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48
48화.
괜히 주제넘게 정색했나 싶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정언이 아무리 독종으로 소문났다고 해도, 여자 혼자 그런 데 취재를 다닌다는 건 윤의 상식선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정언이 그렇게 당연하게 혼자 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 늘 그래 왔다는 뜻일 게 뻔했다. 선배들이 봐주는 거 하나 없이 자신을 강하게 키웠다던 정언의 말이 뇌리를 지났다. 그러자 얼굴도 모르는 정언의 선배들에게 화가 났다. 공연히 재희까지 원망스러워졌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 천운이라는 걸 다들 알기나 할까 싶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정언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빈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조수석에 앉은 윤은 그런 정언의 옆얼굴을 흘끔거렸다. 내비게이션에 경일용역 주소를 찍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내내, 정언은 무슨 생각인지 말이 없었다.
문득 나도 처음엔 그랬어, 하던 정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정언에게도 모든 게 처음이었던 시절이 있었을 테고, 처음부터 이렇게 모든 일이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 시절의 정언을 상상하자 어쩐지 속이 서늘해졌다. 자신이었다면 절대 정언에게 그렇게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윤 쪽으로 손을 뻗어 조수석 앞의 글러브 박스를 연 정언이 선글라스를 꺼내 끼고는 입을 열었다.
“김 피디.”
“네?”
“다음부터는 남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쪽팔려 죽겠으니까.”
무덤덤한 말투였으나 정언이 어쩐지 조금 창피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뜻밖이었다. 윤이 잠깐 침묵하는 사이, 정언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농담 아냐.”
“그럼 둘만 있을 땐 해도 되고요?”
윤은 앞을 보며 물었다. 누가 들어도 농담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말투였다. 운전을 하던 정언이 그 말에 멈칫하며 이쪽을 보았다. 선글라스에 눈이 가려져 표정은 명확하지 않았다.
정언이 핏기 없는 입술에 물린 필터를 이 끝으로 잘근거렸다. 아마 무의식적인 행동인 듯했다. 윤은 그 선글라스 너머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어두운 렌즈 뒤의 눈동자에 얼핏 어린 당혹감을 눈치채는 건 쉬웠다.
“전 선배가 위험한 데 혼자 가시는 거 싫어요.”
윤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언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대꾸했다.
“김 피디한테 그게 싫을 이유가 뭔데.”
다른 이유는 없었다. 정언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게 싫었다. 윤은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정언에게 질문을 되돌렸다.
“제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아슬아슬한 말이라고 생각한 건 직후였다. 끊어지기 직전까지 잡아당긴 가는 실처럼 차 안의 공기가 퍼뜩 긴장했다.
함부로 선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정언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더 그랬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가시처럼 불현듯 튀어나오는 감정들을 모두 매끈하게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정언이 대답했다.
“말장난할 시간 있으면 눈이나 좀 붙여.”
낮은 한숨이 섞인 말투였다. 정언이 이런 상황을 낯설어한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정언을 더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윤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혼자인 게 익숙한 정언의 시간들.
거기 자신이 끼어든다면 어떨까.
떠올린 상상에 문득 심장이 빨라졌다. 미처 눈에 맺히기도 전에 흘러가는 창밖의 풍경보다 더.
11.
구시가지 끄트머리의 낡은 빌딩은 지은 지 족히 삼십 년은 되어 보였다. 빌딩이라고 불러 주는 것만도 몸 둘 바 모르게 호사스러운 느낌이었다. 정언은 고개를 젖혀 미적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다닥다닥 붙은 간판들을 올려다보았다.
‘성경 다시 알기 운동본부’, ‘사단법인 마음수양원’ 따위의 보기만 해도 수상한 간판부터 ‘태양다방’, ‘라사양장점’처럼 시대를 의심하게 만드는 간판, ‘우리여행사’ 같은 소규모 사무실과 간판도 없이 ‘일수’, ‘떼인 돈 받아드림’이라고만 써놓고 시트지로 전체를 발라 버린 창 따위가 그 낡은 빌딩에서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끝내주네, 하고 중얼거린 정언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산한 도로 위로 띄엄띄엄 차들이 지나갔다. 주차할 자리도 마땅치 않아 근처의 폐업한 가게 앞에 대충 차를 대 놓고 왔는데, 딱지나 안 붙을지 걱정이었다.
“여기 3층 맞아?”
곁에 선 윤에게 묻자 윤이 로드뷰로 경일용역을 다시 한 번 검색해 보고는 맞긴 맞는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정언은 다시 한 번 건물 외관을 훑어보았다. 간판도 없었고 다른 표시도 없었다.
“없어진 거 아닐까요?”
“전화는 받았다잖아. 올라가 보지 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정언은 다음 순간 멈칫했다. 윤이 정언을 자기 뒤로 끌어당기며 먼저 입구로 들어선 까닭이었다. 겁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자기가 남자라는 건가 생각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아까 사무실에서도, 차 안에서도, 그리고 여기서도 윤이 마치 자신의 보호자처럼 구는 것이 낯설었다. 물론 정언 역시 애초에 윤이 모두에게 친절한 타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며칠 사이 윤의 태도는 친절함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모호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눈만 마주쳐도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요즘은 도리어 윤 쪽에서 수시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가끔 윤과 있을 때면 얘가 또 갑자기 무슨 말을 할까 조마조마해질 정도였다.
