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윤이 카메라를 끄자 경일이 정언의 눈치를 살폈다.
“끝난 겁니까? 이걸로 합의하고 가실 거죠?”
“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경일이 안도하는 눈치로 품에서 봉투를 꺼내 건넸다. 윤과 정언이 병원에 있었던 사이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정언은 봉투를 받지 않고 윤을 가리켰다.
“합의금 필요 없고요, 이 친구 응급실 비용만 청구하겠습니다. 영수증에 계좌번호 적어서 드려.”
윤이 가방을 뒤져 응급실 영수증을 찾아 내밀자 경일이 황급히 그 영수증을 받아들었다. 폭력계로 돌아가 짧은 합의서를 쓴 정언은 도로로 나와 차에 타기 무섭게 중얼거렸다.
“이 새끼들 뭐가 있어. 내가 끝까지 파 볼 거야.”
그 말에 윤은 한숨처럼 내뱉었다.
“뭘 해도 좋으니까 제발 조심 좀 하세요.”
무심결에 튀어나온 본심이었다. 정언이 건방지다고 여긴대도 정말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언이 늘 이런 식으로 일해 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윤에게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잠시 미간을 좁힌 정언이 뭐라고 하려는 것 같았으나, 그것을 눈치챈 윤이 말을 돌렸다.
“사무실로 가실 거죠?”
빤한 수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언은 의외로 순순히 응, 하고 대답했다. 더 이상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는 싫은 듯했다.
“아까 95년도 을정신도시 얘기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송 작가님한테 연락 왔었어요?”
“경일용역 갔을 때 메시지 왔었어. 영상도 찾아 놓은 것 같더라고. 일단 사무실로 갔다가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쉬어. 고생 많이 했으니까.”
“선배는요.”
“나도 오늘은 집에서 좀 쉬어야 될 것 같아. 피곤하네.”
정언이 짧게 대답하며 다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오후라 더 이상 햇빛으로 시야가 방해받을 일은 없었는데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정언은 계속 그렇게 얼굴을 가린 채였다.
다시 방송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다. 사무실로 올라가자마자 사람들이 윤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가장 먼 자리에 앉은 현진까지 벌떡 일어나 윤의 이마에 붙은 커다란 반창고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아니 김윤, 그거 뭐야?”
“아뇨, 별거 아니에요. 그냥 좀 어디 긁혔어요.”
윤이 애써 웃으며 대답하자 예준이 장탄식을 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얼굴 보관 잘 해야지, 왜 그렇게 막 쓰고 다녀? 얼마나 긁혔길래 그래? 한 번 보자.”
진짜 반창고를 떼 볼 기세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윤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진짜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그거 혹시 서정언이 그래 놓은 거 아냐?”
편집실에 있던 호형까지 그새 고개를 내밀며 한마디를 보탰다. 곁에 서 있던 정언이 포기했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래. 내가 그랬다, 내가.”
“정언 피디님 너무해요!”
막내 작가인 성옥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언에게 투정을 부렸다. 윤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진짜 아니에요. 진짜 그런 거 아닌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있지, 아마?”
호형이 낄낄거리자, 정언이 호형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응, 안 피디도 좀 와 볼래?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까.”
“어우, 아냐. 나 지금 엄청 바빠.”
정언의 말에 호형이 대번에 편집실 문안으로 머리를 다시 집어넣고는 문을 닫았다. 저 인간이, 하고 중얼거린 정언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커피를 타 오던 민혜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민혜는 어색하게 서 있는 윤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머, 김 피디 뭐야? 아침에 멀쩡하게 나간 사람이 이런 건 왜 달고 왔대? 무슨 일 있었어?”
“회의실 가서 얘기합시다.”
정언은 민혜와 윤을 회의실로 불러 문을 닫았다. 정언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심각하게 듣고 있던 민혜가 아휴, 하고 눈을 흘겼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왜 일부러 긁어서 일을 만들어.”
“안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 아무튼 뭐가 있긴 한 거 같아요. 나 보내 준 영상 아직 확인 못 했는데, 최 변호사님도 뭐 보내 준다고 했다며? 경일용역 확실해요?”
정언이 말을 돌리자 민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 아카이브에서 확인했어. 용역 업체 이름에 경일용역이라고 돼 있더라고. 95년 영상은 화질이 너무 안 좋아서 확실하진 않은데, 01년 영상은 거기 용역들 유니폼에 경일용역이라고 아예 쓰여 있어. 최변이 보내 준다는 영상 보면 더 확실하겠지.”
“이 새끼들 이거 진짜 문제가 있네. 용역 깡패가 현장 출근을 매일 할 일이 대체 뭐가 있고, 그렇게 매일 나가면서 박규형 씨를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맞장구를 친 민혜가 뒤에 앉아 있던 윤 쪽으로 시선을 주더니 혀를 찼다.
“김 피디 엄청 놀랐겠네. 괜찮아요?”
“네, 저야 뭐…….”
