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61
61화.
“편한 길 두고 돌아가는 스타일이라 가끔 답답하긴 한데…… 아, 뭐야. 남의 부사수한테 사수 뒷담 까고 있네, 지금.”
뭐라고 더 말하려던 재희가 금방 열없는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빨리 가자, 하며 윤의 등을 밀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가운데 앉아 있던 현진이 재희에게 자기 옆자리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알아서 다 시켰으니까 앉아서 먹고 카드만 긁어.”
“한 작가님 원하시는 대로 다 해요, 알았으니까.”
재희가 현진 옆에 비워 둔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윤은 문 쪽의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 끝에서 정언이 민혜와 뭐라고 계속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재희가 들어서자 정언이 잠깐 재희 쪽으로 시선을 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고기 한 점도 안 먹었는데 속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질투. 불현듯 뇌리를 스친 단어가 있었다. 윤은 지금 자신의 기분이 그것에 제일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속 좁은 놈 같아 기분이 조금 더 가라앉았으나 그렇다고 그걸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 뭐 나 속 좁은데 어쩌라고, 하고 속으로 투덜거린 윤은 부러 정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굿하는 기분을 느끼는 건 윤에게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정언이 조금만 덜 칼같이 굴었다면, 조금만 더 쉽게 선을 넘어오게 했다면, 그리고 조금만 덜 어려운 사람이었다면, 하고 생각하던 윤은 혼자 입구가 풀린 풍선처럼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서정언이 아니었을 테고, 자신이 이러지도 않았을 테니 그런 가정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형, 많이 먹어요. 유혈 사태 났을 땐 피 보충하게 많이 먹어야 돼요.”
곁에 앉은 지혁이 그새 불판 위에 기계처럼 생등심을 올리며 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유혈 사태는 무슨, 하고 민망한 얼굴로 웃자, 지혁이 올리자마자 익기 시작하는 고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소곤거렸다.
“그래도 형은 정언 선배하고 잘 다녀서 우리가 다 완전 대단하다 하는 거 알아요? 나도 입사하고 선배 밑에서 딱 한 달 있었는데 와, 진짜 한 달 되던 날 강 피디님한테 가서 술 먹고 울었잖아요. FD, AD 안 뽑으셔도 되고 저 혼자 다 해도 되니까 제발 선배님하고만 일 안 하게 해 달라고. 말이 씨가 돼서 진짜 그러고 있긴 한데 차라리 지금이 낫다니까.”
“왜?”
“빡센 것도 빡센 건데 진짜 칼 같잖아요. 차원이 달라요.”
지혁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으으, 하며 진저리를 쳤다. 윤은 피식 웃었다.
“배우는 거 많잖아.”
“어휴, 나 여기 딱 2년만 있다가 옮길 거예요. 선배들 다 대단한데 난 저렇게 못 살아.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최고지. 어떻게 된 게 여기 선배들은 죄다 굵고 짧게 살려고 그래.”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네, 하고 생각한 윤은 매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건넸다.
“너 사람 인생이 진짜 어떻게 될지 한 치 앞을 모른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여기 와서 팀 회식에 앉아 있을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간혹 아, 나도 예전 언젠가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 하고 깨달을 때마다 그게 최소한 몇 십 년은 된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지혁이 낄낄 웃고는 고기를 뒤집었다.
“하긴, 나 형이 게시판에 글 쓴 거 보고 내가 쓴 글도 아닌데 심장 쫄려 죽을 뻔했잖아요. 댓글 달아 놓고 이걸 지워, 말아 밤새 한 백 번은 고민했을걸요. 근데 다인이 얘기 들어 보니까 형 원래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다인이랑 알아?”
윤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다인은 팀에서 자신과 함께 일했던 입사 동기였다.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동창이라 전부터 알아요. 형 오고 나서 다인이한테 형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다인이가 자기는 동명이인이겠지 그랬대요.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기도 게시판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 그러던데요.”
턱을 괴고 지혁의 얘기를 듣던 윤은 내심 삐져나오는 한숨을 참았다. 사람이 가끔 정말 그렇게 눈이 돌아갈 때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술김에 갑자기 정의감이 차오른다거나, 무서운 줄로만 알았던 선배한테 한순간 빠져 버린다거나…… 후자에 생각이 미치자 마시지도 않은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지혁이 술을 권했으나 윤은 아냐, 나 진짜 입에도 못 대, 하고 거절하며 음식을 먹는 내내 정언 쪽을 흘끔거렸다. 소주 반병 먹고 재희 앞에서 취한 꼴을 보였던 날도 느꼈지만 정언과 대작한다면 자신은 십 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최소한 한 병 반은 이미 스트레이트로 비운 것 같은데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정언에게 저도 모르게 한참 시선을 주자, 고기를 먹던 지혁이 윤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작가님이랑 정언 선배가 우리 팀 최고 주당이에요.”
“그래?”
“선배랑 술 먹고 집에 걸어서 들어간 기억이 없다니까. 나는 다음 날까지 인사불성인데 선배는 저러고 새벽에 공원 산책로 코스 뛰고 와서 출근한대요. 그걸 누가 이겨. 애인 없는 거 이유가 다 있지.”
