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7
57화.
“그치. 나도 늙었다. 예전에 선배들이 이런 말 하면 내가 멱살 잡고 그랬다고. 비겁한 소리 하지 말라고, 그게 변명이 될 줄 아냐고. 그런데 내가 이러고 있잖아, 이젠.”
“그럼 제가 지금 국장님 멱살 잡아 드릴까요?”
“아, 사양할게. 내가 그러라고 하면 재희는 진짜 그럴 거 아냐.”
재희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몸을 내밀자 선경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손을 내젓고는 소파에 깊숙하게 등을 묻었다.
“사장님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솔직히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많지가 않아. 아래서 공론화해 주는 거 고마운 일인데, 이미 다른 방송사도 장악 시작돼서 보도가 안 되니까 답답하다. KTBC랑 IBS 노조에서도 성명문 발표했다며?”
“네. 그쪽은 사정이 더 나쁜 것 같더라고요. KTBC에서는 아예 폐지한 자리에 라는 어용 프로그램 신설했답니다. 메인 앵커도 배기천으로 교체했는데 배기천이 아시다시피…….”
재희가 말끝을 슬쩍 흐리자 선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걔 KTBC 나가서 프리 선언하고 한선당 대변인 들어갔었지? 프리 하겠다고 나간 애를 다시 메인으로 갖다 꽂는 게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 일이야, 진짜. 사람이 없어? 족보가 없어도 유분수지.”
“네. 아나운서국에서 반발이 엄청난데 신수현 아나운서 대기발령에 그 아래로 줄줄이 감봉 처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배기천이 데스킹 권한까지 쥐고 있어서 기사를 아무리 올려도 보도를 할 수가 없다고 하던데요.”
“양심도 없는 새끼들,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나.”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다시 한 번 깊이 한숨을 쉰 선경이 재희를 마주 보았다.
“너희 팀은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고 말고가 있나요. 폐지되는 건 각오했으니까 마지막 방송까지 하던 대로 하는 거죠.”
“총파업 들어가면?”
“노조에서는 일단 손발 다 잘려도 개편 전에 총파업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국민 여론이 상당히 나쁘긴 한데, 청와대에서 어차피 레임덕 온 거 차기 정권 장악 생각하고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싶어요. 딜 없었다면 이러는 거 말이 안 되죠. 개편 즈음이 대권 시즌이라 그 전에 언론 장악 미리 끝낼 심산인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겠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선경이 한동안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나도 여러 가지로 알아볼 테니까 일단 나가 봐.”
“네.”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막 나가려는 재희를 선경이 불러 세웠다.
“재희.”
재희가 뒤를 돌아보자 선경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까 그 얘기는 마음에 너무 담아 두지 마.”
선경 나름의 위로였다.
“벌써 다 잊어버렸는데요.”
웃어 보인 재희는 국장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러나 복도의 비상구 문을 연 재희는 채 서너 계단도 내려가기 전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몸을 작게 만 재희는 무릎 위로 이마를 대었다. 몸이 떨렸다. 누군가 심장을 가느다란 바늘로 뚫은 듯한 통증이 번졌다. 이게 진짜 통증인지 환각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만일 신이 단 한 번만 시간을 되돌려 주는 대가로 목숨을 달라고 한다면 재희는 언제나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연수가 비행기를 타기 직전으로 시간을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전부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연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연수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 재희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연수의 아버지는 통곡하며 재희를 비난했다. 왜 자기 딸을 말리지 않았냐고, 결혼할 여자가 미국에 가서 몇 년을 있겠다는데 왜 그걸 가만히 뒀냐고, 너 때문에 내 딸이 죽었다고 울부짖던 그 목소리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연수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말리며 재희에게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재희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는 재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연수가 죽은 것이 자신이 나쁜 선택을 한 대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연수의 삶과 선택은 재희에게 철저히 존중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연수가 설령 결혼을 원하지 않으니 그저 곁에만 있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해도 재희는 당연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을 터였다. 언젠가 연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너는 나한테 바라는 게 너무 없어서 무서워. 그러다가 갑자기 떠나 버리는 거 아니지?」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연수가 죽은 뒤 재희는 가끔 그런 것을 생각하곤 했다. 연수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척하는 건 재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 가장 쉬운 일이었다.
재희는 연수가 더 넓은 세상에서 날개를 펼치고 싶어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수의 꿈은 재희에게 자신의 곁에 연수를 붙들어 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연수는 늘 재희에게 약속하곤 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마지막에는 너에게 돌아오겠다고. 그렇기에 연수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의 마지막은 결코 상상한 적 없었지만.
재희는 그 이후로 늘 그때 단 한 번만이라도 너와 떨어지기 싫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 곁에 있어 달라고 했다면 모든 것이 바뀌었을까 수천 번, 수만 번을 반복해 생각하곤 했다. 그것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인 것을 인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재희는 자신이 여전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끊어지지 않는 희망은 끔찍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재희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정신으로 사무실에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서성거리던 현진이 사무실에 들어온 재희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다그쳤다.
