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40
40화.
“김 피디.”
정언이 윤을 불렀다. 멍하니 서 있던 윤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눈을 가늘게 뜬 정언이 윤을 빤히 보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왔다.
다음 순간 정언은 손을 뻗어 윤의 양쪽 뺨을 잡고는 자기를 보게 만들었다. 얼결에 눈이 마주쳐 당황한 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정언은 손에 힘을 더 주어 윤의 얼굴을 붙들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닿아 있는 뺨으로 스미는 그 서늘한 체온에, 누군가가 목덜미로 작은 얼음 조각을 얹은 듯 순간 작게 소름이 돋았다. 정언은 뚫어질 듯 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피할 수 없이 시선이 붙들렸다.
늘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 눈은 가까이서 보니 더 깊었다. 시선이 거기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몸이 완전히 굳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또렷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윤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정언은 말을 멈췄다. 단어를 고르는 듯, 혹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그 속눈썹이 잠시 내려앉아 옅은 그늘을 드리웠다. 짧은 정적 후 정언이 입을 열었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였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을 할 거야.”
정언이 뱉은 단어들은 약간의 딜레이를 두고 하나씩 입력됐다. 정언이 가만히 윤을 응시했다. 아마 기껏해야 몇 초에 불과했을 테지만, 잠시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정언이 윤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순간 마법이 풀리듯 윤은 현실로 돌아왔다. 정언이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다리가 풀린 윤은 탁자에 기대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귀가 먹먹했다.
몸을 둥글게 만 윤은 무릎 위에 이마를 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빤히 보던 정언의 눈동자가 감은 눈 안으로도 선명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을 할 거야.
눌러쓴 글씨 같은 정언의 목소리가 한마디, 한마디 되살아났다. 그 순간 느껴진 감각이 빠르게 전신을 달려 내려갔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어쩌면 두려움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손끝만 대도 깨질 게 분명한 얇은 얼음 위에 올라선 것처럼.
그 얼음 위에 금이 갔다, 라고 느낀 순간―
이건, 빠진 거다.
그 감각이 언어로 치환되는 순간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숨을 쉬는 법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나 완전 미친놈 아냐?”
완전히 얼어붙었다가 간신히 혼잣말을 뱉은 윤은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뺨에 닿았던 그 서늘한 손의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에게 반하는 건 단 한순간이면 충분하다는 걸 윤은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이런 상황에, 이런 사람에게.
모든 게 좋지 않았다. 막연하던 그 수많은 감정들이 한순간 또렷해졌다. 동경, 호기심, 오기,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던 순간들. 몸이 떨렸다. 미친놈, 하고 다시 한 번 중얼거린 윤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09.
“야, 이거 일 커지겠네. 총파업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
인터넷 기사를 보던 찬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곁에 앉아 있던 현진이 눈을 모니터에 고정시킨 채 물었다.
“마지막 총파업이 언제였지?”
“완전 총파업은 90년대 초반에 한 게 마지막일걸? 그게 92년이야, 93년이야. 아무튼 IMF 오기 한참 전이야. 아니, 근데 뭐 직원들이야 총파업 들어간다 치는데 총파업 들어가면 작가들은 어떡해.”
찬수가 걱정스러운 투로 묻자 현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뭐 어떡해, 채널은 많고 경력직은 부족하고 진짜 잘리면 갈 데가 없냐? 작가노조에서 파업 결정하면 우리도 하는 거고. 그냥 회의감 들어서 그렇지.”
“아니, 애 아빠한테 파업이 웬 말이야. 내가 애가 둘인데…….”
파티션 너머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언은 결국 더 참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
“임 선배, 아직 하지도 않은 파업으로 집에 있는 애들 걱정하지 말고 다음 주 방송 걱정부터 하시죠. 총파업을 해도 당장 다음 주부터 할 거 아니니까.”
정언의 냉정한 말에 찬수가 예, 예, 하며 투덜거렸다.
“하여튼 이 팀 인간들은 너무 차가워. 가장의 마음을 몰라.”
정색을 한 정언이 되받아쳤다.
“그럼 남들은 결혼도 못 하고 늙어 죽게 생겼는데, 와이프도 있고 토끼 같은 자식들까지 둘이나 있는 사람이 우는 소리 하면 공감을 받아요, 못 받아요?”
“생각해 보니 그래도 너나 강재희나 한현진보다 내가 낫긴 낫다. 지금 죽어도 제삿밥 먹여 줄 자식은 있잖아.”
찬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수긍하자 옆자리에서 현진이 눈을 부라렸다.
“야, 임찬수. 그 제삿밥 지금 먹을래?”
“아, 아니.”
