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윤은 말없이 정언을 내려다보았다. 정언의 말이 옳았다. 정언이 지금까지 그렇게 일했다고 자신이 비난할 주제는 확실히 아니었다.
입사 후로 몇 년을 정언은 지금처럼 항상 이렇게 일해 왔고, 자신은 그저 정언의 인생에 갑자기 굴러 들어온 돌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이 정언에게 이런 일로 화를 낸다는 걸 정언이 쉽게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저 화난 거 아니에요.”
침착해져야 했다. 감정을 고른 윤이 나지막하게 대답하자, 잠시 윤을 물끄러미 보던 정언이 차에 타라는 손짓을 하고는 운전석에 먼저 타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 앉은 윤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화가 난 건 아니라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다친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친 쪽이 정언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기분이 나쁜 까닭이 뭔지 모를 노릇이었다.
― 우리 엄마 말고 내 걱정 그렇게 하는 거 김 피디가 처음이네.
그 말이 뇌리를 스친 건 그때였다.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그러나 윤의 마음을 붙든 건 처음이네, 하고 무심하게 말하던 그 목소리였다. 그럼 지금까지는 누구도 정언을 그렇게 걱정한 적 없다는 걸까.
윤은 곁눈질로 옆에 앉은 정언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언은 앞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목덜미를 덮는 까만 머리칼과 늘 피곤한 탓인지 창백한 뺨, 핏기 없는 입술이 눈에 박혔다.
“……합의하자고 나올 거 뻔하니까 치료비는 걔들한테 받아. 우리가 영상도 갖고 있는 거 알아서 더 함부로 못 할 거야.”
정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윤은 네, 하고 대답했으나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경찰서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정언이 고개를 까딱여 따라오라는 표시를 하고는 먼저 앞서 들어갔다.
정언을 따라 폭력계 조사실로 들어서자, 한 줄로 앉아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이쪽을 보았다. 옆의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꼬고 있던 경일이 정언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언은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가방에서 진단서 두 장을 꺼내 담당 형사에게 내밀었다. 담당 형사는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윤을 흘끔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피디님, 진짜 고소하실 건 아니죠?”
“왜요?”
정언이 팔짱을 끼며 되묻자 형사가 눈으로 경일을 가리켰다.
“사장님이 만약에 합의 안 해주시면 영업 방해로 걸겠다고 하시니까, 좋게 좋게 해결하시면 어떻습니까?”
“영업 방해요?”
코웃음을 친 정언이 경일을 돌아보았다. 경일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나, 정언은 그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빤히 응시했다. 경일이 머쓱하게 손을 거두고는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말투로 입을 열었다.
“피디님, 아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우리 애들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치료비 나온 건 저희 쪽에서 전부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기름값에 정신적 피해 보상, 뭐 이런 것까지 해서 인당 한 삼사십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정언이 어이없다는 투로 웃었다.
“합의 안 하면 영업 방해로 저 맞고소하시겠다면서요?”
“그거는 제 입장에서도 어쩔 수가 없죠. 합의 안 해주시면 저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제가 아까 명함 드렸죠? 인터넷에 제 이름 검색해 보세요. 국회의원에 대기업에 정부에, 고소라면 아주 지겹게 당했으니까 사장님이 고소하신다는 말씀 저한테 전혀 타격 없습니다. 영업 방해로 맞고소한다고 하시면 제가 그러려니 할 줄 아셨어요?”
시베리아 벌판처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정언의 얼굴에 경일이 당황한 기색을 했다. 경일이 담당 형사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으나, 얼핏 보기에도 형사 역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정언은 선 채 경일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제가 오늘 미리 연락 안 드리고 예의 없이 군 건 인정합니다. 정식으로 취재 요청할 테니까 응하시겠어요? 그거 받아 주시면 저희도 여기서 바로 합의하고 가겠습니다.”
어차피 고소해 봐야 법정에서도 합의를 권할 정도의 일이었기에, 그렇다면 아예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경일의 표정이 굳어졌다.
담당 형사가 손을 휘저었다.
“사장님,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일을 이렇게 만들어요. 무슨 프로그램인지 몰라서 그래요? 괜히 일 더 커지기 전에 그냥 취재 응하고 합의하세요.”
“전화 한 통만 쓰고 오겠습니다.”
딱딱하게 대답한 경일이 잠시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다. 채 이삼 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에 전화를 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경일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뻔한 얼굴로 정언에게 말했다.
“예, 그렇게 하죠. 편하신 날짜에 연락 주시면…….”
“지금 하시죠. 휴게실에서 인터뷰 잠깐만 하시고, 그러면 바로 합의서 써 드리겠습니다.”
정언은 경일의 말을 끊으며 내뱉었다. 경일이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담당 형사 쪽을 보았다. 형사가 그냥 빨리 갔다 오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정언은 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폭력계 맞은편의 휴게실로 향했다. 때마침 휴게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정언은 자판기에서 커피 세 잔을 뽑아 한 잔은 윤에게, 다른 한 잔은 경일에게 주고는 경일의 맞은편에 앉았다.
