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8
58화.
12.
민혜와 나란히 앉아 눈알이 빠질 정도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정언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는 화면의 한 군데를 가리켰다.
“어, 맞아요. 이 사람 맞네.”
정언의 손끝에 지목된 사람은 경일용역에 찾아갔을 때 경일이 불러 왔던 남자들 중 하나였다. 정언은 그 중 가장 체격이 컸던 남자를 쉽게 알아보았다. 상생변의 최유림 변호사가 보내 준 문제의 영상이었다. 거기에는 원주민들 시위를 폭력 진압하는 용역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이게 언제 영상이라고 했죠?”
“올해 초 영상이래. 몇 달 안 된 거야. 최변이 얘네 잘 알더라고. 거기 정언 갔었다니까 아주 대경실색을 하던데? 겁도 없이 거길 어떻게 갔냐고. 질이 굉장히 안 좋대.”
“질 좋은 용역 깡패도 있나, 그럼?”
정언이 되묻자 민혜가 정언의 등짝을 철썩 후려쳤다.
“말 같은 소리를 좀 해! 그만하길 다행인 줄 알아야지 말하는 거 하고는, 진짜! 촬영 중인 거 몰랐으면 걔들이 진짜 더 큰일 냈을 거라더라. 내가 진짜 심장이 벌렁거려서 원…….”
“말로 해요, 말로.”
정언은 따끔거리는 등을 만지며 투덜댔다. 으이구, 하고 지청구를 한 민혜가 눈을 흘겼다.
“김 피디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침에 멀쩡하게 나간 사람이 저녁에 그러고 들어오는데 내가 얼마나 놀랬게?”
윤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가슴이 뜨끔했다. 어제 일이 생각난 탓이었다. 아까 선배가 이름 불러 주셔서 좋았어요. 나지막하게 말하던 윤의 얼굴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었다. 잠시 멍하니 그 기억에 빠져 있던 정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김 피디, 사람 되게 괜찮지 않아?”
민혜가 소곤거렸다. 공연히 민망해진 정언은 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얼굴이 괜찮아서 그래 보이는 거 아니고?”
“물론 부정하진 않지만! 그거 빼고도. 처음엔 진짜 걱정했는데 일도 너무 열심히 해서 예뻐 죽겠어, 아주. 내가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정언 잘 챙겨 주는 거고.”
그런 것이 남들 눈에도 보일 정도인가 생각하자 어쩐지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자신을 잘 따르는 후배를 만나 본 적 없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윤 같은 타입은 처음이었다.
최근 윤의 행동이 동경이라거나, 존경이라거나, 동료애라거나 하는 말로 적당히 포장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는 건 정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챙기고 걱정하고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일은 정언에게 매우 낯선 것이었다.
선배가 오해하면 그게 뭐 어떠냐고 화를 내던 윤을 떠올리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자각 없는 다정함이 지나쳐서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윤의 그 다정함이 모두에게 똑같지 않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깨닫는 건 왠지 불편했다.
“내가 애예요, 누가 챙겨 주게?”
“애라야 챙겨 주니? 공자님이 마흔이면 불혹이랬는데 다 거짓말이야. 우리 남편 아직도 매일 나 찾으면서 넥타이 어디 있어? 반찬 뭐 해 놓고 갔어? 이러는데 이건 뭐 애가 몇인지…… 사람이 불혹이면 집에 와이프가 있든 없든 안 흔들리고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 되는 거 아냐?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누가 안 챙겨 줘도 되는 게 아니다, 진짜로.”
신세 한탄을 한 민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없이 웃은 정언은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열한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어제는 괜찮다고 하더니, 아침에 병원 들렀다 오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통에 내심 걱정이 된 건 사실이었다. 몸싸움이 심했기에 보이는 상처 말고도 다친 곳이 더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정언 역시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다 쑤시는 판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쉰 정언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흘끔 보았다. 연락을 해 봐야 하나 잠시 생각하는데, 진동과 함께 메시지 알림이 떴다. 무심코 액정으로 시선을 주자, 윤의 이름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괜히 혼자 놀란 정언은 민혜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때마침 민혜의 책상에 놓인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정언의 곁에 붙어 앉아 있던 민혜가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어차피 파티션에 가려 안 보일 걸 알면서도 괜히 책상 밑으로 핸드폰을 숨긴 정언은 윤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 아침에 일어나니까 어깨가 좀 안 좋아서 병원 갔다 왔어요. 죄송해요
― 지금 출근중인데 커피 사갈까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그것도 사서 갈게요.
그 메시지를 읽자 텍스트인데도 윤의 말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몇 번 반복해서 짧은 메시지를 읽어 본 정언은 답을 보냈다.
― 많이 안 좋아? 병원에서 뭐라는데?