찬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식 웃은 정언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옅은 한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성세준 피디와 김진우 앵커 징계 이후로 사내 분위기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주말 앵커인 정수창 앵커가 대타로 투입된 첫날, 는 세준이 직접 회의실 안에서 녹음한 인사위원회 녹취 파일을 첫 꼭지로 내보냈다. 위에서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갈 데까지 가겠다는 시위였다.
변조된 인사위원들의 목소리로 좌파 편향적이다, 빨갱이다, 종북이다, 사상이 의심스럽다, 자격 미달이다 따위의 폭언이 쏟아졌다. 메인 앵커가 된 수창의 첫 멘트는 ‘참담한 심정입니다.’였다.
뉴스가 끝나기도 전 시청자 게시판과 전화, 메일, 메신저 등 열려 있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통로로 시청자들의 분노가 쏟아졌다. 인터넷 기사들도 앞다투어 하루아침에 에 저질러진 만행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진은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철옹성이었다.
이사진은 항의하는 직원들을 피해 뒷문과 앞문을 오가며 출근했고, 사설 경비업체까지 고용해 아예 직원들의 접근 자체를 막았다. 이사진들의 사무실과 이사회실이 있는 9층, 10층은 전용 엘리베이터 외에는 올라가지도 못하도록 폐쇄됐다.
긴 싸움이 될 거라고 직감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언도 그 중 하나였다. 회사를 이루는 건 99퍼센트의 직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1퍼센트의 이사들, 그것도 지금까지 YBS가 어떻게 시사 강국의 명성을 얻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이사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항의를 하면 즉시 징계가 돌아왔다. 감봉과 해직, 정직, 강제 전보, 심지어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미 두 개의 시사 프로그램이 문을 닫았다. 이사진의 최종 목표는 현재 시보국의 모든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와 는 시보국 최후의 보루였다. 시청률, 화제성, 상징성, 그 무엇으로도 폐지시킬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명분 같은 건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선고된 다음 개편까지라는 기간조차 지금은 보장되지 않았다. 만일 가 생존하더라도, 자신들이 그때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팀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첫 번째 타깃은 당연히 재희였다. 지금의 를 만든 사람이 바로 강재희였다. 그건 바꿔 말하면 강재희 없는 는 더 이상 지금의 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블랙박스 영상 너무 봤더니 눈 아파. 나 최변 인터뷰 따러 나갔다 올게. 좀 쉬면서 해.”
옆에 앉아 있던 민혜가 이미 충혈된 눈을 비비며 정언에게 작게 말했다. 정언은 차 키를 집어 드는 민혜의 손목을 잡았다.
“피곤한데 운전하지 말고 택시 타요. 교통비 청구하면 되니까.”
“안 그래도 예산 많이 쓴다고 말 나온다는데…….”
민혜가 풀이 죽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별 게 다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늘 세상만사 즐거운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송 작가님 택시비 줄 돈도 없으면 방송국 문 닫아야지. 누가 뭐라고 하면 나한테 일러요.”
정언이 억지로 차 키를 뺏어 서랍 안에 던져 넣자 민혜가 배시시 웃고는 알았어, 하며 가방을 집어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정언은 일회용 인공눈물 하나를 새로 따서 양쪽 눈에 넣고는 잠시 눈꺼풀 위를 눌렀다.
민혜가 블랙박스를 보내 준 제보자들에게 사건 당일뿐 아니라 전후 일주일 정도의 영상을 함께 보내 줄 수 있냐고 요청했고, 대부분의 제보자들은 거기 응했다. 경찰에서 현장 CCTV가 없다고 했기에 혹시나 다른 단서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봐야 할 영상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거였다. 며칠째 잘 보이지도 않는 야간 블랙박스 영상을 2배속이나 4배속, 때로는 8배속으로 돌리며 몇 번이나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뗐다 하다 보니 영상 재생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무슨 영상을 봤고 뭘 안 봤는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정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쭉 폈다. 온몸의 관절이 재조립되는 소리가 났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윤이 이쪽을 흘끔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 좀 있어?”
스트레칭도 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묻자, 윤이 움찔하더니 아뇨, 하고 대답했다. 본 파일과 안 본 파일 폴더를 따로 만들어 체크하기로 했는데, 얼핏 눈에 들어온 모니터에는 본 파일 폴더가 그새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정언은 등 뒤에서 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생긴 대로 놀면 신경이라도 안 쓰일 것 같은데, 무슨 일을 시키든 죽어라 성실하게 하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윤이 피곤한 듯 눈가를 누르며 다시 마우스를 움직였다.
“커피 한잔할래?”
그 말에 윤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언이 고개를 까딱하자 윤이 머뭇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과 함께 사무실을 나온 정언은 엘리베이터에서 옥상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카페는 로비에 있는데 싶었는지, 윤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잠깐 바람 좀 쐬게.”
묻지도 않은 말에 먼저 대답해 준 정언은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다. 아직 쌀쌀한 날씨라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언은 구석의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하나를 윤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