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야, 송민혜 지금 뭐라고 그랬어? 심석건 그 새끼가 강재희보고 뭐라고 그랬다고?”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현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이런 씹새끼가, 하고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하얗게 질린 정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멍하니 앉아 있던 윤은 지혁이 팔을 툭툭 치는 손길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지혁이 입모양으로 형 빨리, 하며 나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은 서둘러 정언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새 어디로 간 건지 재희도, 정언도 보이지 않았다. 윤은 가게 앞 도로로 뛰어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거의 반 블록쯤 앞에서 달려가는 정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윤은 정신없이 그 뒤를 쫓아 뛰었다. 정언이 멈춘 곳은 문을 닫은 상가 앞이었다. 재희가 주저앉은 채 무릎에 완전히 얼굴을 파묻고 앉은 모습이 보였다. 정언이 숨을 몰아쉬며 재희의 어깨를 흔들었다.
“선배, 선배!”
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명이 거의 다 된 가로등이 깜빡여 작게 웅크린 재희의 발치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재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몇 번 더 재희의 어깨를 흔들어 보던 정언이 그 맞은편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미안.”
재희가 나지막이 말했다. 끝이 약간 뭉개지는 발음은 취한 건 확실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희를 물끄러미 보던 정언이 내뱉었다.
“뭐가 미안한데요.”
“전부 다.”
“선배 나한테 미안한 거 없잖아.”
“그냥, 전부 다 미안해…….”
재희가 쿡쿡 웃었다. 동그랗게 말린 어깨가 떨렸다. 윤은 정언이 그 어깨로 손을 뻗었다가 닿기 직전 움직임을 멈추는 것을 보았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은 차마 재희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손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 장면은 마치 슬로 모션처럼 윤의 시선에 들어왔다.
무릎을 끌어당겨 안은 팔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재희가 한참 만에 눈을 들어 정언을 보았다.
“……나 왜 이러는지 알아?”
“선배 지금 완전 취했어. 일어나요. 택시 태워 줄 테니까 집에 가서 좀 자요.”
정언이 재희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정언의 손안에서 그 팔은 힘없이 미끄러졌다. 손이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재희는 손끝으로 겨우 정언의 셔츠 소매를 움켜쥐었다. 정언이 다시 한 번 선배, 하고 부르자 재희가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달싹였다.
“죽고 싶다, 진짜…….”
그 말을 들은 정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때 계속해서 점멸하던 가로등이 완전히 꺼졌다. 촌스러운 간판들이 거리로 색색의 빛을 쏟아 냈지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까지 밀려드는 어둠을 이기지는 못했다. 윤은 그 그림자 속에서 멍하니 두 사람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재희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얼마나 강한 사람이어야 그런 고통을 견디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재희가 이미 폐허가 된 성의 성벽만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는 걸 윤은 그 순간 직감했다. 아무것도 없기에, 누구도 들어올 수조차 없는 자신만의 성. 정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도, 창문도 없이 쌓아 올린 성벽 안으로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설령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해도 거기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타인의 선을 넘으려는 욕망을 갖는 건 그 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너머를 알고 싶다는 갈망이 사람을 움직인다. 정언은 재희의 선 너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일 터였다.
그러니 정언이 그에게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싸하게 가라앉았다.
정언의 소매 끝을 쥐고 있던 재희의 손이 스르르 떨어졌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은 정언이 웅크린 재희를 마주 보았다. 무릎으로 머리를 파묻고 완전히 어둠 속에 잠긴 재희를 응시하던 정언이 긴 한숨을 쉬었다.
정언과 재희 사이의 어둠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결코 건널 수 없이 깊은 강 같았다. 윤은 자신과 정언 사이의 어둠을 보았다. 이건, 내가 건너갈 수 있는 균열일까.
다음 순간 이성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것을 참으며 정언에게 달려간 윤은 정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윤이 거기 있는 걸 까맣게 몰랐는지, 정언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윤을 돌아보았다.
“김 피디.”
