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60
60화.
“어머, 미쳤다. 이거 뭐야?”
민혜가 전화를 끊자마자 기겁하며 혼잣말을 뱉었다. 민혜는 오후 내내 진송신도시 현장 사무실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무리 전화해도 받는 사람이 없어, 도대체 무슨 놈의 사무실이 이러냐고 몇 시간째 투덜거리는 건 덤이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전화가 연결된 모양이었는데, 짧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터진 말에 곁에 앉은 정언이 고개를 내밀었다.
“왜요? 뭐라는데?”
“여직원이 받았는데 조창식 계장 퇴사했대. 언제 퇴사했냐 물어보니까 정언하고 김 피디 왔다 가고 바로 그만뒀나 봐. 이거 뭐니? 개인 연락처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그건 안 된다길래 혹시 이 전화번호 맞냐고 통화 기록에 있던 번호 불러 주니까 그거 맞대. 박규형 씨 죽은 날까지는 그 번호 쓴 거 확실하잖아. 회사에도 바뀐 번호 말 안 한 거야. 이거 뭐가 있네, 있어.”
민혜는 거의 확신범을 잡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는 사람 없나? 이희경 씨도 한두 번 통화한 게 다라면서요.”
“조창식 계장부터 찾아야겠네요.”
옆자리에서 듣고 있던 윤이 말을 보태자 민혜가 팔짱을 끼고는 한숨을 쉬었다.
“연락처도 바꾸고 튀었다는데. 수배범이면 우리가 몽타주 내보내고 경찰에 협조라도 해 달라고 하지. 이걸 어디서 찾아야 돼, 도대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언이 목을 뽑아 재희의 자리를 보았다. 종편본 체크 후 일정 회의에 들어간 재희는 자리에 없었다. 정언은 고개를 까딱해 그 자리를 가리켰다.
“선배 오면 얘기해서 이번 주 예고랑 방송에 제보 자막 넣죠.”
“뭐라고 넣게? 조창식 계장에 대해 아는 사람 제보 바란다고 해? 조창식이 전과자 아니면 그거 고소감이잖아. 나 고소는 좀 피하고 싶다.”
민혜가 벌써부터 고소장을 받아 든 사람처럼 질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정언이 그게 아니고, 하며 말을 이었다.
“통화 내용 보면 조 계장이 전달책 같지 않아요? 그 일 시킨 윗선이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통화했을 거 아냐. 그리고 우리 갔던 경일용역, 그것도 이상하잖아요. 인터뷰 따 온 거 봤죠? 용역 업체가 매일 드나드는데 어떻게 책임자를 안 만나? 현장 과장 모른다고 잡아떼는데 좋아, 많이 봐줘서 현장 과장은 모른다고 칩시다. 아무리 그래도 윗선하고 다이렉트로 줄 대는 사람이 그런 사항 모르기가 힘들지.”
“경일용역하고 조 계장이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민혜가 목소리를 낮추며 묻자 정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서로 아는 사이인 건 확실할걸요. 우리 취재 나갔을 때도 그거 가지고 조 계장이 도끼눈을 치켜뜨고 그렇게 기분 나빠했는데, 자기가 모르는 용역 업체가 매일 드나드는 걸 두고 봐? 말이 안 되지.”
“그건 그러네. 제보 요청 뭐라고 할 건데?”
“신도시 건설 현장에서 불법 용역에게 피해 본 사례 제보 받는다고 내보내죠. 모든 현장 사람들이 다 상황 안다는 거 불가능하니까. 현장 인부들은 어제 왔던 사람 오늘 안 올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데 그때마다 그렇게 민감한 사항 설명 안 할 거 아니에요. 진송신도시 특정한 거 아니니 뭐라고 하기 힘들 거고, 혹시 뭐 또 걸리는 내용 있으면 아껴 놨다가 다음 아이템으로 쓰고.”
“다음 아이템이란 게 있겠니?”
민혜가 서글픈 얼굴로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정언이 눈을 흘기자 민혜는 알았어, 알았어, 하며 얼른 방금 전의 농담을 수습했다.
“강 피디도 그 정도면 오케이할 거 같은데…… 아우, 나 강 피디 얘기하니까 할 말 있는데, 진짜. 나 정말 속상해 죽겠다, 정언.”
민혜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발을 굴렀다. 의아한 얼굴을 한 정언이 민혜를 보았다. 민혜가 막 뭐라고 운을 떼려 하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며 재희가 들어왔다. 그러자 민혜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은 무심코 재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재희는 평소보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으나,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책상에 내려놓은 재희가 말했다.
“지금 있는 사람들 별일 없으면 간만에 저녁 회식이나 할래? 강요는 아니고, 가고 싶은 사람들만.”
“내가 지금 뭐 들었냐? 강재희가 먼저 회식하자고 한 거 맞아?”
이어폰을 꽂고 있던 현진이 한쪽 귀의 이어폰을 빼며 되묻자 재희가 대꾸했다.
“법인카드 써야 돼서 그래. 위에서 우리 회식비 너무 적게 쓴다면서 예산 올린 거 문제 있다고 난리가 났대. 돈 안 쓴다고 지랄하는데 뭐 어떡해, 쓰라는 돈 써야지.”
“소고기 먹자, 그럼. 쓰라는데 안 쓸 이유가 뭐야? 요 앞에 우설 가자, 우설.”
우설은 회사 근처의 소고기집으로, 보통 회사원 월급으로는 정말 일 년에 한두 번 큰맘 먹고 가야 할 만한 집이었다. 신이 난 현진의 말에 저만치에서 희림이 손을 들었다.
“재청합니다!”
