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
5화.
맑은 강바닥을 마구 휘젓듯, 기껏 가라앉은 감정들이 다시 소용돌이쳤다. 정언은 눈썹 위를 문질렀다.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신선하네. 내 성격 몰라요? 한 번 아니면 아닌 거지, 뭘 다시 생각해.”
『나 서 피디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여기 말고 프로그램 없는 거 아니잖아. 어디 가도 충분히 실력 발휘할 수 있는데 아까워서 그래. 이 바닥에서 서정언 실력 누가 몰라.』
재희의 말투는 거의 설득에 가까웠다. 정언은 다시 한 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따라 원두가 유달리 강배전된 것 같았다. 혀를 휘감는 씁쓸함이 강렬했다. 기분 탓일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생각하긴 싫었다.
“강재희도 나이 먹긴 먹었네, 그런 소릴 다 하고. 선배가 진짜 나 생각하면 그러는 거 아니죠. 나 팀 옮길 생각 없어요.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할 때 그러라던 사람이 누군데. 싸워 보지도 말고 그냥 포기하라고? 왜? 선배가 언제 나 그렇게 가르쳤어요?”
『서 피디.』
“나 입사했을 때 선배가 나보고 뭐라고 그랬어요? 겁먹지 말고 물어뜯으라고 나 얼마나 볶았는지 기억 안 나요? 미친개처럼 살라며. 미친개 데려다 놓고 이제부터 사람 물지 말라고 하면 걔가 잘도 안 물겠다.”
재희는 말이 없었다. 정언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내뱉었다.
“이 시간에 선배가 전화하면 나 엄청 설레니까 이딴 짓 하지 마요. 전화비 아깝게.”
반쯤 농담이고, 반쯤은 진담인 마지막 말에 재희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쪼개기는, 하고 소리 없이 중얼거린 정언은 핸즈프리를 고쳐 끼었다. 진지한 척하는 게 분명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직도 나한테 설레면 그거 병인데.』
이런 상황에도 아직 농담할 정신은 있는 모양이었다. 기가 차서 푹 터진 정언은 혀를 찼다.
“하여튼 한 번 띄워 주면 정도를 몰라. 잠을 안 자니까 그러잖아. 안 하던 짓하고, 농담하고 진담 구분도 못 하고. 나 자야 되니까 그만 끊어요.”
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멈추게 한 건 재희의 질문이었다.
『서 피디, 하나만 묻자. 만약에 나 없어도 여기 남아 있을 거야?』
정언은 헛웃음을 뱉었다. 재희라면 그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공연히 심술궂은 기분이 되었다. 대답이 날카롭게 나갔다.
“선배가 여기 없는 게 가능한 일인지 먼저 대답해요.”
잠시 침묵하던 재희가 한숨처럼 웃었다.
『어떻게 한마디를 안 지냐.』
“나 선배한테 절대 안 져 주는 거 몰랐어요? 그런 식으로 사람 떠보지 말아요. 진짜 기분 나빠지려고 하니까.”
정언이 정말 화가 난 투로 대꾸하자 재희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알았어. 그만할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 참, 아침에 사고 났었다며. 어떻게 된 거야?』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는 싫었다. 정언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쪽에서 딴 데 정신 팔다가 주차장에서 나 나가는 거 못 보고 받은 것 같더라고요. 살짝 긁혔는데 티 날 정도는 아니고, 공업사 보낼 시간도 없어서 그냥 말았지 뭐.”
『교통사고는 나중에 후유증 오는데. 병원은 가 봤어?』
“그 정도 아니에요.”
『그러다 골병들어. 아, 그리고 우리 팀 충원 건 말인데…….』
답지 않게 주저하는 재희의 태도를 알아차린 정언이 바로 그 말을 끊었다.
“제작비 만 원 받기도 힘든 판인데 누가 폐지할 팀에 충원을 해 줘요. 무슨 말인지 아니까 나한테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어요. 그만 끊죠. 잠 좀 자고. 집에 가기 싫으면 숙직실 가서라도 눈 좀 붙여요.”
인력 충원을 요청한 지가 벌써 두 달째였다. 계약직 조연출이 죄다 그만두고, 아직 3년 차가 못 된 막내 우지혁 피디 하나만이 조연출로 남아 있었다. 일손이 모자라, 입봉한 지 한참인 피디들이 알아서 돌아가며 조연출 업무까지 소화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불가항력적인 일로 재희가 미안한 티를 내게 하는 건 싫었다. 이런 통화는 길어져 봐야 서로 불편했다. 핸드폰 너머에서 눌러 참는 게 분명한 한숨이 넘어왔다.