“김 피디, 카메라 켜.”
윤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녹화 버튼을 눌렀다. 멀쩡하게 작동되는 걸 보니 다행히도 아까의 그 아수라장에서 고장 난 곳은 없는 듯했다. 윤은 카메라를 들어 경일 쪽을 찍기 시작했다. 정언이 커피를 두어 모금 홀짝이고는 입을 열었다.
“화면이 방송에 사용될 경우에 신변 보호는 당연히 해 드립니다. 모자이크 처리하고 음성 변조는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원하시면 전체 대역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음성까지 다 대역으로 처리해 드리니까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시고요.”
“아, 예.”
영 내키지 않는 투였으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일이 대답했다. 정언은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CCTV와 제보 받은 블랙박스 영상을 여러 차례 돌려 본 결과, 진송신도시 서온건설 스타일하우스 건설 현장에 거의 매일 경일용역 소유 차량이 드나드는 걸 확인했습니다. 현장에는 관련자 이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걸로 아는데, 그러면 서온건설 관련으로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거죠?”
“네, 뭐…… 일단 인력 용역을 하고 있으니까…….”
“저희가 생각하는 평범한 인력소개소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공사 중인 현장에 그런 인력이 투입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인부들 다루기가 쉽지 않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라 현장에서 충돌이 많습니다. 그래서 쓰는 거지 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윤은 경일이 눈치를 본다는 것을 느꼈다. 화면 안의 그는 뭔가 초조한 듯했다. 손끝으로 빠르게 테이블을 치는 동작은 무의식중의 습관 같았다. 정언 역시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정언은 경일의 손끝에 눈을 둔 채 물었다.
“그런 부분을 컨트롤하기 위한 거라면 출근 시간 지나서 드나드는 이유가 뭡니까?”
“저희는 인부가 아닙니다. 그 시간에 나갈 필요가 없어요. 정해진 시간에 나가서 인부들 관리 감독하고, 그러니까 굳이 출근 시간을 맞출 이유가 없는 거죠. 인부들하고 사무직 출근 시간 다르지 않습니까.”
미리 준비한 듯한 답변이었다. 정언은 재차 그를 다그쳤다.
“서온건설 측하고 일하고 있다는 걸 아까는 왜 답변 못 하셨죠?”
“저희 같은 사람들한테 용역 깡패라고 하니까, 혹시 방송 나가서 서온건설 측하고 거래 끊길까 봐 그런 거죠. 저희 아주 작은 회사입니다. 큰 고객 떨어지는 건 좀…….”
경일이 말끝을 약간 흐렸다. 큰 고객. 방금 전 경일이 사용한 표현을 캐치한 정언은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죠. 서온건설하고는 거래가 상당히 오래되셨잖아요. 95년도 을정신도시 현장에서도 주민 시위가 심했는데, 그때도 서온건설 측에 고용된 업체였죠? 그러면 이미 이십 년 이상을 같이 일해 오신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사장님이 직접 운영하셨습니까?”
“아니, 그건…… 그, 저, 그건 어떻게 아시고?”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경일의 얼굴이 무너지자, 정언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을정신도시면 의정부에서 거리가 꽤 있는 편인데요. 굳이 여기 있는 업체를 고용해서 쓸 이유가 있었나요?”
“저희가 이쪽으로 사무실을 옮긴 지가 얼마 안 됐습니다.”
“서온건설 현장을 따라 옮기시는 건가요?”
“뭐, 일감 있는 데를 따라가다 보니까…….”
경일이 말끝을 어물거렸다. 정언은 남은 커피를 마시고는 화제를 돌렸다.
“박규형 씨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아니, 제가 그분은 진짜로 알지를 못합니다.”
황급히 말을 끊은 경일이 손을 내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정말 그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박규형 씨가 현장 관리를 담당했고, 원주민 데모 때도 사측 인사로 자주 나간 걸로 아는데요. 경일용역에서 박규형 씨를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피디님, 이게 정말 제가 억울한데 저희는 그냥 주는 돈 받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겁니다. 현장 관리를 누가 하는지, 데모하는데 사측에서 누가 나오는지 그런 건 몰라요. 차에서 대기하다 나오라면 나오고 상황 끝나면 갑니다. 더 이상 거기 대해서는 얘기할 수가 없어요.”
규형에 대해서만큼은 경일의 태도가 상당히 완고했다. 정언은 그를 다시 다그쳤다.
“그러면 사측에서 경일용역을 관리하는 관리자는 누구죠? 관리자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물어보시면 제가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까? 저도 이거 먹고살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밥줄 떨어질 거 뻔히 알면서 피디님한테 대답할 수 있는 건 다 해 드린 거예요. 이 이상 자꾸 그렇게 물어보실 거면 저도 더 인터뷰 못 하겠습니다. 그냥 고소하세요.”
경일이 약간 흥분한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물끄러미 경일을 바라보던 정언은 알겠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피디, 카메라 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