“법인카드로 회식한다니까 대번에 우설 가자는 거 봐라. 돼지고기나 좀 구울까 했더니 성에 안 차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웃은 재희가 문 앞에서 벌써부터 설레는 표정을 하는 성옥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작가, 전화해서 몇 시에 예약되는지 물어봐. 지금 몇 명인지 인원수 세서. 프리뷰 하시는 분들도 편집실에 있으면 다 같이 가자고 하고.”
“알겠습니다!”
다 죽어 가던 성옥이 갑자기 팔팔해져 경례까지 붙이며 눈으로 재빨리 사무실 안 사람 수를 세었다. 정언이 피식 웃으며 몸을 뒤로 젖히다 아, 하고는 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김 피디 온 이후로 우리 회식 한 번도 안 했지?”
“어머, 웬일이야.”
민혜가 손뼉을 딱 치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윤은 그제야 자신이 환영회 한 번 없이 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지금 에서 신입 환영회를 한다는 건 상 당한 집에서 잔치 여는 꼴이나 다를 바 없을 것 같기는 했다.
민혜가 재희 들으라는 듯 혀를 차며 팔짱을 끼었다.
“회식 싫어하는 강 피디 덕분에 우리가 이 귀한 신입 환영회도 못 열어 주고 말이야.”
“어,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합시다.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상황이 그랬던 거지. 김 피디가 진짜인 줄 알잖아.”
재희가 즉각 반박했다. 그새 전화를 걸었던 성옥이 끼어들었다.
“지금 자리 있대요. 십 분 있다 간다고 예약 걸어 놨어요.”
“이 작가 성질 급한 거 봐. 내가 회식하자고 했다가 말까 봐 지금 당장 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재희가 다들 일어나라는 손짓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적당히들 먹어. 하루 사이에 소고기 먹는다고 법인카드로 몇백 긁으면 나 또 깨지니까.”
“깨지는 거 겁내는 강재희 신선하네. 알아서 먹을 테니까 빨리 가지?”
현진이 제일 먼저 가방을 들고 작가들을 양떼 몰듯 몰아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민혜도 카디건을 걸쳐 입고는 정언과 윤에게 얼른 가자는 손짓을 했다. 윤은 정언의 팔짱을 끼고 가는 민혜 뒤에서 몇 걸음 떨어져 두 사람을 따라가며 정언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언의 집에 갔던 날 이후, 윤은 자신이 정언에게 끌린다는 것을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 삶의 모든 순간을 알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의 감정은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언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할 의도는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싶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윤은 그런 것을 능숙하게 숨기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쉽게 진심이 보이는 말과 행동을 억지로 감추는 건 윤에게 맞지 않았다.
“아직 쌀쌀하네. 일은 좀 할 만해?”
까만 단발 아래 얼핏 드러나는 창백한 목덜미에 눈을 두고 있던 윤은 갑자기 곁에서 들린 낯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퍼뜩 고개를 돌렸다. 재희였다.
“아, 네.”
“취재 나갔다가 다쳤다며. 병원 갔다 왔다더니 괜찮고?”
“그냥 살짝 긁힌 정도라서요.”
윤은 거의 반사적으로 이마에 붙인 반창고 위를 만지며 멋쩍게 대답했다. 다행이네, 하고 고개를 까딱인 재희가 어느새 저만치서 앞서가는 정언을 슬쩍 턱으로 가리켰다.
“서 피디가 까칠해도 애는 진짜 괜찮아. 저만한 애 드문데. 남자였으면 벌써 내 밑에 안 있고 다른 데서 메인 되고도 남았을 거라 아깝지.”
담담한 말투였으나 그게 흔한 인사치레 따위가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쌓였을 감정은 두텁고 단단해 윤은 그 말의 결을 쉽게 짐작하지 못했다. 아끼는 후배, 훌륭한 동료, 그리고…… 일반적인 감정들 사이의 어떤 특별함이 어렴풋하게 그 단어들 사이에서 반짝였다.
“몇 년이나 같이하신 거예요?”
윤의 물음에 재희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서 피디랑? 서 피디 입사할 때부터 내 부사수였으니까 올해 7년 차겠네.”
“그때는 팀 분위기가 지금보다 더, 그…….”
윤이 머뭇거리며 단어를 고르는 사이, 윤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는지 재희가 말을 끊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 나도 성격 좋은 편은 아닌데 우리 선배들은 완전 군대식이었거든. 그런데도 서 피디가 엄청 잘 버텼어. 선배들이 툭하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집이나 가라고 뭐라고 했다고. 선배들끼리 모이면 맨날 쟤는 여자애가 왜 저러나 모르겠다고, 적당히 지는 척 숙이고 들어오면 귀여워해 줄 텐데 죽어도 안 지려고 들어서 밉상이라고 그랬으니까.”
“그건 좀 그런데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는 윤의 얼굴에 재희가 웃었다.
“그치.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 되게 구식이었어. 서 피디 예쁘잖아. 다들 내심 힘든 일 하지 말고 좀 우는 소리 하면서 애교나 떨면 잘 봐주고 어떻게 좀 해 볼 텐데 싶었던 거지. 그런데 뭐, 보다시피 그런 성격 못 되니까 손해 많이 봤고.”
재희의 말에는 일종의 애정 같은 것이 있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망 없는 일에 매달리는 거 취미 없어, 하고 말하던 정언의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그러나 절대 가망 없다고 단정하기에는 재희가 정언을 남다르게 여긴다는 것이 윤의 눈에도 선했다. 자신의 눈에도 보이는 걸 정언이 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윤을 슬쩍 본 재희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했다.
“왜, 김 피디 취향은 아닌가? 별로 안 예뻐?”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당황한 윤은 황급히 그 말을 부정했다. 재희는 그런 윤을 빤히 보다가 다시 먼발치의 정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