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6
56화.
정언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하나하나 보고받지는 않았지만, 정언도 초짜가 아니었다. 영업 방해로 고소하겠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행패를 부릴 정도로 서툴게 굴었을 리 없었다. 만약 정말 위법한 행위가 있었다면 경찰서에 갔을 때 이미 연락이 왔을 게 분명했다.
“그것까지는 강 피디가 알 거 없고, 아무튼 서정언 기획안 제출해. 지금 방송 남아 있는 모든 회차 기획안까지 다 포함해서.”
석건이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내뱉었다. 재희는 즉시 손을 뻗어 석건의 입에 물린 담배를 가로채서는 그것을 탁자 위의 종이컵 안에 눌러 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석건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하며 재희를 보았다. 재희는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사내는 전부 금연구역인 거 아실 텐데요.”
“야, 강재희!”
그제야 재희에게 당했다는 걸 알아차린 석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희 역시 지지 않고 일어나 석건을 마주 보았다. 재희의 차가운 얼굴에 석건이 약간 주춤했다. 재희는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기획안 제출? 일방적으로 폐지 통보해 놓고 별말 없으니까 아주 팀이 호구로 보이나 본데, 윗분들한테 가서 똑똑히 얘기하세요. 기획안 받고 싶으면 노조하고 사측 협의 조항 법무팀하고 먼저 검토하시라고요. 우리가 위법한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기획안 사전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전문가 의견 받아 오시고, 노조 측에서 거기에 동의하면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는 기획안 다 드리겠습니다. 그거 아니면 개수작 부릴 생각 하지도 마세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더 가만히 안 있습니다.”
재희의 말에 석건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개수작? 너 지금 개수작이라고 했어? 가만히 안 있으면 뭐 어쩔 건데, 이 새끼야!”
“뭐 어쩔 건지는 두고 보면 아시겠죠. 지금 어디다 대고 이 새끼, 저 새끼 하시는 겁니까?”
“너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는 건 진작부터 알았는데,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진짜! 야, 내가 국장이고 너보다 몇 기수가 선배인데 어디서 눈깔 똑바로 뜨고 대들어?”
재희는 흰 눈을 뜨고 삿대질하는 석건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선배면 선배답게 처신하세요! 후배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어떻게 쌓아 올린 회사인데, 그거 망치는 꼴 방관하는 것도 아니고 망치라고 옆에서 같이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제 앞에서 선배 소리가 나옵니까? 사람이 염치라는 게 있어야죠!”
“재희, 너까지 왜 이래!”
보다 못한 선경이 재희를 끌어 앉혔다.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석건이 재희에게 고함을 질렀다.
“너는 지연수 죽고도 정신을 못 차리냐? 걔 왜 죽었는지 내가 알겠다! 너 그딴 식으로 위아래도 없이 사니까 맛 좀 보라고 그런 거야, 이 새끼야! 세상 무서운 줄 알라고!”
지연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얼음을 뒤집어쓴 듯한 감각이 전신을 지났다. 찰나에 머릿속에서 모든 단어들이 지워졌다. 무의식적으로 말아 쥔 손끝이 새하얗게 질린 것도 모른 채 재희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재희의 얼굴에 석건이 멈칫했다.
“심 국장!”
선경이 즉시 목소리를 높였다. 석건도 아차 싶었는지 바로 기세가 한풀 꺾여 입을 다물었다. 재희의 팔을 잡고 있던 선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듣자듣자 하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아니, 저는 강 피디가 버릇없이 말을 하니까…….”
석건이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선경이 몹시 화가 난 투로 석건을 다그쳤다.
“버릇이 있든 없든 지금 그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야?”
“국장님, 그러면 이게 지금 일개 평피디가 편성국장 앞에서 보일 태도는 맞습니까?”
석건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일개 평피디?”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은 선경이 미간을 누르고 있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야, 심석건.”
“……네.”
조금 전과 전혀 딴판인 선경의 말투에 석건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선경은 시사보도국에 여자가 다이아몬드보다 귀하다고 하던 시절부터 자력으로 여기까지 생존해 온 사람이었다.
워낙 성격이 강하기로도 유명한 데다, 같은 국장급이라도 석건보다 몇 기수가 선배였고 커리어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대였다. 석건이 기가 죽는 건 당연했다. 선경이 석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강재희가 일개 평피디면, 너는 일개 평기자일 때 회사 위해 한 게 뭐야?”
“선배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수그러든 석건이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국장님이라는 호칭도 슬그머니 선배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선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얘는 여태 지 몸 부서져라 일하면서 회사 간판 프로 만들었어. 그런데 넌 국회 들락거리면서 정치질 한 거 말고 회사를 위해 한 게 대체 뭐냐고. 정치부 기자가 정치하라고 만든 자리야?”
선경은 대꾸하지 못하는 석건에게 비아냥대며 되물었다.
“배때기에 기름기 껴 보니까 귓구멍도 막혔나, 왜 대답을 못 해? 내가 너 국장 대접 해 주니까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니?”
“선배님, 그런 게 아닙니다.”