재희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사무실에서 봐.』
전화가 끊어졌다.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귀에 꽂고 있던 핸즈프리를 빼어 테이블 위에 던지자, 두어 번 깜빡이던 표시등이 꺼졌다.
정언은 소파에 등을 깊이 묻었다. 물에 빠진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이런 피로감은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피로감보다 정언을 더 지치게 하는 건 지금의 이런 감정들이었다. 물과 기름을 한 병에 넣고 마구 뒤섞은 것처럼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정언은 팔을 올려 눈을 가렸다. 쏟아지던 형광등의 빛이 차단되며 세상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정언은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개― 새― 끼― 들.
한 글자 한 글자 발음한 욕에도 속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긴 한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언은 YBS 시사보도국 피디였다. YBS의 간판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가 정언의 팀이었다. 혹독하기로 이름난 프로그램이라 팀원 모두가 독종 소리를 듣는 판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톱은 단연 정언이었다.
YBS 시보국에서는 예전부터 빨리 입봉하고 싶으면 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었다. 버티기만 하면 무조건 입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평균 근속이 2년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짧은 팀이었다. 재수 없으면 일주일에 한두 번도 집에 못 가는 하드한 스케줄을 몇 년씩 버티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니 버티기만 하면 무조건 입봉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다. 정언도 버텨서 초고속으로 입봉한 케이스였다.
물론 실력 없이는 애초에 버틸 수도 없었다. 정언은 현재 의 유일한 여자 피디이기도 했다. 연차로는 현재 남아 있는 여덟 명의 피디들 중 끝에서 세 번째였다. 그러나 의 경력으로는 재희 바로 다음이었다. 남자들 기백 명이 나가떨어진 팀에서 7년 차니 독종 중의 독종 소리를 듣는 건 당연했다.
재희는 의 메인 피디이자 정언의 첫 사수였고, YBS의 유명 인사였다. 정언이 입사했을 당시부터 이미 YBS에서 강재희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었다. 평범한 탐사보도 프로그램이었던 를 YBS 간판급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재희였다.
재희는 YBS의 전설적 기자 출신인 백선경 시사보도국장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겁이 없었다.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고, 특종이라면 목숨도 걸었다. 재희가 최연소 팀장 기록을 갈아 치우며 메인 피디가 됐을 때 모두가 그럴 만하다고 수긍할 정도였다.
유동욱 사장과 백선경 국장은 그런 재희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최연소 국장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다며 질투 섞인 소리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일이 힘든 것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시청률도, 화제성도 늘 최고였다.
문제가 생긴 건 바언진 이사진이 갑자기 대거 교체된 이후부터였다. 정부 비판 보도를 자주 내보내는 와 를 찍어내려, 윗선에서 여론이 나쁜 걸 알면서도 무리하게 이사진을 교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시보국도 만만치는 않았다. YBS 노조는 독재 정권 시절에도 어용 보도를 거부하며 총파업에 들어갔던 공영방송 최강의 강성 노조였다. 노조의 핵심 인사들은 대부분 시보국 소속이었다. 아무리 이사진들이라도 함부로 시보국을 건드리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이사진은 마치 모래섬 게임을 하듯 시보국을 밑바닥부터 조금씩 파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청와대나 여당 인사들의 부정부패를 취재하는 기자들을 감시하며, 무슨 핑계를 대서든 징계를 내렸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고정 패널들 중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출연 허가가 나지 않았다. 항의하는 피디들은 강제 전보당하기 시작했다.
동욱과 선경은 이 상황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이사회가 열릴 때마다 이사회실 밖으로 고성이 오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 저항을 비웃듯, 중도 성향이라고 주장하는 어용 기자들이 갑자기 대거 승진했다. 회의 때마다 어용 기자들과 그렇지 않은 기자들 사이의 신경전이 엄청났다.
편성국장이나 제작국장, 보도본부장 등 주요 인사들도 친정부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교체됐다. 시청자들 사이에서 뉴스 논조가 달라졌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시보국에서 절대적이었던 선경의 파워가 약해지면서, 저항하는 사람들 역시 점점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이었다.
바로 옆에서 같은 시보국 동료들이 그 꼴이 나는 걸 보면서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곧 우리 차례일 거라는 모두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폐지가 통보된 건 보름 전이었다. 900회가 몇 달 앞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길에 팀원들끼리 900회 특집은 뭘 할까, 하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참이었다. 아무도 그 불길한 예감이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재희의 책상 위 내선전화가 울렸다. 선경이었다. 재희는 다들 나 몰래 또 무슨 사고 쳤어, 하고 농담을 섞어 투덜거리며 국장실로 올라갔다.
재희가 돌아온 건 한 시간쯤 뒤였다. 전에 없이 굳은 얼굴이라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 개편 시즌에 폐지한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