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윤은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대답했다.
“통화 녹취 생각하면 사측에서 박규형 씨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걸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지 않아요? 그 자료가 상당히 중요한 자료였고, 그래서 제거하려고 했고. 박규형 씨도 그걸 알고 급하게 메모리카드를 숨겼다고 생각하면?”
“말은 되네. 만약에 미리 그 사실을 알았으면 회사에서 사용하는 물품에 메모리카드를 숨기는 위험한 짓은 안 했을 거 아냐. 집에 가져다 두거나 어디 맡기는 쪽이 안전했겠지. 소설 한 편 써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은 화이트보드 위에 박규형, 서온건설, 메모리카드 따위의 낱말을 쭉 적어 나갔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건 전부 소설이야. 박규형 씨는 사측의 사주를 받고 특정 지역에 특정 물품, 뭐 뇌물이겠지. 하여튼 그런 걸 전달하는 출장을 다녔어. 사측에서는 승진을 미끼로 박규형 씨를 이용했고, 이게 외부에 알려지면 서온건설하고 뇌물 받은 사람들한테 타격이 있겠지. 만약에 그 출장이 전혀 문제없는 거라면 굳이 녹취 파일하고 문서 파일을 따로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규형의 이름 위에 동그라미를 친 정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규형 씨가 이 일에 회의감을 느끼게 됐어. 그래서 그만 해야겠다 결심을 하고, 이걸 어딘가에 제보할 마음을 먹은 거지. 그러면 자기도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랫동안 봐 온 원주민들을 도와줄 방법도 생기니까.”
“하지만 사측에서 박규형 씨가 배신할 거라고 눈치를 채 버렸다?”
민혜가 끼어들었고,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러니까 박규형 씨가 메모리카드를 상자 뚜껑에 숨긴 건 아마 죽기 직전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는 거지. 박규형 씨는 최유림 변호사에게 그 얘기를 하고 출장을 갔어. 그리고 취한 상태로, 여태까지 일을 지시하던 사람에게 더 이상 못하겠다고 전화를 했어요. 상대방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 박규형 씨를 막으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사망한 거다?”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정황은 많은데 그 반대 얘기는 없잖아요. 회사 일 때문에 힘들어했다는데 정작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그러면 무슨 일 때문에 힘들었을까? 자살이 아닌데 왜 그 고층 건물에서 떨어졌을까? 왜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거기 올라갔을까?”
정언의 말에 민혜가 자기 어깨를 양팔로 감싸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어머, 생각하니까 너무 무섭다. 그렇지. 그 밤에 거길 혼자 올라갈 이유가 없지.”
“누가 거기 올라가게 만든 거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면? 그냥 협박을 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추락해 버린 거면?”
“그래서 사측에서 부랴부랴 과로사로 보상 제의를 하고 이 일을 덮으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는 딱딱 맞긴 한다.”
민혜가 심각해진 얼굴로 무언가를 한참 생각했다. 윤은 화이트보드 위에 적힌 낱말들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자 희경의 창백한 얼굴과 아무것도 모르는 두 아이가 떠올랐다. 차마 규형의 이름을 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윤은 입술 끝을 잘근거렸다. 팔짱을 끼고 회의실 안을 천천히 오가던 정언이 걸음을 멈췄다.
“통화한 전화번호 신원 확인해 봤어요?”
민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화 걸어 봤는데 없는 번호래. 대포폰 아닌가 싶어. 내가 이희경 씨한테 혹시 이 번호 남편 핸드폰에 저장돼 있는지 확인 좀 부탁한다고 새벽에 메시지 남겨 놨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정 안 되면 경찰 협조 얻어서 신원조회라도 해 봐야지. 허 경감님 신세 한 번 더 지든지.”
“아, 신원조회 하니까 생각났는데 우리가 새벽에 이상한 걸 하나 찾았거든요.”
민혜의 말에 정언이 갑자기 생각난 듯 가까이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뭔데?”
“우리가 눈알 빠지게 CCTV랑 블랙박스 영상 돌려 봤는데, 차 한 대를 발견했어요. 검은색 경승합차인데, 경일용역이라고 돼 있어. 현장 갔을 때 스케치한 영상에도 찍혀 있더라고.”
“경승합차? 작은 봉고차 그런 거?”
“네. 한 7인승 되는 거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이상한 게 항상 출근 시간이 지나서 사무실 주차장으로 들어와요. 서치해 보니까 인력 용역 회사라는데, 그런 데서 그 시간에 차 보낼 일이 뭐가 있어. 새벽같이 오면 왔지.”
“아, 걘 또 뭐니 정말.”
민혜가 정말 지친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정언이 언제 뽑아 놓은 건지 동영상 캡처 화면을 출력한 종이 몇 장을 민혜에게 내밀었다. CCTV와 블랙박스, 스케치 화면에 찍힌 차를 찍어 놓은 것이었다. 민혜가 그것을 받아들어 눈으로 훑어보더니 미간을 구겼다.
정언이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현장에 들어가자마자 대번에 뛰어와서 외부인 들어오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 출입 통제하는 현장에 드나드는 거면 이건 외부 차량 아니라는 소리잖아요.”
