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49
49화.
“아뇨. 지금 사람 없는데, 여기 주민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거 용역 깡패 쓰는 업체인 것 같아. 혹시 모르니까 빨리 검색 돌려 보고 뭐 나오면 바로 나한테 답 줘요.”
『아, 오케이. 알았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정언이 전화를 끊자, 그때까지 정언을 지켜보고 있던 윤이 복도로 난 작은 창을 열고는 바깥 도로를 내다보았다.
“조용한데요. 용역이 그 용역이었어요?”
“그런 것 같네. 뭐 수상한 차 없어? 우리가 본 봉고차 같은 거.”
정언이 묻는 말에 윤이 좀 더 목을 빼 도로 양쪽을 다 살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안 보여요. 근데 그런 용역이면 진짜 조폭 끼고 하는 거예요?”
“보통은.”
“이대로 안 오면 어떡하죠?”
“일단 기다려 봐야지.”
벽에 기댄 정언은 모퉁이 바깥쪽 복도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창가에서 몸을 뗀 윤이 한두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정언 곁의 벽에 등을 대고 섰다. 고요한 복도에는 가끔 아래층에서 나는 듯한 발소리와 바깥 도로에서 넘어오는 자동차 소리가 간간이 울렸다.
짧은 침묵이 어색했다.
― 제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차 안에서 윤이 던진 질문이 까닭 없이 떠올랐다. 왜냐고? 이유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혼자 취재 나가는 게 무슨 별일이라고 그렇게 정색을 하고 굳이 쫓아온 건지 도무지 모를 노릇이었다.
“안 무서워?”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해 툭 뱉은 말에 윤이 웃었다.
“저 애 아니에요.”
“애라야 무서운 거 알까 봐 물어봤겠어?”
“선배 지금 저 애 취급하시는 거잖아요.”
정언은 그 말에 내심 뜨끔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물아홉이니 알 거 다 알 테고, 키도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멀쩡한 성인 남자에게 무섭냐고 묻는 것 자체가 애 취급이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왜, 애 취급하는 거 같아서 싫어?”
놀리듯 묻자 윤이 대답했다.
“선배한테 그렇게 보이는 건 싫은데요.”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선배한테 그렇게 보이기 싫다니, 어쩐지 묘한 말이었다. 이상하게 이 분위기가 약간 불편해져, 정언은 벽에 대고 있던 등을 뗐다. 이걸 뭐라고 받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윤이 뜬금없이 말했다.
“제가 입사 선배였으면 선배한테 진짜 잘 해 줬을 거예요.”
정언은 눈썹을 약간 좁혔다.
“내가 못해 준다고 돌려서 하는 소리야, 그거?”
윤이 몸을 조금 숙이며 쿡쿡거렸다. 한동안 웃던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배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 예쁘잖아요.”
농담과 진담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건 건방진 농담일까, 혹은 얄팍한 진담일까. 농담이라기엔 선을 약간 넘은 것 같았고, 진담이라면 감정을 감추는 데 서툰 것 같았다. 어느 쪽도 윤에게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진담이라면 대체 그 속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언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지?”
“예쁘다는 말 싫어하시는 거 아니면요.”
“일 잘한다는 소리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
“일하실 때 아니라도 예쁘다고 하면요?”
윤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정언은 순간 진심으로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쳐다본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도저히 장난 같지가 않았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아까 물었던 담배가 마지막인지 안은 비어 있었다. 정언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매너가 너무 과하면 플러팅이야.”
“저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닌데요.”
“엄청 쉽잖아, 지금.”
“선배니까 쉬운 거죠.”
윤이 짐짓 정색했다.
선배니까.
쉬운 말이었다. 그러나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윤의 행동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선배니까. 물론 정언에게도 그런 감정이 낯선 건 아니었다.
새끼오리처럼 재희를 따라다니던 시절, 정언은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재희라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재희니까, 하고 생각할 때 그건 매력적인 남자와 좋은 선배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위치한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윤에게 자신 역시 그런 걸까.
생각이 거기 미치기 무섭게 정언은 헛웃음을 뱉었다. 갑자기 웃는 정언을 본 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왜요, 하고 물었다. 정언은 대답 대신 윤을 빤히 응시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윤 같은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취향이 엄청나게 독특하거나 세계가 멸망해서 지구에 여자가 서정언 혼자 남는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겨우 웃음을 멈췄다.
“아무것도 아냐.”