정언은 애써 그 생각을 떨어 버리며 계단을 앞서 올라가는 윤의 뒷모습을 보았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답답한 층고는 키가 큰 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낮아 보였다.
검은색 블루종 아래의 넓은 어깨와 등, 생지 데님으로 감싸인 긴 다리가 새삼 낯설게 눈에 박혔다. 앞에서 봐도 멀쩡한 자식이 뒤에서 봐도 괜찮을 건 또 뭐야.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어쩐지 민망해져 시선을 내렸다.
“선배, 저기 보세요.”
3층에서 걸음을 멈춘 윤이 정언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윤이 가리킨 곳은 복도 끝이었다. 기역 자로 꺾이는 모퉁이에 손으로 대충 ‘경일용역→’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복도에는 소형 여행사,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무실, 몇십 년쯤은 된 듯한 세탁소가 일렬로 늘어선 채였다. 그 앞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자 역시나 간판은커녕 문패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문이 나타났다. 낡은 나무문은 눈높이에 조그만 창이 하나 나 있었으나, 검은 시트지로 발려 있어 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것 같은데요.”
윤이 작게 말하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가볍게 노크를 했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나, 하고 혼잣말을 한 윤은 다시 한 번 아까보다 세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언은 팔짱을 끼며 닫힌 문을 보았다.
“용역회사가 주말도 아니고 이 시간에 문을 닫을 일이 뭐가 있지?”
“그러게요.”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모퉁이 너머로 이쪽을 기웃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이 혹시 여기, 하고 물으려는 찰나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가로챘다.
“아니, 거기는 뭐하려고 두들겨요?”
정언과 윤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언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여기 사장님 지금 안 계세요?”
“그 뭐 잠깐 나간 거라 금방 오기는 할 건데…… 젊은 사람들이 여긴 왜 왔어요?”
별 수상한 것들 다 보겠다는 얼굴이었다. 정언은 주머니에서 재빨리 명함을 한 장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명함을 받아 들고는 낡은 폴로셔츠 앞섶에 꽂아 둔 돋보기안경을 썼다. 명함을 멀찍이 떨어뜨려 글자를 읽어 본 남자가 면도가 덜 된 듯한 턱을 문질렀다.
“방송국에서 나왔어요? 뭐하려고?”
“여기 사장님 좀 뵙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금방 나오신다고요?”
“예, 뭐…….”
남자가 말을 얼버무렸다. 정언은 그의 행색을 슬쩍 살폈다.
“여기서 일하세요?”
“아니, 나는 이 옆 세탁소 하는 사람이고. 아침부터 누가 와서 여기 문을 두들기니까 이상해서 와 봤지.”
남자가 손을 뻗어 방금 지나온 세탁소 쪽을 가리켰다. ‘용이네 출장세탁’이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은 그 간판을 한 번 돌아보고는 물었다.
“왜요? 평소에 사람들이 자주 안 오나요? 인력회사 아니에요?”
“나는 무슨 회사인지는 잘 모르고, 좀 그, 깡패 같은 사람들만 엄청 들락거려. 세가 싸서 있긴 한데 우리 가게에 손님들이 옷 찾으러 올 때마다 무섭다고 해요. 그래서 잘 안 찾으러 오고, 내가 출장을 다니지.”
누가 들을까 싶은 듯 남자가 목소리를 죽여 속닥거렸다. 정언은 텅 빈 복도 쪽을 한 번 넘겨다보고는 물었다.
“깡패 같은 사람들이요?”
“그, 막 길거리 포장마차 같은 거 다 때려 부수는 애들 있잖아요. 조끼 입고. 그런 애들만 오간다니까. 그냥 인력회사 이런 거 아니에요.”
남자가 상상만 해도 무서운지 손을 휘휘 저었다. 용역 깡패. 머릿속을 번뜩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무튼 괜히 얼쩡대지 말고 어지간하면 그냥 가요. 저번에도 시끄러워서 내가 경찰도 부르고 그랬다니까. 그게 한두 번이 아니야.”
“네, 알겠습니다.”
웃으며 대답한 정언은 남자가 세탁소로 다시 들어가 문을 닫는 걸 본 뒤에 핸드폰을 꺼냈다. 바로 민혜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세 번쯤 가기 무섭게 민혜가 전화를 받았다.
“송 작가님, 서온건설에 용역 검색어 같이 넣고 뉴스 영상 있는 거 검색 다 돌려 봐요. 우리 DB 먼저 검색해 보고, 유튜브나 이런 데 올라온 것도 전부 다. 오래된 영상도 상관없으니까.”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민혜도 덩달아 속삭이듯 물었다.
『갑자기 왜? 경일용역 들어가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