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59
59화.
“뭐 새삼 그래요. 알아서 먹을 테니까 걱정 말고 천천히 갔다 와요.”
“제발 끼니 거르지 말고 먹어. 나 갔다 와서 정언 뭐 먹었나 확인할 거야.”
불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다짐에 다짐을 둔 민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쭉 켠 민혜는 갔다 올게, 하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사무실이 텅 비는 건 순식간이었다.
정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는 고개를 젖혔다. 뒷골이 약간 당기는 듯한 감각은 익숙했다. 마흔 되기도 전에 고혈압으로 이승 하직하면 어쩌지, 하며 늘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떠올린 정언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재희의 빈자리에 눈을 주었다. 재희는 이번 주 방송 종편본을 체크하러 호형과 함께 종편실에 가 있었다.
문득 아까 재희가 자신을 회의실로 불렀을 때가 떠올랐다. 출근하기 무섭게 현진이 자신을 붙들고 강재희 아침부터 국장실 호출이라며 무슨 일 있는 게 틀림없다고 안절부절못하기에, 호출 한두 번 당해 보냐며 웃어 넘겼지만 막상 돌아온 재희를 보자마자 말문이 막혔다.
재희는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자신을 회의실로 불러 평소처럼 말하는 재희를 보는 내내 정언은 까닭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당장이라도 재희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재희가 자기 입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리 없었다. 미간을 구긴 정언은 두 손으로 뒷머리를 감싸며 책상에 엎드려 긴 한숨을 뱉었다.
“하여튼 뭐 하나 마음 편하게 해 주는 인간들이 없어, 정말.”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언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았다. 안으로 들어오던 윤이 정언을 발견하고는 웃어 보이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다들 점심 드시러 가셨나 봐요. 저 너무 늦은 거 아니죠?”
윤의 한쪽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 다른 쪽 손에는 테이크아웃 컵이 든 캐리어가 들린 채였다. 이마에 붙였던 커다란 반창고는 그새 티가 덜 나는 작은 반창고로 바뀌어 있었다.
윤이 자기 자리와 정언 사이의 책상용 서랍장을 빼 간이 테이블을 만들고는 그 위에 쇼핑백 안의 내용물을 꺼내 올려놓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백화점에서나 파는 고급 도시락이었다.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냥 제일 잘 나가는 걸로 달라고 했는데 괜찮으세요?”
컵라면 하나 먹여 준 사례로 받기에는 지나치게 호화로운 식사였다. 정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 너무 양심 없는 인간 만드는 거 아냐?”
그 말에 대답 대신 웃은 윤이 도시락 뚜껑을 열고는 정언에게 젓가락을 건넸다. 드세요, 하고 정언에게 먼저 권한 윤이 자신의 도시락도 열었다. 정언은 윤을 빤히 보며 물었다.
“농담 아닌데 왜 웃어?”
“너무 칼같이 그러시니까 선배랑 만나려면 회계 장부 써야 될 거 같아서요.”
순간 어딘지 모르게 뜨끔한 감각이 지났다. 싸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어쩐지 순식간에 모든 게 낯설어지는 것 같기도 한 묘한 감각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말투에 정언은 애써 침착한 척 대꾸했다.
“눈치 빠르네. 연말정산도 하는데.”
“세무사 자격증 따면 가산점 있어요?”
“있다고 하면 따려고?”
“그럴 수도 있죠.”
윤의 여상한 대답에 막 씹은 계란말이가 목에 걸릴 뻔한 것을 겨우 누른 정언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내뱉었다.
“김 피디, 1절만 하지?”
그 말에 윤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영문을 몰라 마주 보자 윤이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저 교양국 있을 때 부장님이 눈만 마주치면 잔소리를 하시니까 제가 맨날 부장님보고 1절만 하세요, 그랬거든요. 그러면 부장님이 넌 4절을 다 하고 합창에 제창까지 해도 모자라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선배가 1절만 하라고 하니까 그 생각이 나서요.”
“그래서 지금 합창에 제창까지 하겠다고?”
“하면 싫어하실 거죠?”
“할 생각이 있었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윤이 씩 웃었다. 옛말 틀린 게 없었다. 조상님들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소리를 왜 했는지 절감한 정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도시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후배들 같았으면 벌써 이게 어딜 기어오르나 하고도 남았을 게 뻔했다, 고 생각한 순간, 정언은 윤 전의 다른 후배들이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렇게 가까이 와 본 적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기야, 회사 사람을 집에 들인 것도 입사한 이래로 처음이었다. 정언은 자신이 그때 왜 윤에게 잠깐 들어왔다 가겠느냐고 물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다소 충동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충동적인, 하고 정언은 그 어절을 다시 한 번 뇌었다. 충동적인. 그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 넓고 스산한 주차장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을 때, 차 안에서 걸어가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얼굴에 불현듯 발을 붙들렸던 것이 떠올랐다.