그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윤은 정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이 떨렸다. 이 공간에서 유일한 불청객이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출입 금지 구역에 우연히 발을 디딘 것 같은 기분으로, 윤은 겨우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모시고 갈게요.”
정언이 대답 대신 윤을 올려다보았다. 뛰느라 빨라진 심장의 비트가 가라앉지 않았다. 윤은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어둠 속에서 정언의 눈은 더 깊게 보였다. 아주 천천히, 모든 감각이 지워졌다.
거리의 빛과 소리와 냄새가 서서히 사라지고 정언만이 거기 남겨졌다. 다른 것은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윤은 그 어둠 속에서 가망 없는 일에는 매달리지 않는다는 정언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희박한 확률에 걸어 버린 이 감정을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불가해한 감정들이 녹아들었다.
13.
전날 밤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아침에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장마처럼 기세 좋은 빗줄기는 아무래도 하루 종일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창가에 선 정언은 유리창에 부딪치며 미끄러지는 빗방울이 그리는 궤적을 눈으로 따라갔다. 불규칙한 선들은 망막 위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최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머릿속이 온통 회색으로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언은 잠시 눈을 감으며 눈썹 위 이마에 손끝을 대고 눌렀다. 눈을 감자 둔탁한 빗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아침부터 무슨 고독을 그렇게 씹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등 뒤에서 재희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놀란 정언은 뒤를 돌아보았다. 양손에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있던 재희가 오른손에 든 것을 정언에게 내밀었다.
“제일 먼저 보는 사람한테 주려고 두 잔 샀더니 딱 있네.”
정언은 컵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옅은 향이 습한 공기 속으로 빠르게 퍼졌다. 정언은 재희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잘 마실게요, 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입이 썼다.
이미 며칠 전의 일이었으나, 아직 재희를 똑바로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무너진 재희를 본 건 처음이었다. 차라리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그날, 결국 재희를 부축해 택시까지 태워 보낸 건 윤이었다.
윤에게 더듬거리며 재희의 집 주소를 불러 준 정언은 오랫동안 텅 빈 택시 정류장에 윤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윤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거리에서 연신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빛이 그 얼굴에 강한 음영을 드리웠다. 그 때문에 정언은 윤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윤의 가독 불가능한 얼굴은 며칠째 정언의 머릿속에 머물고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한 윤은 평소처럼 정언을 대했으나, 정언은 어쩐지 윤과 함께 있는 순간이 편하지 않았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그 불편함은 윤을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신도시 현장 관련해서 제보 달라고 이번 주부터 나갔지? 이 작가가 홈페이지랑 SNS에도 공지 다 한 것 같던데, 뭐 좀 들어왔어?”
재희의 물음에 생각에 빠져 있던 정언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쓸 만한 건 별로 없어요. 재미있는 얘기는 좀 있는데, 지금 이 건하고는 상관없어서…… 키핑했다가 나중에 아이템 회의 때 쓰든가 하려고요.”
“그래? 오늘은 왠지 뭐 좀 들어올 거 같은데.”
“왜요?”
“그냥.”
실없이 대답하는 재희의 얼굴을 본 정언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돗자리 깔려고? 어차피 곧 돗자리 깔고 나앉게 생겼는데 뭘 벌써 사무실에서 깔려고 그래요. 아침부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커피나 마저 드시죠.”
재희가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태도였다. 문득 정언은 민혜의 입에서 석건이 재희에게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던 것을 떠올렸다.
온몸의 피가 다 말라 버린 얼굴을 하고 있던 그날 아침의 재희를 생각하자, 아주 가느다란 바늘이 마음 어딘가를 뚫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정언은 창가에 선 자세 그대로 눈만 조금 돌려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항상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어야 하는 걸까 불현듯 궁금해졌다. 죽고 싶다는 말을 발음하던 그 순간의 재희는 아마 그 의지가 잠시 놓친 사이의 의도치 않은 부산물일 터였다. 여상한 재희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담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