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9
39화.
민혜가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적으며 대답했다.
“파일 짧으니까 그건 괜찮아, 내가 할게. 그런데 이거 경찰도 좀 이상하지 않아? 유서도 없고 자살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걸 왜 그냥 바로 자살이라고 판단했을까? 사건 담당이 의정부경찰서라고 했나? 부인이 부검 요청했다면서. 혹시 결과 나왔어?”
“곧 나온다고 하긴 했어요, 그때. 지금쯤 나왔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흠, 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민혜가 물었다.
“의정부면 경기북부지방경찰청 관할서지? 거기 경찰청에 허중오 경감님 있잖아. 예전부터 잘 알지 않아?”
“그쵸. 장기미제사건 전담팀 가시기 전부터니까, 한 오륙 년 알았죠.”
“그러면 경감님 통해서 정보 한 번 부탁해 봐. 담당 형사 얘기랑 크로스체크 해보게. 통화 목록 나오면 날짜하고 내용 대조하는 건 내가 할게. 그리고 나 지금 메일로 받은 블랙박스 영상들이 좀 있거든. 이거 의외로 양이 꽤 되는데, 셋이 3분의 1씩 나눠서 볼래?”
“좋아요.”
정신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메모하던 윤이 눈을 들었다.
“그 문서 파일은 어떻게 열어 보실 거예요?”
윤의 말에 정언이 펜 뚜껑으로 미간을 긁적였다.
“그게 문젠데, 일단 우리가 지금 팀에서 갖고 있는 프로그램 몇 개 있어서 돌려 봤는데 안 열리더라고. 암호 프로그램으로 한 번 걸고, 파일 자체에서 또 한 번 걸고 해서 이중으로 잠가 놨어. 업체에 맡겨 볼까 생각중이긴 한데 모르겠네. 녹취 파일도 일부러 거기다 보관한 거면 그것들도 중요한 파일일 가능성이 높은데. 핸드폰으로 평소에 업무를 봤을 수도 있고.”
정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던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핸드폰 확인했는데 그 흔한 일정관리 어플 하나가 없더라고요. 핸드폰으로 뭘 막 하고 이런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어요. 수기로 다이어리도 다 기록했고…….”
“다이어리? 그 얘기를 왜 지금 해?”
다이어리라는 말에 정언과 민혜가 눈을 크게 뜨며 동시에 윤을 보았다.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한 윤은 목을 집어넣었다.
“아, 저, 지금 생각이 났어요.”
정언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윤을 다그쳤다.
“그것도 같이 받아 왔어?”
“아, 아뇨.”
“왜 안 받아 왔어, 그렇게 중요한 걸?”
형사가 됐어도 대성했을 기세로 자신을 취조하는 정언의 얼굴에 약간 쭈그러든 윤은 눈치를 보다 핸드폰을 꺼냈다.
“아뇨, 그…… 혹시나 해서 박스 열 때 핸드폰으로 다 촬영했거든요.”
윤은 부랴부랴 핸드폰에서 영상을 찾아 정언에게 건넸다. 정언과 함께 그 동영상을 스킵해 가며 살펴보던 민혜가 감동한 표정으로 윤을 보았다.
“얼굴만 꼼꼼하게 잘생긴 줄 알았는데 이런 것도 꼼꼼하네. 이거 캡처해서 보면 되겠다. 하여튼 예쁜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얼굴 좋고 키 좋고 사람 센서티브한 거 좋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좋아. 아우, 나 왜 일찍 결혼했니?”
폭풍처럼 휘몰아친 칭찬에 윤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당황하자, 정언이 픽 웃고는 민혜에게 놀리는 투로 물었다.
“일찍 결혼 안 했으면 뭐?”
그 말을 들은 민혜가 곧 시무룩해졌다.
“하긴 늦게 결혼했다고 김 피디 같은 남자 만났을 리가 없을 거 같긴 해. 나 의외로 눈 낮잖아.”
아무래도 그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윤이 이럴 때는 대체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나 고심하는 사이, 정작 민혜는 쿨하게 다시 말을 돌렸다.
“일정표 나온 부분 캡처해서 볼게. 그리고 나 어제 집에 가서 생각해 봤는데, 우리 예전에 주 피디가 신도시 투기꾼 아이템 한 거 있잖아. 그거 진송신도시 데이터 아마 남아 있는 거 있을 거야. 정언, 이현성 대표하고 만났었지?”
“그거 원주민 데모 문제로 얘기한 거였어요. 그 부분은 상생변 최유림 변호사가 잘 안다고 한 번 연락해 보라던데요.”
최유림 변호사의 이름을 들은 민혜가 어어, 하며 손을 들었다.
“나 최변 알아. 내가 통화할게. 최변이 박규형 씨하고 안면 있었으려나?”
“그럴 수도 있죠.”
정언의 말에 두 손을 입가에 댄 채 한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민혜는 펜 끝을 테이블 위에 톡톡 두드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망설이는 듯 한참 말을 아끼던 민혜가 목을 뽑아 창 너머를 슬쩍 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혹시 진짜로 엄대진하고 관계있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하죠?”
“지금 청와대하고 한선당에서 우리 치는 건데, 이걸로 엄대진 날리면 걔들이 우리 못 건드리지 않을까?”