“강재희, 얼굴 왜 그래? 뭐라고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일 아니에요. 괜찮아.”
재희는 손을 젓고는 눈으로 사무실 안을 훑었다. 그새 출근해 있었는지 정언이 파티션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재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봐도 티가 날 정도인가 생각하자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진짜 형편없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정언에게 손가락을 까딱여 따라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회의실로 향했다. 영문을 모르는 정언이 회의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지금 김 피디 출근했어?”
재희가 묻자 정언이 대답 대신 재희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눈썹을 좁혔다.
“선배 지금 어디 아파요?”
“묻는 말에만 대답해. 김 피디 출근했냐고.”
자신을 잘 아는 정언이었다. 굳이 무슨 일 때문인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시선을 피하려 부러 더 냉랭하게 내뱉자 정언이 멈칫하다 대답했다.
“아직이요. 오늘 오전 반차 쓰라고 했어요. 오후에나 출근할 거예요.”
“반차 왜 쓰라고 했는데. 어제 취재 나가서 무슨 일 있었어?”
“왜요?”
“폭행으로 경찰서 간 거 사실이야?”
재희가 묻는 말에 정언이 아, 하고 이마를 짚었다.
“그것 때문에 위에서 뭐라고 해요?”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니까 왜 자꾸 다른 소리야. 사실이야, 아니야. 패싸움 나서 경찰서 갔고 영업 방해로 그쪽에서 고소하겠다고 난리가 났다는데.”
“아니, 생각을 좀 해 봐요. 나랑 김 피디 둘이서 취재 간 건데 패싸움이 말이 돼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친 정언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동안 정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재희는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그러니까 폭행은 그쪽이 한 거고, 영업 방해 사실은 없었다는 거네.”
“애초에 영업을 안 하는 사무실인데 영업 방해는 무슨…… 고소 취하 안 해주면 영업 방해로 걸겠다잖아요. 그래서 할 테면 해 봐라 그러니까 그쪽에서 먼저 꼬리 내리고 인터뷰 응하길래 합의해 준 게 다예요. 서에 합의서랑 기록 다 있을 테니까 확인해 보라고 해요.”
“그런데 그걸 위에서 어떻게 안 거야?”
“그러니까 이게 수상하잖아. 나 지금 생각났는데, 합의 얘기 나오니까 전화 한 통 쓰겠다고 했어요. 어디다 전화 걸고 오더니 바로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재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하급 용역 깡패가 직통으로 방송국 상부에 연락할 수 있는 커넥션이 존재한다는 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정언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게 당연했다.
한숨을 쉰 재희는 정언에게 물었다.
“김 피디 많이 다쳤어?”
“이마 위쪽이 찢어져서 피가 꽤 났는데 심한 건 아니고, 얼굴 몇 군데 긁혔더라고요. 혹시 몰라서 병원 갔다 오게 반차 쓰라고 한 거예요.”
“서 피디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정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재희는 물끄러미 그런 정언을 마주 보았다. 안 그래도 입사할 때부터 키는 커도 깡말라서 카메라나 들겠냐고 선배들이 놀릴 정도였는데, 요즘은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마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는 곧 말을 돌렸다.
“문서 파일은 어떻게 됐어? 업체에 맡길 거야?”
“업체에는 이미 문의했는데 프로그램하고 파일 자체에 이중으로 암호 걸린 거고, 자기들도 따로 풀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대요. 잘못하면 파일 그냥 날려야 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비용 문제는 둘째 치고 업체 보안을 못 믿겠어요. 시간이 없어서 일단 이희경 씨한테 다이어리나 뭐 그런 데 비밀번호 같은 거 적혀 있는지 좀 찾아봐 달라고 얘기는 했어요.”
“그래, 알았어.”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으며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으나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정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숙이며 물었다.
“선배, 진짜 괜찮아요?”
“괜찮아. 이따 김 피디 출근하면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하고, 그만 나가 봐.”
“네.”
석연찮은 얼굴로 대답한 정언이 등을 돌렸다. 재희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정언을 불렀다.
“서 피디.”
“네?”
정언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불현듯 그 서늘한 얼굴이 낯설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선배들에게 지기 싫어 기를 쓰던 절박하고 앳된 얼굴이 문득 거기 겹쳐졌다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걸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정언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재희는 긴 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 좀 챙겨 먹고 다녀. 애가 왜 점점 더 비쩍 말라서 그러냐.”
잠시 멈칫하던 정언이 애써 웃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하네. 선배 걱정이나 해요, 제발.”
회의실 문이 닫혔다. 재희는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감쌌다.
「너는 나한테 바라는 게 너무 없어서 무서워.」
그 말을 하며 웃던 연수의 목소리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여기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