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4
4화.
태훈이 바짝 마른 입술을 이 끝으로 뜯었다. 까슬하게 일어난 살갗이 이 끝에 걸려 찢기며 새빨갛게 핏물이 배어났다. 그러나 태훈은 그걸 깨닫지도 못한 듯 실없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씨발, 진짜 좆같은 게 뭔지 아냐? 요새 기제국 사람들한테 종편이나 케이블 쪽에서 컨택이 엄청 와. 나한테도 저번 주에 두 군데서 갑자기 연락이 왔거든. 다큐 팀이라고, 거기 팀장들이. 저번에 한 거 잘 봤다고,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싶대. 무슨 말 하려는지 눈치 깠잖아. 내가 아니라고 그랬어. 나 YBS 옮길 생각 없다고. 그러니까 거기서 그래. 아, 근데 좀 있으면 생각이 달라지실 텐데. 그때는 내가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어.”
태훈이 테이블 위의 종이 냅킨을 뽑아 피 묻은 입술 위를 문질러 닦았다. 얇은 냅킨 위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얼룩졌다. 태훈은 그 냅킨을 손안에서 구겼다.
“다른 데서는 벌써 다 알고 있었던 거지. 우리 회사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씨발, 종편에서도 알고 케이블에서도 아는 걸 정작 내가 몰랐다고. 개 같은 새끼들, 남의 회사 망하게 생겼는데 그거 뻔히 알면서 사람 빼 갈 생각부터 하는 그 씨발 새끼들…… 근데 시보국 그 꼴 나는 거 뻔히 알면서, 윗대가리들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하니까 순진하게 믿은 내가 더 병신이야.”
태훈은 빈 잔을 탁자 위에 툭툭 두드렸다. 철제 탁자 위로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는 와글거리는 식당 안에서도 선명했다. 몇 번 그러기를 반복하던 태훈이 손을 멈췄다.
“……야, 김윤. 근데 진짜 거지 같은 게 뭔지 아냐?”
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훈이 눈을 들어 윤을 보았다. 표정을 읽기 어려운 가느다란 눈매 속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나도 이제 겁나. 시보국 사람들처럼 윗대가리들하고 싸울 자신 없고, 돈 많이 준다는 데 가고 싶어. 매일 밤마다 그 생각 한다. 그냥 갈까. 씨발, 다큐는 아무 데서나 찍으면 어때. 내가 뭐하려고 돈도 안 되는 거 찍으면서…… 웃기지. 그 생각하면서 더 비참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냐?”
마지막 말은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태훈은 울고 있었다. 냄비에서 탄 냄새가 진동했다. 아주머니가 달려와 뭐하냐며 면박을 주고는 가스버너를 껐다.
그러나 윤은 그저 태훈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태훈이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태훈이 이럴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태훈은 그 큰 덩치를 웅크린 채 소리 없이 울었다. 탁자 위로 떨어지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 광경은 어떤 단어로도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식당의 가장 구석 자리에 시선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식당의 텔레비전에서는 일일 연속극의 배우들이 대화를 나눴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오직 이 자리만이 다른 세상이었다.
도저히 여기 더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계산을 하고 돌아와 태훈을 부축했다.
“오태훈, 집에 가자. 일단 집에 가서 한숨 자. 다 잘 될 거야. 요즘이 어떤 시댄데 그래.”
윤은 애써 웃으며 아무것도 아닌 양 말했다. 무거운 몸이 기대 왔다. 그러나 묵직해진 건 마음이었다.
다 잘 될 거야.
무책임한 말이었다. 윤은 자신이 스스로도 그 말을 믿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까닭 모를 두려움 같은 감정은 닫힌 창문 사이를 비집는 바람처럼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자문했으나 답은 없었다. 상식 바깥의 일을 상상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윤은 태훈을 끌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대로변은 밝고 시끄러웠다. 식당을 나섰는데도 여전히 태훈과 자신만이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윤은 택시를 잡았다. 뒷자리에 태훈을 밀어 넣자 이미 취한 태훈이 모로 기댔다. 윤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태훈의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문을 닫았다. 기사에게 태훈의 집 주소를 불러 준 윤은 금요일 밤의 도로 속으로 사라지는 택시를 바라보았다.
식당의 열린 문으로 음식 냄새가 흘러나왔다. 거리에 늘어선 간판들의 빛은 휘황찬란했다. 모든 게 평소와 똑같았다. 그러나 불현듯 누군가 발밑을 파헤치는 듯한 감각이 지났다. 딛고 선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 감각은 빈말로라도 결코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윤은 천천히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수만 번은 더 지났을 길이 낯설었다. 현관의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센서등이 켜졌다. 벽에 기댄 윤은 팔을 올려 잠시 눈을 가렸다. 감은 눈 안으로 태훈의 우는 얼굴이 선연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던 윤은 불도 켜지 않은 채 냉장고에 든 캔맥주 하나를 꺼냈다. 어두운 거실 속 소파에 앉은 윤은 천천히 맥주 한 캔을 모두 비웠다. 이미 주량은 한계를 넘었지만 정신은 이상하게도 멀쩡했다.