민혜의 희망적인 가정에 낮은 한숨을 쉰 정언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런데 아직 모르는 거니까. 이걸로 엄대진이 날아갈지도 확실하지 않잖아요, 지금은. 서온건설 게이트도 그러고 그냥 덮어 버렸는데 우리가 이거 회심의 일격이라고 생각해도 그쪽에서 대비책 있을 수도 있고.”
정언의 대답을 들은 민혜가 실망한 표정으로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정언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터지면 지금처럼 눈치 보면서 날리려고 안 할 걸요. 당장 모가지 자르려고 들지. 일단 우리는 지금 메모리카드 자료에 집중하는 걸로 합시다. 뭐가 더 나오면 그건 그때 생각하고. 작가님은 최 변호사님한테 연락해 보시고, 나는 허중오 경감님한테 연락해 볼게요. 일정 잡히면 그 전에 블랙박스 영상 있는 거 보고. 영상 뭐 좀 있었어요?”
“그 주변 부동산 업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블랙박스 영상 보내 준 게 대부분인데, 뭐 동네가 아직 일반인들이 안 돌아다녀서 쓸 만한 게 있는지는 모르겠더라.”
“다른 제보 들어온 것 중에는?”
정언의 물음에 민혜가 펜 끝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이며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 거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애가 메일 보냈었어. 자기가 그날 밤에 박규형 씨를 봤대.”
“박규형 씨인 건 어떻게 알았대요?”
“거기 편의점이 그거 딱 하나라 오는 손님들 얼굴을 거의 기억한다고 하더라고. 아파트 단지도 입주 전이고, 오피스텔도 아직 공실이 대부분이라 저녁 여덟 시면 닫는데 그때 왔었다고. 별 특별한 얘긴 아닌데 그냥 제보 달라는 자막 보고 생각이 났대.”
“그래요? 연락처 있어요?”
“이따 메신저로 보내 줄게.”
그때 바깥에서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자 재희가 그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윤과 정언, 민혜를 본 재희가 놀란 표정을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윤은 재희의 머리에 아직 물기가 안 마른 것을 알아차렸다. 밤샘한 뒤 방금 숙직실에서 씻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다들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
“퇴근도 안 한 사람이 그런 소리 하니까 아주 기가 막히네.”
정언 역시 그것을 눈치챈 듯 대번에 얼굴을 구기며 내뱉었다. 이런 일이 일상인지, 재희는 대답 대신 하하하, 하고 누가 봐도 연기하는 얼굴로 웃고는 말을 돌렸다.
“혹시 메일 왔어?”
“무슨 메일이요?”
정언이 되묻자 재희가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노조에서 오전에 메일 보낸다고 했거든. 서명 받는다고. 황은석 피디 출근하자마자 보낸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왔나?”
“우리 이사진 바뀐 것 때문에?”
“응. 교양국은 벌써 끝났대. 우리도 작가들하고 리서처까지 전원 할 거야. 메일 확인해 보고 다들 황 피디 오면 서명 좀 해 줘.”
“오케이, 그게 뭐 어렵나.”
민혜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아 둔 윤과 정언의 핸드폰에서 동시에 메일 알림이 울렸다. 윤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뒤집어 보았다. 사내 메일 알림이었다. 방금 재희가 말한 서명 건인 듯했다.
정언 역시 메일을 확인하는지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선배, 메일 내용 봤어요?”
정언이 묻자 재희가 의아한 얼굴로 아니,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온 메일을 내가 어떻게 봐. 왜, 뭐라고 그러는데?”
정언은 입술을 깨물며 재희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싶어 윤도 무심코 새 메일 알림을 눌렀다. 곁에 있던 민혜도 궁금한지 까치발로 윤의 핸드폰 화면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황은석 피디의 이름으로 온 메일의 첫 줄이 눈에 들어왔다.
YBS 노조 조합원 여러분, 오늘 인사위원회가 성세준 피디의 해직, 김진우 앵커의 대기 발령을 통보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어머, 하며 민혜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윤 역시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비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회의실 안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다음 줄은 눈에 더 들어오지도 않았다.
메인 뉴스의 피디와 앵커를 하루아침에, 그것도 한꺼번에 경질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조치였다. 핸드폰을 든 손이 떨렸다.
“이 개새끼들 이거 진짜 대가리가 완전히 어떻게 돼 버린 거 아냐?”
정언이 분을 못 이겨 바닥을 구르며 내뱉었다.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재희가 말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밖에서 사무실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곧 연이어 들렸다. 하얗게 질린 민혜가 윤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한 번 메일 내용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래.”
정언이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며 한동안 침묵했다. 마침내 후, 하고 긴 숨을 뱉은 정언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들이네. 진짜 취재 다 하고 방송 못 하는 경우 생길 수도 있을 거 같으니까 최대한 빨리 움직이죠. 나 지금 허중오 경감님한테 전화해서 스케줄 잡을게. 작가님도 최 변호사님한테 연락 좀 해 줘요.”
“어, 알았어.”
민혜가 후다닥 회의실을 나갔다. 정언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물건들을 집다 말고 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은 핸드폰을 든 채 굳어 있었다.
태훈이 울면서 촬영 들어간 다큐멘터리가 엎어졌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자신이 인사위원회에 불려가 하루아침에 로 전보 조치를 당했을 때도 지금 만큼 현실이 섬뜩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김 피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