“뭘 또 그렇게까지…….”
공연히 항변하고 싶은 기분이 되어 기어이 한마디를 보태자 지혁이 이 형이 뭘 모르네,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시간이 남아야 애인을 만나지. 하루 종일 일하고, 밤새 술 마시고, 새벽에 뛰고, 그러고 또 출근하는데 어디서 남자를 만나요. 그리고 뭐 정언 선배가 강 피디님 좋아하는 거 다 알잖아.”
지혁의 마지막 말에 그 앞의 내용이 전부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윤이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깜빡이는 것을 본 지혁이 아, 하고 자기 머리를 치더니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 형은 교양국 있다 와서 모르겠다. 정언 선배 원래 유명해요, 예전부터. 근데 뭐 강 피디님이랑은 안 되잖아. 본인도 그거 잘 알고. 그런 거 보면 쿨하긴 쿨해요. 사람 마음이 그렇게 무 자르듯 되나 싶은데 속이야 몰라도 겉으로는 딱 선 그으니까.”
“……왜 안 되는데?”
“뭐가요? 아, 강 피디님?”
난처한 표정을 한 지혁이 재희 쪽에 슬쩍 눈을 주었다. 재희는 아까부터 음식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말없이 술만 홀짝이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소리 탓에 들릴 리 없을 텐데도 지혁은 속삭이다시피 말했다.
“거의 유부남이니까 뭐.”
“결혼하셨어?”
그건 처음 듣는 얘기라 놀란 윤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지자 지혁이 황급히 소리 낮추라고 손을 휘적였다. 다행히 아무도 이쪽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혁이 쉿, 쉿, 하며 몇 번이나 손가락을 입가에 대더니 소곤거렸다.
“식장 다 잡아 놓고 청첩장까지 돌렸는데, 식 올리기 딱 보름 전에 예비신부가 죽었어요. 그분이 우리 보도국 기자였단 말이에요. 근데 워싱턴 특파원 결정돼서 미국 지사 갔다 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가 났대요. 그게 몇 년 된 일인데. 그러고는 뭐, 강 피디님 딱 세 달 있다 복귀했고 그 뒤로는 완전 수도사 생활 하신다고. 조선시대였으면 열부문도 세웠지. 다른 여자한테는 진짜 눈 한 번 안 돌리니까. 강 피디님 은근 인기 많은데 그거 아는 방송국 여자들은 엄두도 못 내요. 죽은 사람을 어떻게 이겨.”
완전히 굳어 버린 윤은 지혁의 말을 들으며 눈만 깜빡였다. 윤에게 그건 이해의 영역을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죽은 예비신부 이야기도 충격이었으나, 재희가 단 세 달 만에 다시 이 자리로 복귀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언이 가망 없다고 단정했던 것이 그 때문이었음을 깨닫자 심장 부근이 차가워졌다. 절대 넘어갈 수 없는 선이란 건 어떤 걸까. 존재보다 강력한 부재, 여상함 뒤로 감춘 끝없는 공동…… 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정언 역시 그렇게 ‘가망 없는’ 상대일지 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어, 야, 강재희! 너 지금 어디 가는데!”
그때 현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놀란 윤이 고개를 돌리자 재희가 잠깐만, 하고 끝이 뭉개지는 발음으로 뭐라고 두어 마디를 더 중얼거리더니 비틀대며 음식점 밖으로 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찌푸린 현진이 혀를 찼다.
“저거 저 뭐 먹지도 않고 계속 술만 마시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쟤 취했지? 왜 그렇게 술만 먹나 했더니 무슨 일 있었나?”
“아우, 몰라! 강 피디 진짜 어떡하니, 나 속상해 죽어!”
곁에 앉아 있던 민혜가 취했는지 양 볼이 다 빨개져서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곁에 앉아 있던 정언이 깜짝 놀라 얼른 민혜를 붙들었다.
“작가님, 왜 이래요. 괜찮아요?”
그러자 민혜가 울먹이며 정언을 붙들고는 알아듣기도 힘들 만큼 코가 잔뜩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까 점심에 교양국 장서라 만났잖아.”
“그치, 점심 약속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게 왜요.”
정언이 어린애 달래듯 민혜를 달래며 물었다. 민혜가 눈물에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냅킨으로 몇 번이고 닦고는 훌쩍거렸다.
“아침에, 아침에 강 피디 국장님 호출 있었잖아, 그거.”
“그랬다면서요.”
“거기서, 심석건 이 개새끼, 내가 아주 만나기만 하면 그 새끼 머리털 다 뜯어 버릴 거야. 그 새끼가 거기 왔는데, 걔가 강재희보고 그랬대. 지연수 죽은 거 너 싸가지 없어서 그런 거라고, 세상 무서운 줄 알라고! 심석건 그 새끼가 아침에 교양국 와가지고 박 부장 앞에서 그거 자랑이라고, 지가 강재희한테 그 소리 하니까 강재희가 한마디도 못 하더라고 떠벌리더래. 내가 그 소리 듣고 진짜, 아우 나 몰라 정말…….”
민혜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 엎드려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찬물을 쏟아부은 듯 짧은 침묵이 흘렀다. 현진이 완전히 굳어 버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