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44
44화.
10.
숙직실의 출력 낮은 드라이어는 짧은 단발을 말리는 데도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했다. 머리 중간부터는 아직 십 분은 더 말려야 할 것 같았으나, 정언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었다.
정언은 다시 한 번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고는 사무실로 돌아와 앉았다. 새벽 네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모니터에는 두 시간 전에 보던 CCTV 영상이 아직 띄워진 채였다. CCTV 영상만 붙들고 있는 것이 며칠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숙직실 갔다 오셨어요? 더 주무시지.”
곁에서 윤이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란 정언은 윤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잠깐만 눈을 붙여야겠다 생각하며 내려가기 전, 윤이 편집실 소파에 정신을 잃다시피 쓰러져 잠든 걸 보았던 것이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싶어 좀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담요를 덮어 주고 갔는데, 그새 또 일어나서 일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김 피디나 더 자지 왜 일어났어?”
윤이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지혁이가 퇴근한대서 깼어요.”
“피곤하면 눈 좀 더 붙여.”
“괜찮아요.”
파티션 너머로 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자, 윤의 의자 옆 쓰레기통 안이 가지각색의 커피믹스 봉투로 채워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예 커피로 혈관을 채우다시피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라고 딱히 상황이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에서는 이런 꼴 당할 일 없었겠지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언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 마우스를 움직여 영상을 재생시켰다.
현장의 CCTV 영상에는 철우의 말대로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자재를 실은 대형 화물차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고, 작업이 끝나는 야간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매일 거의 똑같은 영상이라, 자주 드나드는 차들은 아예 번호까지 외워질 정도였다.
8배속으로 재생되던 영상이 끝나자 정언은 다음 파일을 찾아 틀었다. 현장 사무실 방향의 CCTV였다. 게이트부터 현장 사무실이 있는 가건물과 앞 주차장이 촬영되는 각도였다. 턱을 받치고 거의 기계적으로 영상 몇 개를 연속으로 돌려 보던 정언은 문득 손을 멈췄다.
배속을 낮춘 정언은 다시 한 번 방금 본 장면을 되돌려 일시정지를 하고는 모니터로 눈을 가까이 가져갔다. 정언의 눈에 띈 것은 검은색 경승합차였다.
정언은 화면을 확대해 희미하게 나온 번호판의 숫자를 적었다. 79조 59……. 뒷자리는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정언은 방금 보던 파일을 그대로 두고 다른 파일을 계속 켜서 돌리며 같은 차량을 찾기 시작했다.
열댓 개의 파일을 확인하는 사이, 그 차가 거의 매일 비슷한 시간에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눈가를 찌푸리며 정지된 화면을 뚫어지게 보던 정언은 윤에게 물었다.
“김 피디, 혹시 블랙박스 본 것 중에 게이트 쪽이나 사무실 주차장 쪽 찍힌 파일 있었는지 기억나?”
윤이 자세를 고쳐 앉더니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있었던 것 같은데요. 안쪽은 아니고, 게이트 들어가는 방향에 주차됐던 차 블랙박스 있었어요.”
“그거 뭐였는지 좀 찾아봐.”
“왜요? 뭐 있어요?”
윤이 이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정언은 모니터 위에 떠 있는 블랙박스 화면 위의 검은색 승합차에 마우스로 원을 그렸다.
“이 차가 거의 매일 드나드는데 이상하네.”
“출근 차량 아니에요? 아니면 본사 쪽 차량이거나.”
“아니야. 출근 시간 지나서 들어오는 차야.”
정언의 말에 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자를 끌어당겨 좀 더 가까이서 모니터를 보았다.
“그러면 출근 차량은 아니겠네요. 서온건설 로고도 없는데, 뭐죠?”
“그러니까. 그리고 보통 이런 소형은 검은색 잘 안 뽑잖아. 블랙박스 영상 다시 확인해 봐. 번호판 더 선명하게 찍힌 거 있는지. 안 보이는 쪽에 로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윤이 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몇 번 마우스를 딸깍이더니 정언을 불렀다.
“선배, 이거예요.”
정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의 등 뒤에서 영상을 보았다. 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보낸 영상이었다. 어차피 아직 차량 통행이 없어 단속도 없는 지역이라, 그냥 게이트 부근 도로에 주차해 둔 차에서 찍힌 것이었다.
“이거 한 열 시쯤으로 돌려 볼래?”
윤이 아래의 재생 바를 마우스로 끌어 영상을 앞으로 돌렸다. 배속을 올려 영상을 재생시키던 윤이 영상을 멈췄다. 게이트로 들어가는 검은색 승합차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정언은 윤의 파티션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 재빨리 차번호를 메모했다. 그사이 화면을 유심히 보던 윤이 어, 하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뒤쪽 창에 뭐라고 붙여 놓은 거 같지 않아요?”
“무슨 글자야?”
정언은 몸을 앞으로 조금 더 숙였다. 피곤한 탓에 평소보다 눈이 침침해 잘 보이지 않았다. 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휠을 돌려 화면을 최대치까지 확대한 윤이 모니터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읽었다.
“경일…… 경일용역? 경일용역이라고 쓴 거 같은데요.”