잠시라도 그런 의심을 했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하기야 거기에는 윤의 탓도 분명 있기는 했다. 윤이 왜 쓸데없이 친근하게 굴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꾸만 선을 넘으려고 드는 건지 정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열정의 절반, 아니 3분의 1만 써도 최소한 방송국 안에서 윤이 접근하지 못할 여자는 없어 보였다. 이미 시보국 여자들 사이에서도 윤은 유명 인사였다.
정언은 윤을 빤히 보다 물었다.
“김 피디, 여자 친구 없어?”
정언에게 남의 애인 유무가 궁금해지는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었다.
“너무 일찍 궁금해하시는 거 아니에요?”
윤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있어도 여기서처럼 일하면 벌써 헤어졌죠.”
“연애하는 데 시간 많이 쓰는 편이야?”
“한 번 빠지면 그냥 좀, 확 미치거든요. 다른 생각 못 해요.”
그 말을 하며 멋쩍게 웃는 얼굴은 소년 같은 구석이 있었다. 정언은 그 얼굴에 잠깐 눈을 붙들렸다.
“의외네.”
무심코 나온 말에 윤이 어, 하며 몸을 숙여 정언과 시선을 맞춰 왔다.
“왜 의외예요?”
얼굴값 할 것 같아서, 라고 생각했으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기는 좀 미안했다. 정언이 대답 대신 그의 눈을 마주 보자 이번에는 윤이 물어왔다.
“선배는 연애할 때 어떤 타입이신데요?”
잘못 걸렸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또 이런 식으로 윤이 경계 안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걸 느낀 탓이었다. 정언은 눈썹을 약간 좁혔다.
“노코멘트하고 싶은데.”
“기브 앤 테이크라는 게 있잖아요. 사람이 공평해야지.”
윤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무덤 판 게 이쪽이니 남 탓을 할 게 없었다. 사이를 둔 정언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난 똑같아. 연애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선배가 누구한테 빠져서 달라지는 거 상상 안 가긴 하는데, 상대방은 되게 외롭겠네요.”
윤의 말에 정언은 순간 누군가가 가느다란 바늘로 심장 한구석을 슬쩍 찔러 들어온 듯한 감각을 느꼈다. 몇 번인가 경험했던 짧은 연애의 끝은 대개 건조했다.
정언은 자신을 잃을 정도의 감정이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역이 확실하고 그 벽이 견고한 정언을 대부분의 상대들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윤이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완전히 미치면 그런 게 잘 안 보여요. 외로운 것도 좋다고 해야 되나. 그 사람이 좋으니까,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부분까지도 다 좋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년처럼 느껴지던 그 얼굴이 갑자기 어른스러워져, 무의식중에 놀란 정언은 시선을 내렸다. 윤이 발끝을 바닥으로 툭툭 차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흰색 스니커즈에 시선이 머물렀다. 성격은 늘 그렇게 사소한 데서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윤이 확실히 쉬운 남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은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바꿔 말하면 결국 그건 모두에게 일정한 선을 긋는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빠져 버릴 정도의 감정에 항상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점심 먹고 다시 와야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정언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말을 돌렸다. 윤 역시 자신의 시계를 내려다보고는 그럴까요, 하고 대답했다. 정언은 문자판 위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십 분만 더 기다려 보고.”
정언이 다시 벽으로 몸을 기댔을 때였다. 계단 아래쪽에서부터 누군가가 크게 통화를 하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통화 내용은 복도 전체에 온통 울려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가 거의 윽박지르듯 고함을 쳤다.
정언은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3층 계단 입구에서 잠시 멈췄던 소리가 가까워졌다.
“맞는 것 같은데.”
“혼자예요?”
윤의 물음에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 피디, 카메라 세팅 좀 할래?”
정언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윤이 가방에서 황급히 카메라를 꺼내 전원을 켜고 녹화 모드로 돌렸다. 정언의 예상대로 그 목소리는 점차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현장이 어쩌고 하는 낱말들만을 산발적으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전화를 끊은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들어오다 거기 선 윤과 정언을 보고 멈칫하며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정언은 사무실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경일용역 사장님 되십니까?”
남자가 얼굴에 순식간에 경계하는 빛을 띠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로, 턱 아래에 반 뼘 정도의 긴 흉터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키는 정언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할 정도로 작은 편이었으나 체격이 단단한 것이 옷 아래로도 티가 났다.
“무슨 일입니까?”
정언은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남자가 눈가를 찡그리며 명함을 들여다보더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YBS에서 무슨 일로 왔어요? 나는 할 말이 없는데요.”
“저희 에서 나왔습니다. 잠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