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46
46화.
윤은 퍼뜩 눈을 떴다. 하얀 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잠시 멍하니 있던 윤은 다음 순간 튕겨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텅 빈 숙직실 안에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윤은 황급히 몸을 더듬었다. 점퍼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다행히 막 아침 여덟 시가 넘은 뒤였다. 새벽에 정언과 함께 편의점에 갔던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다음의 기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필름이 끊긴 것 같았다.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이럴 일인가 싶어 기가 찼다.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른 윤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무실에서 입은 착장 그대로 단추 하나도 안 풀린 걸 보니, 정말 숙직실에 들어오자마자 거의 정신을 잃듯 잠든 모양이었다. 거의 반쯤 자면서 걸어온 듯했다.
서둘러 샤워실로 튀어 간 윤은 머리를 감다 말고 거울을 보았다. 설마 잠에 취해 정언에게 또 뭔가 민폐를 끼친 게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으윽, 하고 감던 머리를 쥐어뜯은 순간 엉뚱하게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기억이었다. 지금은 선배가 저 좀 귀여워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 떠오르자마자 윤은 거울에 머리를 박았다.
이런 헛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민폐를 끼친 쪽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헛소리 쪽이 그나마 나은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정언의 태도가 확실히 처음보다 부드러워졌다고 느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본심이 튀어나온 건 스스로 생각해도 좀 부끄럽기는 했다. 그때 정언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이라도 난다면 다행일 텐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창피해서 죄 없는 거울만 팡팡 친 윤은 서둘러 씻고 샤워실을 나섰다. 대강 옷을 주워 입은 뒤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 말리고 나온 윤은 세면대를 지나치려다 걸음을 멈췄다.
세면대 앞에서 이를 닦는 얼굴이 낯익어서였다. 재희였다. 입에 칫솔을 물고 있던 재희가 거울에 비친 윤을 알아보고는 한쪽 손을 흔들었다. 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었다.
“지금 출근하신 거예요?”
재희가 입 안에 가득 찬 치약 거품을 뱉고는 입 안을 헹구더니 윤에게 물었다.
“새벽에도 취했었나?”
“네?”
“숙직실에서 나 보고 인사했잖아. 자는데 새벽에 들어와서 쓰러지길래 깜짝 놀랐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윤은 다음 순간 속으로 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내적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 숙직실에 재희가 있었다는 건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졸려서 눈에 뵈는 게 전혀 없었던 듯했다. 그 와중에 인사는 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저, 취한 건 아니었고요. 정말입니다.”
윤이 아주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뒷걸음질을 치자, 재희가 세면대 옆에 벗어 놓았던 안경을 쓰고는 윤을 돌아보았다.
“아, 그래? 서 피디가 숙직실에 던져놓고 가길래 취한 줄 알았지.”
“선배가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며 되묻자 재희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정말 머릿속이 새하얘진 윤은 그 자리에 선 채 새벽의 기억을 천천히 복기했다. 편의점을 나와서, 벤치에 앉아 커피를 조금 마셨고…… 그리고 아마 그대로 깜빡 잠들었던 게 분명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반쯤 잠든 상태였는데도 정언이 커피를 사러 간다기에 따라갔던 것이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윤의 머릿속에서 어딘가에 기대 잠들었던 기억이 퍼뜩 스쳤다.
정언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그게 현실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그때 거기서 기대 잠들었을 사람은 정언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안경 너머로 유심히 윤의 얼굴을 관찰하던 재희가 쿡쿡거렸다.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 쉽지 않지? 서 피디 밑에서 일하는 건 더 그럴 텐데. 다른 팀이 사정이 많이 나은 건 아니긴 한데, 서 피디가 워낙 일 욕심이 많으니까.”
어쩐지 작은 가시에 무심코 찔린 듯한 감각이 지났다. 불편하다, 고 해야 할까. 그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던 찰나, 윤은 그 까닭을 곧 알아차렸다. 정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재희의 말투가 너무 익숙해서였다.
재희가 아주 오래 전부터 정언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건 윤에게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재희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김 피디가 잘 따라가 줘서 다행이네. 먼저 올라가 봐.”
다시 한 번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인 윤은 도망치다시피 복도로 나와서는 빨개진 귀를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서둘러 사무실로 올라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정언이 어떻게 알았는지 고개도 들지 않고 어, 왔어? 하고 물었다. 옆자리에 앉은 윤은 컴퓨터 전원을 켜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정언이 여느 때와 같은 말투로 대꾸했다.
“두 시간도 안 잔 것 같은데 괜찮아?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좀 쉬다 오든지 해.”
“선배는…….”
“나도 별일 없으면 저녁에 퇴근할 거야.”
