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5
55화.
오랫동안 커피를 마신 윤이 컵을 내려놓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침묵은 어색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윤이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정언은 반쯤 마신 커피를 내려놓았다.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 봐. 내일 반차 내고 오전에 병원 한 번 더 갔다 오고.”
“괜찮아요.”
“내가 반차 내라고 허락해 주는 일 별로 없으니까 잘 생각해.”
무표정하게 말한 정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라는 뜻인 걸 알아차린 윤은 가방을 메고 정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작은 원룸의 거실에서 현관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았다. 센서 등이 켜진 현관에서 신발을 신은 윤은 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서서 정언을 마주 보았다. 현관 벽에 비스듬히 기대 팔짱을 끼고 있던 정언이 눈을 맞춰 왔다.
“선배.”
“왜.”
정언은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김윤,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품으로 끌어당긴 몸이 지나칠 정도로 가볍고 말라, 어쩐지 서정언 피디라는 이름을 감당하기에는 버겁게 느껴졌던 것도.
“아까 선배가 이름 불러 주셔서 좋았어요.”
윤이 시선을 어슷하게 비껴 내리며 말했다. 정언의 눈이 약간 크게 뜨였다. 전구의 따뜻한 노란색 빛에 그 새까만 눈동자가 조금 밝게 보였다. 윤은 그 눈동자를 잠시 응시했다. 놀란 걸까, 아니면…… 정언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문득 윤은 자신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윤은 갈게요, 하며 문을 열었다. 돌아섰을 때 닫히는 문 사이로 얼핏 스친 정언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
그 자리에 선 윤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곧 복도의 센서 등이 꺼졌다. 짙은 어둠이 파도처럼 긴 복도의 끝까지 밀려나갔다. 어둠 속에서 윤은 그 문 너머의 정언을 떠올려 보았다.
달의 뒷면을 보기 위해 궤도 안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그 인력에 이끌린다.
그러니 그 너머를 보고 싶다는 열망은, 결국 불가항력적인 것일까.
정언을 더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 삶의 모든 순간을 전부 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지금까지 설명할 수 없다고 믿었던 수많은 감정들과,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떠올렸던 그보다 더 많은 낱말들이 머릿속에서 부유하다 일순간 내려앉았다.
분진이 가라앉는 물처럼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들이 지워졌다. 그 전부가 아주 느리게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치환됐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거다…….
무음의 어둠이 천천히 녹아들었다. 윤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12.
“아, 여기 계셨네.”
노조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연 성옥이 재희를 발견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충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재희는 성옥의 얼굴을 보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찾으러 왔어?”
“네. 핸드폰 왜 안 받으세요? 지금 사무실 전화 완전 불났어요.”
재희는 그제야 자신이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은 채 사무실 구석에 던져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핸드폰을 꺼내 보자 부재중 통화가 그새 스무 통도 넘게 들어와 있었다.
팀원들이 아예 돌아가면서 전화를 했는지, 성옥부터 현진까지 전화를 안 건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전화를 하다하다 안 되니 찾아오라고 성옥을 보낸 모양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재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성옥이 답지 않게 쭈뼛거렸다.
“일단 좀 올라가 보셔야 될 것 같은데…….”
무슨 일이 나긴 났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충민 역시 불안하다는 표정을 하며 재희의 등을 툭 쳤다.
“갔다 와 봐. 뭔 일 생긴 거 아니냐?”
재희는 성옥을 따라 바로 사무실로 올라갔다. 문 앞까지 나와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뜯고 있던 현진이 재희를 보자마자 팔을 붙들며 물었다.
“아홉 시부터 지금 계속 편성국장, 제작국장, 심의국장, 아주 국장이란 국장들은 다 돌아가면서 전화해서 너 찾고 난리야. 이사실에서도 직통으로 전화 오고. 왜 이러는데? 회사에 무슨 일 있어?”
국장급은 물론이고 이사실에서까지 직통 전화를 건다는 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일 없어요. 우리 뭐 그사이에 사고 친 거 없잖아.”
“그러니까. 근데 왜 저 새끼들이 아침부터 저 지랄을 하냐고!”
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희의 내선 전화가 요란하게 울려 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걸어간 재희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강재희입니다, 하고 말하자마자 전화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재희, 자리에 있었니?』
“지금 막 왔습니다.”