크기에 비해 턱없이 광량이 적은 조명과 옅게 선팅된 창이 윤의 얼굴을 흐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이보다 앳된 것 같으면서도,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 보이는 그 얼굴에 정언은 때로 낯선 기분을 느꼈다.
― 그 사람이 좋으니까,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부분까지도 다 좋아요.
윤이 돌아간 뒤, 정언은 침대에 누워 그 말을 발음하던 윤을 떠올렸다. 혼잣말 같던 목소리, 소년 같은 예민함이 남은 얼굴에 남자의 표정이 머물던 그 짧은 순간. 눈앞에서 그 얼굴을 봤을 때, 그 얼굴은 마치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정언의 뇌리에 남겨졌다.
윤이 말하는 감정은 맹목적이었다. 자신은 재희에게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재희에게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 연수의 자리는 정언에게 있어 결코 넘어갈 수 없는 크레바스와 같았다.
뛰어넘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그 깊고 어두운 균열을 그저 희박한 희망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언은 그렇게 가망 없는 일에 매달리기에는 지나치게 객관적이었다.
맹목적인 감정들은 쉽게 눈을 흐렸다. 정언은 그런 무모함 때문에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동경과 호감 사이 어딘가의 경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완전히 빠져 버려서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되는 일 따위는 정언에게 불가능한 것이었다.
“선배, 괜찮아요?”
잠시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정언은 윤의 목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손을 한참이나 멈추고 있었는지, 금세 걱정하는 듯한 그 표정을 본 정언은 눈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아냐. 아까 이희경 씨한테 전화 왔었는데, 통화 목록에 남아 있던 번호가 조창식 계장 번호라고 하더라.”
윤이 웃음기를 거두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통화 녹취가 조창식 계장하고 통화한 거라고요?”
“본인이 확인했어. 박규형 씨 사망한 날 전화 온 번호가 그 번호인데, 다시 걸어 보니까 연결이 안 된대.”
“아니, 저도 일반 회사 다녀 봤는데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계장이 과장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 말이 안 돼요. 사적으로 친하다고 해도 계장이 무슨 수로 다음 승진에서는 절대 안 밀리게 해 준다고 말을 해요?”
윤이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수긍한 정언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그러니까 나도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지금. 조창식 계장 다시 만나 보는 수밖에 없겠어.”
정언의 말에 윤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쪽도 점심시간이겠죠? 점심시간 끝나고 현장 사무실로 전화해 보죠, 뭐. 있다고 하면 바로 가 봐요.”
“그 꼴 나고도 아직 용감하네.”
정언이 이마를 가리키자 윤이 손을 올려 반창고 위를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한 번 이러니까 두 번도 상관없을 거 같고 그런데요.”
“혹시 싸움 잘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는 정언에게 윤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원래 잘 모르는 애들이 용감하잖아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히자마자 돌변한 윤이 화를 내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왜 선배한테 손을 대냐고 소리를 지르던 얼굴이 뇌리를 스친 건 다음 순간이었다. 정언은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요? 입에 안 맞으세요?”
윤이 멈칫하며 물었다. 정언은 아니, 하고 대답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이 가져온 커피 중 하나를 집어 든 정언은 자신을 쳐다보는 윤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입맛이 좀 없어서. 잠깐 옥상에서 커피 좀 마시고 올게.”
“같이 가요, 그럼.”
“아냐. 나 뭐 좀 생각할 게 있어. 금방 내려올 테니까 밥 마저 먹어.”
정언은 윤의 대답을 듣기도 전,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옥상으로 올라온 정언은 제일 가까운 벤치에 앉아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닿은 피부는 차가웠으나 속에서부터 열이 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윤이 화를 내던 순간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박힌 듯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윤은 분명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열정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순간처럼, 선배가 오해하면 어떠냐고 목소리를 높이던 그 순간처럼, 그리고 이름 불러 주셔서 좋았어요, 라고 나지막하게 말하던 그 순간처럼.
―제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일하실 때 아니라도 예쁘다고 하면요?, 그런 식으로 얘기 안 하시면 안 돼요?, 선배가 오해하시면 그게 뭐 어때서요?…… 윤의 목소리로 발음하던 그 말들이 까닭 없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그러자 불현듯 모든 신경이 확 당겨졌다. 카페인을 마구 들이부은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
이건 유쾌하지 않았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걸 안 까닭이었다. 아무런 의식도 없이 어느새 타인의 선 안에 끌려 들어온 듯한 감각은 낯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두려움에 가까웠다.
단 한 장의 지도조차 없이 처음 보는 곳에 떨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