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0
50화.
“아니, 아뇨. 안 됩니다.”
프로그램 이름을 듣자마자 남자가 정언을 한쪽으로 밀며 사무실 문을 열쇠로 열었다. 남자가 들어가기 무섭게 정언은 닫히려는 문 사이로 몸을 일단 밀어 넣었다. 놀란 윤이 뒤에서 선배, 하며 정언을 끌어당기려 했으나 정언은 말리는 윤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십수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가죽소파와 사무실 책상, 철제 캐비닛과 어울리지도 않는 낡은 간이의자 몇 개 외에는 별다른 집기조차 없는 휑한 사무실이었다. 안쪽 구석에는 골프백 하나가 놓여 있었고, 열린 백 위쪽으로 몇 개의 골프채 클럽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한자로 이름을 판 나무 명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代表 孫景一. 정언은 눈으로 그 글자를 읽었다. 대표 손경일.
“손경일 대표님 본인이세요?”
정언이 묻자 남자는 부정하는 대신 노골적으로 기분 상한 티를 냈다.
“아니, 나는 할 말이 없다고. 무슨 일로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네.”
“저희가 지금 취재하는 사건이 있는데 몇 가지만 여쭤보고 싶어서요.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안 될까요?”
“뭔지는 몰라도 나는 방송에 나올 만한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에요.”
“박규형 씨하고 아는 사이세요?”
대답을 거부하려는 티를 내며 돌아서서 캐비닛 안을 들여다보던 경일이 그 이름에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누구요?”
“서온건설 진송신도시 현장에서 일하시던 박규형 씨하고 혹시 아는 사이신지 여쭤본 겁니다.”
정언은 천천히 말하며 경일의 얼굴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분명 규형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그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경일이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기색을 하더니 곧 성질을 냈다.
“아니, 나는 그런 거 모르겠고, 그만 가라고요!”
“서온건설 쪽하고 전혀 관련이 없으세요?”
“이 아가씨가 정말 왜 이래?”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언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민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대박
― 95년 을정신도시 개발 지역 현장 충돌 영상에서 발견
― 01년 애포신도시에서도
― 최변이 확인해 줌. 서온이 예전부터 끼고 일하는 용역 업체래. 자체 시위 현장 녹화한 영상 보내 주겠다고 했음
― 메시지 확인하면 연락해
민혜의 메시지에는 두 개의 영상 링크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서둘러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경일을 다그치듯 물었다.
“서온건설하고 같이 일하시는 거 맞죠? 진송신도시 현장에 매일 나가시는 이유가 뭡니까? 저희가 CCTV하고 블랙박스 영상으로 경일용역 소속 차량이 현장에 드나드는 걸 이미 확인했어요. 인력 용역 일은 안 하시는 거잖아요. 굳이 현장에 계속 드나드시는 이유가 궁금한 겁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요. 남 영업하는 데 와서 뭐하는 거야?”
경일이 불쾌한 얼굴로 바닥에 놓여 있던 철제 의자를 걷어찼다. 시멘트 바닥 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의자가 넘어졌다. 뒤에서 윤이 움찔했으나 정언은 동요하지 않았다.
“박규형 씨가 현장에서 추락사한 건 아시죠? 박규형 씨가 누군지 모르셔도 매일 현장 드나드시는 분이면 충분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실 거 아닙니까.”
“야, 너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나가라잖아, 내가 대답할 이유가 없다잖아!”
경일이 가까이 다가와 정언의 어깨를 밀쳤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밀친 탓에 몸이 휘청거렸다. 기절할 정도로 놀란 윤이 황급히 정언을 부축했다. 그러나 정언은 위축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차라리 한 대 쳐 주는 편이 좋았다.
정언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 저한테 손대지 마시고요. 사장님 말씀대로 이 일하고 관련이 없으시면 답변해 주실 수 있잖아요. 저희가 확보한 자료가 있고, 그래서 사장님 말씀 들어 보러 온 건데 이러시면 저희 쪽도 사장님 입장을 전달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정언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경일이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어 번 가기도 전에 상대가 받은 듯, 경일이 관자놀이 부근을 긁으며 내뱉었다.
“어, 지금 좀 골치 아프게 됐으니까 애들 몇 명만 데리고 올라와 봐.”
“선배.”
일이 커졌다고 생각했는지 윤이 뒤에서 슬며시 정언의 옷자락을 당겼다. 정언은 경일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윤에게 속삭였다.
“카메라 뺏기지 마. 카메라 뺏길 것 같으면 메모리카드부터 바로 빼 버려.”
윤이 뭐라고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경일이 구석에 놓인 골프백에서 클럽 하나를 집어 들어 손에 쥐고는 헤드로 바닥을 툭툭 쳤다.
팔이나 다리 하나 부러질 수도 있겠네, 속으로 생각했으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어디 하나 부러진다면 바로 일을 키우는 건 쉬웠기에, 내심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한 정언은 잠깐 숨을 골랐다.