『바로 내 방으로 좀 올라올래?』
시사보도국장인 선경이었다.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철의 여인’으로 이름난 선경은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선경이 이럴 정도라면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화를 끊은 재희는 바로 벽에 걸어 둔 재킷을 걸쳐 입고 국장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선경이 들어와, 하고 말했다. 문을 연 재희는 다음 순간 잠깐 멈칫했다. 안에 선경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미 와서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재희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했다. 심석건 편성국장이었다. 얼마 전 이사진이 자기들 입맛대로 갈아 치운 인사 중 하나로, 본래 시사보도국 정치부 기자 출신의 인물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던 당시에도 실력은 없는데 정치부 기자라 그런지 정치는 잘 하더라는 평이었는데, 소원대로 한자리 차지하고 앉은 뒤로부터는 아주 위세가 대단했다.
석건은 상당히 심기 불편한 얼굴이었다. 이 새끼가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경이 손짓으로 재희에게 와서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강 피디 바쁜 건 아는데, 업무 시간에 자리 이렇게 오래 비우면 근무 태만 아니야?”
재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석건이 말을 툭 뱉었다. 선경을 생각해서라도 날카롭게 굴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침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 건 재희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사내에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업무 연장선상입니다. 국장님께 그런 말 들을 정도로 태만하게 일한 적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여기 와 있는 1분 1초가 아까울 만큼 일할 시간 부족합니다.”
석건의 표정이 즉시 굳어졌다. 재희의 성격을 잘 아는 선경이 급히 손을 뻗어 재희의 무릎 위를 지그시 눌렀다. 어지간하면 성질 좀 죽이라는 뜻이었다. 석건이 기가 찬다는 투로 비아냥거렸다.
“일할 시간도 부족하면 일을 열심히 해야 될 거 아냐. 일하랬더니 왜 애먼 데만 들쑤시고 다녀? 니들은 사람들이 대단하다, 대단하다 하니까 다 떠받들어 주는 거 같고, 방송이면 무슨 짓이든 막 해도 될 거 같고 그래?”
“심 국장, 진정해.”
선경이 석건을 말렸다. 재희는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또 무슨 트집을 잡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희는 보도 윤리 지침 준수합니다. 후배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요. 방심위 기준에 걸릴 만한 방송도 한 적 없습니다.”
석건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야, 니들 저번에 심의국에서 기획안 미리 검수 받으라고 했다며. 그거 왜 안 지켜?”
“지시사항 아니었습니다. 저한테 의사 물었고 그럴 생각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노조와 사측 협의문에서 제작 및 보도 자유의 보장 조항 확인해 보시죠. 방송 제작 시 기획에 대한 모든 우선권은 해당 제작진에게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사측이 먼저 기획안을 심의한다는 건 조항 위반입니다.”
재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게 또 석건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너 그런 식으로 잘난 척하니까 지금 또 니들 고소하겠다고 항의 들어온 거 아냐!”
“그래서요? 언제부터 위에서 저 고소당하는 거 신경 쓰셨습니까? 고소장은 어차피 제 앞으로 올 테고, 제가 알아서 법무팀하고 변호사 상담하면 될 텐데요. 제가 고소 처음 당해서 어쩔 줄 몰라 할까 봐 배려심 발휘하시는 겁니까?”
고소라면 인이 박여 있었다. 수시로 사무실로 전화해 죽여 버리겠다, 밤길 조심해라, 가족들이 무사할 줄 아느냐 하는 놈들에 비하면 고소한다고 난리 치는 놈들은 차라리 신사적이었다.
법정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다 보니 아는 판검사들은 이제 좀 적당히 해요, 하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고소한다는 소리 들었다고 펄펄 뛰는 석건의 태도가 어이없는 건 당연했다.
“서정언 지금 뭐 쑤시고 다니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내뱉어진 말에 재희는 멈칫했다. 정언의 이름이 여기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석건이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어제 무슨 의정부 용역 업체 갔다가 패싸움 나서 경찰서까지 갔다고, 거기서 영업 방해로 고소할 거라고 난리가 났어. 서정언 대체 뭐하는데 그 지랄을 하고 다니는 거야? 윗분들이 기획안 확인해야겠다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야겠다고 아주 화가 엄청 나셨다고.”
정언이 취재 중인 건이라면 진송신도시 관련 건일 게 뻔했다. 물론 패싸움이 나서 경찰서를 갔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니 민혜가 정언과 윤은 출장 갔다가 먼저 퇴근했다고 전하기에 그냥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소리를 석건에게 시시콜콜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재희는 석건의 말을 잠시 곱씹다 대답했다.
“기획은 담당 피디 고유 권한이라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건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이나 정부 기관에서 저희 고소하겠다는 것도 팀으로 직접 얘기 들어오는데, 고작 용역 업체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영업 방해로 고소하겠다는 걸 윗분들이 저보다 먼저 아시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허를 찔린 듯 석건이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구겼다. 뭔가 있다는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