윤은 탁자 위의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무의식적으로 버튼을 누를 때마다 뉴스와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과 홈쇼핑 채널 따위가 어지럽게 바뀌며 돌아갔다.
‘그분들’께서 ‘불편하게’ 여기는 어떤 것도 방송될 수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이 TV 뒤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윤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멈춘 뉴스 채널에서 아나운서의 무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회는 내일 본회의에서 400조 원에 달하는 내년도 예산안 및 예산부수법안에 대한 처리를 시도할 예정입니다. 여야 및 정부는 현재까지 타협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주요 쟁점에 대한 협상이 결렬될 경우…….』
이름도,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국회의원들이 화면 속의 국회 안에서 삿대질을 하고 고성을 질러 댔다. 윤은 그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습관처럼 보는 뉴스였다. 아마 어제도 비슷한 내용을 봤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생경했다. 굳은 듯 앉아 있던 윤은 TV를 껐다. 집 안이 순식간에 적막 속으로 잠겨들었다.
꺼진 화면을 뚫어지게 보던 윤은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에 앉은 윤은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즐겨찾기에 입력된 사원용 사이트 탭을 누르자 사번과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화면이 나타났다.
눈을 감고도 칠 수 있는 번호들을 입력하자 화면이 바뀌었다. 사원증의 증명사진과 함께 자신의 소속이 나타났다.
김윤, 교양국 1부, PD.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이 떨렸다. 윤은 이 끝으로 입술을 꽉 눌렀다. 사내 게시판의 글쓰기 버튼을 누르자 흰 창이 화면을 채웠다. 곧 키보드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고요한 집 안을 옅게 채웠다.
― 어용 이사진은 방송에 간섭할 권리가 없습니다.
어쭙잖은 정의감 따위와는 일생 연이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후회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누구에게인지 모를 말을 쏟아 내는 내내 머릿속은 뜨거웠다. 그 열기의 궤적이 마음 위를 그었다.
분노일까, 슬픔일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은 긴 밤 속에서 더욱 선명했다.
* * *
정언은 아직 젖은 머리를 대강 털고 물기 어린 수건을 목에 걸었다. 풀썩 소리가 나도록 소파에 주저앉으며 목을 젖히자 흰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무소음 벽시계는 조용히 자정을 막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그게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정언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벤티 사이즈의 테이크아웃 컵을 집어 들었다. 트리플 샷이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얼음이 반쯤 녹은 채였다.
그래도 트리플 샷의 위력은 건재했다. 한 모금 마시자 느슨했던 머릿속이 바짝 당겨졌다. 정언은 남은 커피를 마시며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새 부재중 통화가 들어와 있었다.
강재희.
세 글자의 이름 옆에는 부재중 통화 건수 1이 표시된 채였다. 얼굴을 찌푸린 정언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둔 핸즈프리를 한쪽 귀에 꽂았다. 재희의 이름을 누르고 전화를 걸자 건조한 통화 연결음이 반복됐다. 몇 초쯤 신호가 갔을까, 곧 낮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 서 피디. 자는 줄 알았는데.』
재희였다. 평소보다 목이 약간 잠긴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도 사무실이에요?”
정언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긍정 대신 짧은 침묵이 지났다. 한숨을 쉰 정언은 테이크아웃 잔에 꽂힌 빨대를 이 끝으로 잘근거렸다. 질긴 비닐이 이 사이에서 미끌거렸다. 정언은 조금 부정확한 발음으로 재희를 나무랐다.
“사람 진짜 못 말리네. 사무실에서 진 치고 있으면 뭐가 달라지나? 들어가서 자라니까. 잠을 자야 머리가 돌아갈 거 아냐. 기력도 좀 생기고.”
재희가 머쓱한 듯 대꾸했다.
『잠이 와야 자지.』
정언은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뱉었다. 재희가 눈앞에 없는데도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본인이 불면증 환자인 거 자각은 있어요? 그 정도면 약이라도 먹든가. 선배가 아직도 이십 대인 줄 알아요? 그러다 진짜 골로 가는 거 순식간이야. 아, 혹시 죽으려고? 누구 좋으라고? 선배 죽으면 좋아할 사람 많긴 한데.”
『스톱. 나 사무실에서 듣는 잔소리, 전화로도 듣고 싶어 하는 변태 아니거든.』
콩 볶듯 다그치자 재희가 바로 정언의 말을 잘랐다. 아무래도 잔소리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뭐라고 더 퍼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언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자신에게도 재희를 닦달할 만큼의 기력이 없었다.
정언은 대신 들으라는 듯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전화했어요? 우리 얘기는 다 끝난 거 아닌가?”
퉁명스러운 대꾸에 잠시 정적을 지키던 재희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다시 생각해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