“그러네. 구글에 인력 용역 회사라고 등록돼 있으면 인력소개소 그런 거일 텐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민혜가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회의실 문을 열어 몸을 내밀고 사무실을 살폈다. 때마침 사무실로 막 들어서던 예준을 본 민혜가 이리 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예준이 영문도 모르고 가까이 다가왔다.
“왜?”
“주 피디, 여기 전화 한 통만 해 줄래? 정언, 거기 전화번호 좀 적어서 줘 봐.”
정언이 재빨리 종이 한쪽을 찢어서는 경일용역 번호를 적어 민혜에게 건넸다. 민혜는 그 쪽지를 예준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바로 전화해서 경일용역 맞냐, 혹시 사람 구하냐 물어보고 구한다고 하면 집이 근처라 그러는데 진송신도시 현장에 자리 없냐 한 번만 물어봐 줘.”
“내가?”
예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회의실 안을 들여다보더니 윤을 가리켰다.
“김윤 시키면 되잖아요. 남자가 해야 되는 거면 굳이 내가 할 필요 없잖아.”
“너무 젊은 남자 티 나면 안 돼.”
그 말을 들은 예준이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거 무슨 뜻이지? 나도 젊은데? 내가 지금 약간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건가?”
“잡소리 할 시간 없거든. 만약에 안 받으면 삼십 분쯤 있다가 한 번만 더 해 봐.”
“알았어요, 알았어.”
예준이 손을 휘적거렸다. 민혜가 회의실 문을 닫자 정언이 물었다.
“전화는 왜요? 진짜 회사인가 보려고?”
“응. 용역 회사라고 간판만 달아 놓고 뭐하는지 모르는 데 많으니까. 사람 구한다, 현장에 자리 있다 하면 진짜 인력소개소겠지. 그런 데는 보통 아침 일찍부터 여니까 이 시간이면 전화 분명히 받을 거고.”
민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고개만 들이민 예준이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경일용역 전화번호는 맞는데, 자기들은 그런 일 안 한대요. 바로 끊어 버리는데?”
“그래? 오케이, 고마워.”
문 닫으라는 손짓을 한 민혜가 흐흠,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윤은 닫힌 문 쪽을 한 번 슬쩍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뭐죠, 진짜?”
“그러게. 엄청 수상하네. 나 또 이런 거 궁금해서 못 참는데.”
정언이 턱을 괴고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잠시 생각하던 윤이 제안했다.
“우리가 직접 가 보면 안 돼요? 아예 가서 서온건설하고 무슨 관련 있는지 확인하면 되잖아요.”
“아니, 그럴 수도 있긴 한데…….”
답지 않게 말끝을 약간 흐린 정언이 윤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그러나 싶어 눈을 깜빡이자, 정언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회사는 보통 조폭 끼고 있는 경우 많은 거 알아?”
이건 또 미처 생각 못 한 얘기였다. 윤은 여기 온 뒤로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빈약한 상상력으로 살아왔는지 매 순간 깨닫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무서운 일이 많다는 걸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던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언이 윤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손을 저었다.
“됐어. 송 작가님이랑 사무실에 있어. 안 그래도 할 일 많으니까 나 혼자 갔다 올게.”
“네?”
귀를 의심한 윤은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정언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혼자 갔다 올 테니까 사무실에서 작가님이랑 자료 좀 보고 있으라고.”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윤이 정색하며 반문하자 곁에 앉아 있던 민혜가 토끼 눈을 뜨며 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민혜가 이상하게 보든 말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방금 전에 조폭 끼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 그런 데를 혼자 가겠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싶었다.
이런 반응은 상상 못 했는지, 정언이 보기 드물게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내가 지금 뭐 이상한 말 했어?”
“요즘 세상에 어떻게 혼자 그런 데 갈 생각을 하실 수 있어요? 찍으면서 그러시는 거 안전 불감증이에요.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요. 그거 모르세요?”
답지 않게 강한 태도에 정언이 이게 미쳤나, 하고 써 붙인 얼굴로 민혜를 돌아보았다. 얘 좀 어떻게 해 보라고 도움을 청하는 게 분명했으나, 민혜는 웃음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윤의 편을 들었다.
“그치, 요즘 세상이 험하긴 하지.”
그 말을 들은 정언이 배신당한 사람의 표정을 했다. 윤은 정언이 뭐라고 더 운을 떼기 전 쐐기를 박았다.
“가실 거면 저랑 가세요. 아니면 아예 가지 마시고요.”
잠시 침묵하던 정언이 곧 포기한 듯 그래 가자 가, 하고 내뱉었다. 말을 길게 섞어 봐야 아무래도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카메라 가방을 꺼내 윤에게 건넨 정언은 백팩을 메며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윤은 황급히 자신의 차 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운전 제가 할게요.”
“시끄럽고, 빨리 따라와.”
정언은 칼같이 윤의 말을 끊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서둘러 가방을 고쳐 멘 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정언이 앞을 보고 팔짱을 낀 채 한마디도 없이 계속해서 바뀌는 층수 버튼을 쳐다보는 뒷모습에 눈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