경일용역. 낯선 이름이었다. 정언은 그 이름을 입 안으로 다시 한 번 되뇌어 보고는 방금 메모한 번호 아래 경일용역이라는 이름을 덧붙여 적었다. 윤이 비디오 플레이어를 끄고는 바로 인터넷 창을 켜 구글에 ‘경일용역’이라고 검색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의정부 쪽에 경일용역이라는 회사가 있긴 해요.”
지도의 의정부 위에 빨간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 아래는 간단한 소개글이 적혀 있었다. 경일용역, 리뷰 없음, 인력 용역 업체, 031-833-XXXX.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정언은 잠시 그 글자들을 뚫어지게 보았다. 윤이 물었다.
“인력업체면 일용직 조달하는 업체 아닐까요?”
“그런 업체면 더 큰 차 쓸 거야. 이거 7인승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러면 성인 남자들은 일곱 명 꽉 채워서 못 타. 그리고 그런 거면 새벽에 들어오겠지. 어떤 공사판에서 이 시간에 인부들을 보내?”
말하는 동안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정언은 화면을 응시했다. 왜 유독 이 차가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경험상 이런 직감은 대개 맞기 마련이었다. 경일용역, 경일용역, 하고 입 안으로 중얼거리던 정언은 미간을 문질렀다.
“박규형 씨 사망한 날도 이 차 들어와 있었어. 그날만 그런 게 아니라 거의 매일. 이 차 정체가 뭐지?”
“어, 잠깐만요.”
윤이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자기 컴퓨터의 폴더를 열었다. 원본 영상 소스를 저장하는 폴더를 뒤지던 윤이 파일 하나를 찾아 틀었다. 진송신도시에 갔던 날, 공사장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딴 스케치 영상이었다. 1분도 채 되지 않을 듯한 영상을 재생한 윤이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영상을 돌려 정언에게 모니터를 가리켰다.
“주차장에 있는 거 그 차 아니에요?”
윤이 영상을 크게 확대했다. 주차장에 서 있는 검은색 승합차가 눈에 확 들어왔다. 경일용역. 고딕체로 또렷하게 붙은 이름이 선명했다.
정언은 사무실에서 나가던 길에 몇 대의 중형차 옆에 서 있던 검은색 승합차를 그제야 떠올렸다. 분명히 그때 본 기억이 있었다.
“맞아. 그러면 우리가 간 날도 이 차가 있었던 거네. 기억력 좋다, 김 피디.”
칭찬하는 말에 대답 대신 윤이 씩 웃었다. 그때 정언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 이 새벽에 안 자고 메시지를 보내는 정신 나간 사람이 누군지 보지 않아도 대강 짐작이 갔다.
“송 작가님 아직도 안 자나 보네.”
중얼거린 정언은 책상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혜가 보낸 메시지가 연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 통화녹음 파일 속성 보고 날짜 확인해서 다이어리하고 맞춰 봤는데 출장 적힌 날짜랑 일치
― 출장 다닌 지역은 주로 서울 강남, 한교신도시, 을정신도시, 애포신도시. 각 지역마다 특산물은 정해져 있었어
― 서울은 흑산도 미역, 한교는 예산 사과, 을정은 영주 인삼, 애포는 성주 참외
― 아무래도 뇌물 느낌. 박스 수는 매번 달라지는데 액수하고 관련 있는 듯. 서울, 한교, 을정, 애포에 뭐가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
― 메모리카드 파일은 업체 수소문 중
― 아 참, 이희경 씨한테 팩스로 통화 목록 받았는데 찍어서 보냄
마지막 메시지는 폰 카메라로 찍은 통화 목록이었다. 이미 시간대를 다 대조했는지, 몇몇 번호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마를 짚은 정언은 민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민혜가 작은 목소리로 대뜸 정언에게 야단을 쳤다.
『왜 잠도 안 자고 전화질이야!』
속삭이는 목소리로 야단치는 걸 듣자니 좀 새로웠다. 남편이나 애가 깰까 봐 그런 모양이었다. 정언은 한숨을 뱉으며 대꾸했다.
“사돈 남 말 하지 마요. 유부녀가 이 시간에 잠을 안 자고 일하면 어떡해? 그리고 안 잘 거 알고 카톡 보낸 거 아니에요?”
『깨면 보라고 보낸 거지! 정언, 그러다 진짜 죽어 너. 설마 김 피디도 퇴근 안 했니? 둘이 잠도 안 자?』
자신의 잔소리를 듣는 재희의 기분도 이럴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정언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잠이 문제가 아니고…… 아니다, 이거 출근하면 얘기해요. 작가님, 제발 잠 좀 자요. 나 그러다 진짜 작가님 남편이 애 업고 여기 쫓아올까 봐 무서워 죽겠으니까.”
『왜, 왜. 뭐 있어? 뭐 찾았어?』
“출근하면 얘기해 줄게요. 메시지 보낸 건 확인했어요. 얼른 자요, 제발.”
『나도 졸려 죽겠어. 아 참, 최변한테 얘기 들은 거 있는데…… 어머, 애 운다.』
애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전화 너머로 넘어왔다. 이따가 봐, 하고 황급히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워킹맘의 비애로군, 속으로 생각한 정언이 자리에 풀썩 앉으며 고개를 젖히자 윤이 물었다.
“송 작가님이에요?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