메시지 옆의 1이 즉시 사라졌다. 뭐라고 답을 하려나 기다리는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윤이었다. 평소라면 자리에서 바로 받았을 테지만 어쩐지 민망해진 정언은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비상구 벽에 기대 통화 아이콘을 누르자 입을 떼기도 전에 윤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인대가 약간 놀란 거고 큰 문제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점심 뭐 드실래요? 커피는?』
“내 점심 메뉴 물을 정신 있는 거 보니 멀쩡하긴 한가 보네. 전화는 왜 걸었어?”
정언은 말을 뱉은 즉시 하여튼 이 더러운 성격, 하고 후회했다. 좀 곱게 말해도 될 텐데 왜 이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윤은 전혀 신경 안 쓴다는 투로 웃었다.
『운전 중이라 메시지 보내기 힘들어서요. 선배 괜찮은지 목소리도 좀 듣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정언은 전화를 든 채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런 걸 지나친 다정함이라고 포장해도 좋은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정언에게서 대답이 없자 윤이 말을 이었다.
『어제 엄청 피곤해 보이셔서 계속 신경 쓰였어요. 제가 어제 저녁은 얻어먹었으니까 점심 사려고요. 생각나는 거 없으시면 알아서 사갈게요.』
“김 피디.”
『네?』
윤을 부르긴 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이러지 말라고 말하자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들이켜는 기분이었고, 앉아서 받아먹자니 선배가 오해하는 게 뭐 어떠냐던 윤의 말이 떠올랐다. 얘는 나를 오해하게 만들려고 작정을 하는 건가,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이마를 짚었다.
“……아냐.”
『금방 도착할 것 같아요. 끊을게요.』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정언은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다 벽에 뒤통수를 두어 번 박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윤에게 계속 휘말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끼는 중이었다. 허공에 대고 한숨을 뱉은 정언은 자리로 돌아왔다.
“아니, 나 엄청 급하게 찾았는데 그새 어디 갔다 왔어? 누구랑 통화한 거야? 핸드폰도 통화중이던데.”
정언을 보자마자 민혜가 물었다. 정언은 그제야 핸드폰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민혜의 이름으로 캐치콜이 들어와 있었다. 통화 중이라 확인을 못 한 모양이었다. 그냥요, 하고 얼버무린 정언은 말을 돌렸다.
“왜 그새 급하게 찾았어요?”
“이희경 씨한테 전화가 왔어. 박규형 씨 통화 기록 뽑아서 확인했는데 마지막으로 통화한 그 번호가 연결이 안 됐잖아. 그래서 이거 누구 번호인지, 혹시 남편 핸드폰에 저장돼 있는지 확인 좀 해 달라고 그랬고. 이희경 씨가 그게 누구 번호인지 알았대.”
“뭐? 그게 누구 건데요?”
순간 머릿속에 뒤엉켰던 생각이 싹 날아갔다. 민혜가 눈을 빛내며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대고는 속삭였다.
“조창식 계장.”
“최초 발견자?”
놀라서 되물은 정언은 순간 현장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창식은 몹시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치 경일처럼.
민혜가 말을 이었다.
“그 번호가 눈에 익어서 자기도 한참 생각했는데, 남편 핸드폰 찾아보니까 그 번호가 저장이 안 돼 있더라는 거야. 어디서 봤을까 싶었는데 남편 죽은 날 조창식 계장이 전화했다는 거 기억나? 이희경 씨가 혹시나 싶어서 자기 핸드폰 통화 목록 뒤지니까 그 번호가 딱 나오더라 그거지. 다시 걸어 봐도 없는 번호로 나온대. 번호 연결 서비스도 안 해 놨고.”
정언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그 나이쯤 된 사람들이면 번호 오래 써서 꼭 번호 연결 서비스 걸지 않나? 아무래도 자기 핸드폰이 아니라 대포폰일 가능성 높겠는데. 그리고 이희경 씨가 확인했으면 확실하긴 할 텐데 이상하네요. 보통 과장이 계장보다 직급 높지 않아요? 아무리 연장자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통화를 할 수가 있어? 현장에서는 뭐가 다른가?”
“어, 그러게. 그건 진짜 이상하네?”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언은 턱을 괴며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경일용역, 창식의 수상한 태도, 직급과 맞지 않는 통화 내용…… 분명 그 사이에 자신이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비밀번호, 그게 문젠데. 비밀번호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 했어요?”
정언이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며 묻자 민혜가 실망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기는 그런 건 정말 잘 모르겠대.”
“그런 프로그램은 따로 비밀번호 찾는 시스템도 없으니 절대 안 잊어버릴 만한 걸로 했을 텐데, 그쵸? 복잡한 걸로 해 놨으면 본인도 어딘가에 힌트를 남겼을 거고.”
“그렇지. 혹시 몰라서 그래 놓은 건 이해가 가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진짜 환장할 일이다 이게.”
한숨을 폭 내쉰 민혜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먹고 해, 우리. 근데 나 교양국 장 작가랑 점심 약속 있는데 어떡하지? 김 피디는 반차 썼다며, 점심시간 지나야 올 텐데.”
“아, 난…….”
윤과 함께 먹기로 했다고 얘기하려다 뭔가 민망한 기분이 된 정언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