그때 열린 문 밖으로 여러 사람이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윤이 거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질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남자 서넛이 문 앞을 막았다.
“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사투리 억양이 심한 남자가 먼저 경일에게 물었다. 운동선수 출신인 듯 체격이 상당히 좋았다. 경일이 클럽 끝을 툭툭 치며 턱짓으로 정언과 윤을 가리켰다.
“방송국 피디님들인데 취재를 좀 하고 싶다고 그러시네. 근데 나는 썩 내키지가 않으니까 밖으로 모셔다 드려.”
그러자 남자가 대번에 정언의 팔을 먼저 움켜잡았다. 상당히 세게 잡혀, 잡는 것만으로도 멍이 들 것 같았다. 윤의 표정이 굳는 걸 본 정언은 눈짓을 하며 내뱉었다.
“저한테 손 안 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폭행에 성추행까지 더해서 신고할 수도 있거든요. 사장님,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정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일이 들고 있던 골프채를 휘둘렀다. 캐비닛 위에 놓여 있던 싸구려 도자기가 바닥으로 날아가 처박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정언이 잡혀 있던 팔을 뿌리치자 경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가씨, 내가 꼭 험한 꼴 봐야겠어?”
다음 순간, 키가 작은 남자가 정언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짧은 단발을 거칠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라 무의식중에 작은 비명이 터졌다.
그러자 곁에 있던 윤이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놀란 정언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쪽도 윤이 반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단번에 윤에게 멱살을 잡혀 벽으로 밀쳐졌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밀어붙여진 남자가 억, 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윤이 한 손에 카메라까지 든 채여서 불리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남자는 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키와 체격 차이 탓에 아무리 잘 훈련된 상대라도 순간적으로 떠밀리는 건 당연했다.
기겁을 한 정언은 황급히 윤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윤은 정언의 손을 즉시 뿌리쳤다. 아무래도 위험했다. 다시 한 번 윤을 억지로 잡아끌어 남자에게서 떼어 놓자, 윤이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정언은 윤의 옷자락을 당기며 나지막하게 주의를 주었다.
“이쪽에서 치면 쌍방이야. 대응하지 마.”
“쌍방이고 뭐고 선배한테 손을 댔잖아요!”
윤이 목소리를 높였다. 전에 본 적 없이 화가 난 표정이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했다. 늘 생글거리던 윤이 이런 얼굴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정언이 잠시 당황하는 찰나, 다른 남자들이 윤을 밀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야 이 새끼야, 너 뭔데? 뭔데 남의 사업장에 카메라 들고 들어와서 이 지랄이야?”
잘못하다가는 윤이 다칠 수도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팔다리 하나 부러질 각오를 했다지만, 윤이 다치는 건 문제가 달랐다. 정언의 말이 기억났는지, 윤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재빨리 가방에 집어넣으며 뒤로 숨겼다.
그러자 키가 큰 남자가 윤을 뒤에서 잡아채 돌려세웠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윤이 중심을 잃었다. 동시에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본 정언은 곁에서 있는 힘껏 윤을 잡아당겼다. 윤이 순간적으로 휘청한 탓에 남자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정언은 윤을 문 쪽으로 일단 밀어 두고 그 앞을 가로막아 섰다.
“사장님, 이러시면 더 곤란한 거 모르세요?”
입 안이 말랐다. 문전박대는 숨 쉬듯 흔한 일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서로 곤란해지는 상황을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정언을 빤히 보던 경일이 골프 클럽을 어깨에 걸쳐 툭툭 치며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좋게 말할 때 카메라 내놔. 찍은 거 있잖아.”
“그건 곤란한데요.”
정언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사이 윤이 서둘러 카메라 가방을 뒤로 숨기며 바로 배터리와 메모리카드를 뺐다. 만에 하나 카메라가 망가진다 하더라도 메모리카드를 지키는 게 먼저였다.
경일이 카메라 가방을 멘 윤 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남자들이 달려들어 소리를 지르며 윤에게서 카메라를 빼앗으려 들었다. 가방을 꽉 껴안은 윤이 남자들을 뿌리치는 사이, 어깨끈이 흘러내리며 카메라 가방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언은 바로 가방을 감싸 안으며 그 위로 엎드렸다. 열린 문 너머를 슬쩍 보자, 같은 층을 쓰는 사람들 중 하나인지 누군가가 문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경찰이라도 좀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야, 이 미친년아, 안 떨어져?”
머리 위로 거친 목소리가 떨어지며 몸이 억지로 잡혀 들렸다. 그러나 악으로 버티는 건 자신 있었다. 정언은 가방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등을 둥글게 말았다. 다음 순간 몸을 숙인 윤이 자신을 품으로 확 끌어당겨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언이 미처 무슨 상황인지 인식하기도 전 곧바로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