정언이 칭찬에 인색한 타입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게 기분 나쁠 리 없었다.
자신이 보다 에 더 어울린다던 정언의 말을 상기하자, 바로 재희 역시 같은 칭찬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나 생각을 되짚던 윤은 다시 눈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랬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확신할 수 없었다, 가 아니라 그렇지 않았다, 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 온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를 모를 정도였다. 때로 윤은 자신이 진짜 에서 일을 한 적이 있긴 있었나 생각할 때도 있었다. 퇴근 후 밤늦게나 주말에 간혹 케이블 TV에서 재방송을 보면 낯선 기분이었다.
분명 저 스튜디오에서 직접 촬영도 하고 편집도 했는데, 지금은 그 사실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직 자신이 완전히 피디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에 더 어울리는 사람. 윤은 그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윤의 눈에 비친 의 사람들은 늘 바쁘고 치열하고 진지했다. 어떤 사명감이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지 윤은 매 순간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처음에 어땠는지 이젠 잘 기억 안 나.」
솔직히 말하면, 이라고 발음할 때의 정언은 다른 사람 같았다. 그 순간, 윤은 어쩌면 자신이 아주 잠깐 정언의 선 너머를 엿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건 그냥 하는 거야, 그냥.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냥. 단순한 단어 뒤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정언은 그냥이라고 말했지만, 그저 그뿐이라면 정언이 어떻게 지금까지 세상의 그림자를 들여다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작은 메모리카드 안에 들어 있던 녹취 파일 하나만으로도 발을 딛고 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일을 ‘그냥’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한다는 건 윤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끊듯, 때마침 욕실 밖에서 미리 켜짐 예약을 걸어 놓은 TV의 전원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채널은 항상 YBS의 아침 뉴스에 맞춰져 있었다. 윤은 닫힌 문 너머로 둔탁하게 들려오는 앵커의 목소리를 들으며 후다닥 면도를 하고 이를 닦았다.
어제 술을 마시고 차를 회사에 두고 온 탓에 더 서둘러야 했다. 머리를 대강 만지고 백팩을 멘 뒤 식탁 위의 에너지 바를 하나 까서 입에 문 윤은 집 근처의 정류장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만원 버스에서 한동안 모처럼의 출근길스러운 시간을 만끽했다.
다음부터는 차라리 대리운전을 불러야겠다는 큰 깨달음을 준 지옥 같은 출근길이었다. 차를 왜 샀는지가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버스에서 거의 튕겨지듯 내린 윤은 숨을 고르며 그새 구겨진 재킷을 탁탁 털었다. 아침부터 조금 울적해져 카페인 생각이 간절했다.
윤은 방송국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카페로 향했다. 밤샘을 했는지 좀비 같은 몰골의 사람들이 이미 여기저기 간헐적으로 흩어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저 꼴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직감한 윤은 메뉴판을 보다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트리플 샷 벤티로 하나 주세요.”
그때 누군가가 카운터 앞으로 쑥 들어오며 먼저 주문을 했다. 멈칫한 윤은 시선을 내렸다가 어, 하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이었다. 정언 역시 무심코 윤을 쳐다보고는 멈칫했다. 윤은 재빨리 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모카초코 톨 사이즈 샷 하나 추가해서 따뜻한 걸로 주시고 계산은 이걸로 같이요.”
정언이 아니, 하고 가로막으려 했으나 이미 윤의 카드가 점원에게 넘어간 뒤였다. 정언이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이며 내뱉었다.
“후배한테 삥 뜯는 거 취미 없는데.”
“저도 삥 뜯기는 취미는 없고요, 오늘은 진짜 그냥 사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정언이 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럴 기분은 내가 느껴야 될 거 같은데, 왜 김 피디가 느끼지?”
“어제 선배한테 칭찬받고 기분 좋아서요?”
그런 대답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정언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윤은 그게 정언 나름의 곤란해하는 표정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아마 정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화가 난 것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고 생각한 순간 윤은 주저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을 잘 아는 걸까.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선뜻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정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자신은 굴러 들어온 돌이었고, 정언에게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만 정언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하고 모카초코 톨 사이즈 나왔습니다.”
점원의 낭랑한 목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정언이 먼저 픽업대 위에 올라온 모카초코 컵에 슬리브를 끼워 윤에게 내밀었다. 받아 든 컵은 따뜻했다.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기 무섭게 혈관으로 당과 카페인이 동시에 차올랐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자기 얼굴만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에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마신 정언이 그런 윤을 물끄러미 보다 픽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잘 마실게.”
왜요, 하고 묻기도 전에 컵을 들어 보인 정언이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윤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로비 안은 한산했다. 금방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 층수를 누르자 문이 닫혔다. 단둘이 선 엘리베이터 안은 어쩐지 어색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윤이 먼저 정적을 깨자 정언이 시선을 앞에 둔 채 되물었다.
“뭐가.”
“제가 술 진짜 못 마시거든요. 그래서…….”
“그런 거 같더라.”
정언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머쓱해진 윤은 눈치를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역시 민폐라고 생각했을까 싶어 공연히 초조해졌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이미 출근해 있던 민혜가 어 정언, 하고 손을 흔들더니 뒤따라 들어오는 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둘이 같이 출근해? 이거 뭐지? 아주 낯선 그림인데?”
번갈아 손가락질을 하며 오지랖을 부릴 태세가 만만했다. 그 속을 빤히 들여다본 듯, 정언이 가방을 놓고는 들어 올린 민혜의 손가락을 아래로 도로 내려 주었다.
“로비에서 만났어요.”
“아, 그래? 난 또 서정언의 퍽퍽한 삶에 약간의 촉촉함을 기대했네?”
민혜가 실망 반, 놀림 반의 말투로 대꾸했으나 정언은 역시 가차 없었다.
“무슨 강재희 뽀로로 찍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 말에 윤은 마시던 커피가 목에 걸려 기침을 했다. 재희와 뽀로로라니,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조합이었다. 민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치를 떨었다.
“강재희가 찍는 뽀로로 우리 애가 볼까 무섭다. 아무튼 어제 컨펌 났으면 제보영상 추린 거 먼저 봐도 되나?”
“회의실 들어가서 얘기하죠. 선배가 이거 보안 건이라고, 일단 우리 팀하고 자기만 알고 있자고 하더라고.”
“아, 오케이.”
민혜가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종이들을 한데 모았다. 회의실에 들어가 문을 닫은 정언은 화이트보드 앞의 마커펜을 집어 들었다.
“일단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게 단순 자살이 아니라는 건 이제 뭐 논란의 여지가 없지. 물론 자살이냐 이건 아직 모르지만 사내 왕따, 이런 게 헛소리라는 건 거의 확실하단 말이에요. 문제는 메모리카드 안에 있는 파일인데, 녹취 파일 스물여덟 개, 암호 걸린 일반 문서 파일 서른두 개.”
정언은 박규형, 녹취 파일, 문서 파일, 자살/타살 따위의 낱말을 화이트보드 위에 빠르게 쓰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 통화를 한 상대가 누군지 찾는 게 제일 중요해요. 이희경 씨한테 통화 목록 뽑아줄 수 있는지 부탁해 볼게요. 녹취 파일은 귀찮겠지만 송 작가님이 풀어 주세요. 당분간 보안 건이라 프리뷰 맡겼다가 괜히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