윤은 짧은 대화 내내 정언이 보던 서류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시 또 민폐를 끼친 건가 싶어 조금 초조해졌다. 사과를 해야 하나 싶어 선배, 하고 막 불렀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민혜가 안으로 들어섰다. 푸석한 얼굴에 머리를 질끈 동여맨 민혜가 정언의 옆자리에 풀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환장한다, 정말. 애가 밤새 울어서 한숨도 못 잤어. 도저히 못 참겠어서 오늘 남편 연차라 나 비상이라 일찍 출근한다고 애 맡겨 놓고 나왔잖아.”
“남편분이 우리 프로 언제 폐지하나 목 빼고 기다리는 심정을 알겠네요.”
인사도 없이 하소연부터 시작하는 민혜의 말에 정언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민혜가 흑흑 우는 시늉을 했다.
“나 진짜 집에서 애 보는 것보다 출근하는 게 나은 것 같아. 우리 일 좀 하자. 남편한테 덜 찔리려면 지금부터 바로 일해야 될 거 같아. 때마침 김 피디도 있고…… 있고? 왜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윤을 보며 말하던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 피디도 퇴근 안 했구나?”
“네, 뭐.”
멋쩍게 웃자 정언이 흘끔 윤 쪽을 보더니 회의실로 들어가자고 손짓을 했다. 뭐가 잔뜩 들었는지 빵빵해진 가방을 안은 민혜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온 윤은 문을 닫았다.
민혜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얼추 수십 장도 넘어 보이는 프린트 물을 꺼내 쌓아 놓으며 입을 열었다.
“최변 만났는데 박규형 씨 잘 알더라고. 원주민들 데모 때마다 사측 대리인으로 나왔었대. 그런데 정작 사측하고 보상 얘기 나올 때는 자주 안 왔고. 최변은 그게 박규형 씨가 원주민들한테 좀 호의적인 입장이라, 사측에서 방해가 됐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하더라고. 그래도 자기네들 쪽이 박규형 씨하고는 말이 좀 통하는 거 같으니까 현장에는 내보내고.”
“기제국 오태훈 피디 얘기하고 일치하네요.”
정언의 말에 민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오 피디님 만난 적 있다고 그러더라. 촬영 협조차 만났었고 그때 박규형 씨 섭외해 준 게 최변이래.”
“아, 또 거기서 그렇게 연결되는 거예요?”
“세상 좁지? 아무튼 자기도 박규형 씨 소식 듣고 너무 놀랐대. 도저히 믿지를 못하겠다면서, 진짜 자살한 거 맞냐고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여기서 내가 또 아주 이상한 얘기 하나를 들었잖아?”
정언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민혜를 보았다.
“뭐길래?”
“최변이 박규형 씨 죽기 사흘 전에 만났었대. 그날은 원래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다고 저녁에 보자고 했다는 거야.”
“어, 잠깐만. 우리 처음에 들었던 그 강남 출장 건, 그게 언제지?”
갑자기 생각난 듯 정언이 묻자 민혜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그렇지. 그게 그날이었어. 상대방이 박규형 씨가 원주민들하고 약속 잡혀 있다니까 출장 가라고 했잖아. 그날 저녁에 돌아와서 최변을 만난 거지.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했대. 자기가 애를 써 봤지만 원칙적으로 추가 보상도 불가능하고, 처음부터 보상 금액 재책정하는 것도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셔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최 변호사님이 이해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최변이 힘든 싸움인 건 당연히 안다고 했더니, 박규형 씨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러더라는 거야. 판을 아예 엎어 버리면 무슨 방법이 생길 수도 있다고.”
“판을 엎어요?”
민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민혜가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대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얘기냐 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변호사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랬다는 거 아냐. 무슨 결심을 한 사람 같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박규형 씨 부고 받고 자기는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대. 며칠 전에 만난 사람이 갑자기 자살을 했다니까 얼마나 놀랐겠어.”
정언이 손끝으로 미간을 누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거 진짜 이상하네. 판을 어떻게 엎으려고 한 거지? 자기가 무슨 수로?”
“메모리카드!”
다음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즉각 입으로 튀어나왔다. 소리가 너무 컸는지 두 사람이 동시에 윤을 보았다. 흥분한 탓에 말이 빨라졌다.
“메모리카드에 있던 자료를 터트리려고 한 거라면 말이 되죠. 문서 파일 내용은 아직 모르지만 그게 녹취 파일하고 관련 있는 거라고 치고, 그걸 터트려서 서온건설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면 원주민 측도 여론전에 훨씬 유리해지잖아요. 그렇게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본 거 아닐까요?”
“어, 어어! 그러네, 그럴 수 있겠네.”
민혜가 놀란 눈으로 맞장구를 쳤다. 정언도 수긍하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러면 왜 메모리카드를 그런 데다 숨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