석건이 황급히 변명했다. 그러나 선경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사진 등에 업고 아주 재미가 좋아? 너 강재희 불러 달라 아침부터 쳐들어와서 하도 지랄을 하니까, 내가 그 꼴 계속 보기 싫어 한 번 참고 얘 불러 줬어. 그러니까 너 보기에 백선경이 진짜 호구 같지? 국장도 호구로 보이는데 일개 평피디 강재희는 얼마나 만만해. 안 그래?”
기가 질린 석건이 입을 다물었다. 선경이 석건에게 내뱉었다.
“가서 전해. 강재희하고 서정언 건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그 말에 석건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윗분들이 직접 인사위원회 열겠다고 하셨습니다. 선배님 권한이 그렇게까지…….”
“이 새끼가 어디서 자꾸 선배님 선배님이야!”
선경이 대번에 석건의 말을 끊으며 고함을 질렀다.
“선배라고 부르지 마! 선배들 알기를 뭐같이 아는 새끼가 선배 소리는 아주 잘도 하네. 내가 너 심 국장, 심 국장 하는 거 대접하려고 그런 줄 알아? 너 같은 후배 두기 싫어서 국장 소리 붙이는 거야, 이 새끼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는 말 못 알아들어?”
선경이 더 듣기도 싫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석건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꾸물거리다 선경이 뭐하고 있어, 하고 다시 한 번 버럭 소리를 치자 후다닥 자리를 떴다. 재희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탁자 위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쉬운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너무 흔했다. 그런 것에는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찔러 오는 말은 견디기 힘들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는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는 건 진작부터 안 사실이었다. 그러나 울고 싶은 기분인 건지,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인 건지도 판단이 되지 않았다.
“재희, 너 괜찮아?”
선경이 묻자,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네,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상대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는 말은 이미 수만 번쯤 반복한 기만이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익숙해졌다고 믿었지만, 이럴 때면 자신의 얄팍함에 속이 차가워졌다. 전혀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재희는 문득 그런 것을 생각했다.
가만히 재희를 보던 선경이 이마를 짚었다.
“저 개만도 못 한 새끼 정말, 내가 저 새끼 언제 한 번 조져 버릴 거야. 진짜로.”
“죄송합니다. 괜히 국장님까지 피해 보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뭐가 죄송해, 죄송하긴. 잘 했어.”
소파에 등을 묻은 선경이 앞에 놓여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짧은 정적이 떠돌았다. 그런 말들은 이미 무의미했다.
힘을 가진 건 그들이었고, 이쪽에서는 손발이 묶인 채 때리는 대로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재희는 만일 이 자리에 다른 이사진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선경 역시 이런 식으로 자신의 편을 들 수 없었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심석건 말 사실이야?”
침묵하던 선경이 묻는 말에 재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아직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서 피디 출근하면 경위 자세히 물어봐야 알 것 같은데요.”
“정언이 지금 취재하는 건 뭔데?”
재희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선경이 곧 아, 하며 웃었다.
“말하기 곤란하다, 알겠어. 내가 캐묻는 거 월권이지. 그런데 일단 윗선에서 계속 얘기가 나오니까…… 이걸로 괜히 트집잡히는 건 곤란하잖아. 이따가 정언한테 경위 자세히 물어보고, 진짜 쌍방 폭행이었는지 영업 방해 사실이 있었는지 파악해서 알려 줘. 걔도 물정 모르는 애가 아니라 그랬을 리가 없을 거 같긴 한데.”
“만약에 그런 사실 있었으면 어제 바로 보고 들어왔을 겁니다.”
“그렇지.”
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잠깐 공기가 가라앉았다. 먼저 그 정적을 깬 건 선경 쪽이었다.
“힘이 없어서 미안하다. 뭐 어떻게 해야 될지 솔직히 나도 지금 잘 모르겠어. 자리에 미련 있는 거 아니고, 유동욱 사단 운운하면서 지랄하는 놈들 꼴 보기 싫어서라도 내가 나가면 그만인데…… 내가 나가면 남은 사람들은 또 어떡하나 싶고.”
“그런 놈들한테 져 줄 생각부터 하시는 거 국장님답지 않은데요. 그리고 국장님이 미안하실 게 뭐가 있다고요. 나쁜 놈들은 따로 있는데 왜 사과는 안 해도 되는 사람만 합니까?”
재희의 말에 선경이 힘없이 웃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있잖아, 재희. 내가 여기서 삼십 년을 일했어. 내 인생을 절반도 넘게 바쳤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여자로서의 행복, 그런 건 예전에 이미 다 포기했어. 여기가 내 전부란 말이야. 그렇게 일하면서 내가 가졌던 유일한 믿음이 뭔지 알아? 역사는 퇴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항상 더 옳은 방향을 추구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닌 것 같아.”
“국장님도 나이 드셨네요, 그런 말씀 하시는 거 보니까.”
재희는 농담처럼 말했다. 선경이 쿡쿡거리며 짧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손가락 틈으로 떨어지는 머리칼 사이 희끗희끗하게 비치는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나이에 비해 열 살은 젊어 보이는 선경이었으나, 그런 그녀도 세월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