“그만하길 다행이야. 예전에 그 성모 사원인가 뭔가 취재하러 갔을 때 얘 진짜 다리 부러졌었거든요. 강재희가 거기 찾으러 왔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얘 산에서 그때 변사체로 나왔을 거라고 말 많았어.”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성모 사원이라면 정언이 취재했던 ‘가짜 성모와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 편에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 이야기가 분명했다. 윤이 그 말에 미묘하게 표정이 변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정언은 민혜에게 눈치를 주었다.
“아니, 그런 얘기를 뭐 하러 해요? 겁먹으라고?”
“운 좋은 줄 알라고. 정언, 아까 최변이 전화해서 영상이 자기 강의 나가는 센터 사무실에 있다고 내일 보내 주겠대. 내일 확인하고 오늘은 둘 다 일찍 들어가. 덕분에 나도 좀 일찍 들어가 보자.”
민혜가 정언의 등을 떠밀었고,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혹시 선배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
“강재희? 노조 사무실에 있을걸. 요새는 여기 없으면 거기서 사니까.”
“그래요? 작가님 지금 바로 퇴근할 건 아니죠? 우리 가고 혹시 선배가 나 찾으면 일 있어서 일찍 들어갔다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 달라고 좀 전해 줘요.”
“별걱정을 다 한다. 얼른 가서 씻고 푹 자, 오늘은. 고생했어.”
정언이 민혜에게 웃어 보이고는 회의실을 나왔다. 가방을 들고 정언과 함께 사무실을 나선 윤은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집에 어떻게 가실 거예요?”
“걸어서.”
“태워 드릴게요.”
정언이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더니 때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 타서 1층 버튼을 눌렀다.
“누가 누굴 데려다준대? 반창고는 손바닥만 하게 붙여 놓고 쥐가 고양이 생각한다. 일찍 들어가서 좀 쉬어. 김 피디도 며칠 못 자서 얼굴 안 좋은데.”
“어차피 가는 길이에요.”
윤은 불이 들어온 1층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끄고는 지하 주차장 층수를 눌렀다. 정언이 뭐라고 하려는 듯 윤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차장에 내린 윤은 정언에게 먼저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는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정언이 옆에서 내비게이션에 자기 집 주소를 찍었다. 윤은 농담처럼 물었다.
“이렇게 주소 막 알려 주셔도 괜찮아요?”
“왜, 오밤중에 찾아와서 뒤통수라도 한 대 치고 싶어서?”
“남자한테 집 알려 주는 거 위험하잖아요.”
정언이 그 말에 짧게 웃는 소리를 냈다.
“김 피디 위험한 남자라고 생각하라 그거야?”
무심하게 지나치는 말이었으나, 문득 속이 뜨끔해진 윤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정언은 딱히 대답을 원한 건 아닌 듯했다.
내비게이션에 뜬 목적지는 가까웠다. 차로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을 듯한 거리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퇴근길이 슬슬 시작되기 직전의 도로를 지나 도착한 곳은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대로변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동안, 정언은 내내 말이 없었다.
윤이 엘리베이터 쪽 입구에 차를 세우자 정언이 고마워,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깡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백팩을 둘러메는 뒷모습이 눈에 맺혔다.
윤은 바로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정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잠깐 뒤를 돌아본 정언이 곧 그것을 알아차린 듯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말고 그 자리에 서서 윤을 보았다.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던 정언이 이쪽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조수석 쪽의 창을 똑똑 두드렸다.
당황한 윤이 창을 반쯤 내리자 정언이 물었다.
“잠깐 들어왔다 갈래?”
“네?”
뜻밖의 제안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닌 여자 집에 굳이 들락거리는 취미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정언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서정언 피디가 아닌 그냥 서정언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윤은 바로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이래도 될까 생각했으나 호기심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윤과 엘리베이터를 탄 정언이 12층 버튼을 눌렀다.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윤은 정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는 정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12층에서 내린 정언은 복도 끝의 문 앞에서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들어와. 별 건 없는데.”
문을 연 정언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의 센서 등이 켜지며 어스름이 내려앉은 집 안의 실루엣이 얼핏 드러났다. 손을 뻗어 스위치를 올린 정언은 소파 옆에 백팩을 대충 던지듯 내려놓으며 창을 열었다.
윤은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두어 평 남짓 될 듯한 원룸에는 생활감이 거의 없었다. 필요한 건 다 있어 보였지만, 그건 바꿔 말하면 필요한 것 외에는 일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회색과 흰색으로 맞춘 깔끔한 침구와 작은 흰색 소파, 텔레비전과 책상 위의 노트북, 단출한 화장대. 윤의 시선이 방 안의 물건들에 하나하나 머물렀다. 정언의 집에 그 흔한 화분 하나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인 건 캡슐 커피 머신과 색을 맞춰 가지런히 정리된 캡슐들뿐이었다. 책장의 책들은 거의 언론 관련, 혹은 사회과학 계열의 서적들이었다. 소설책이나 만화책, 잡지 같은 건 한 권도 없었다. 뜻밖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버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