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63
63화.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돌리자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며 들어선 석현이 정언과 눈을 마주치더니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언이 픽 웃자 석현이 민망한 투로 투덜거렸다.
“야, 너는 그걸 못 본 척 좀 해 주지 또 웃고 앉았냐?”
“보이는 걸 어떻게 못 본 척을 합니까?”
정언이 짐짓 나무라자 석현이 눈을 흘겼다. 자리에 풀썩 소리가 나도록 앉은 석현이 아, 하더니 갑자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거 들었어? 이번 주에 에서 녹취록 터트릴 거라던데.”
“무슨 녹취록? 누가 그래요? 지난번에 보도한 거 말고 또 있어요?”
정언이 묻자 재희가 옆에서 커피를 마시다 말고 말을 보탰다.
“김진우 앵커 인사위 회부됐을 때 이충민 선배가 그 얘기 하긴 하던데, 성 선배 청와대 쪽하고 통화한 녹취록 가지고 있다고. 그거 얘기하는 거야?”
석현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나 지금 출근하면서 영준이 만났거든. 영준이가 녹취록 얘기한 거야. 위에서 직통으로 때리는 녹취 있대. 그거 어젯밤에 데스크에서 내보내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그러네.”
“홍영준 기자? 홍 기자 얘기면 확실하긴 하겠네. 언제 하겠대?”
재희가 묻자 석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정하진 않았고, 아마 주말 뉴스에 내보낼 거 같다고는 하더라.”
“그래? 클로징 멘트 갖고도 앵커 자르는데, 그거 방송하고 무사할까 모르겠다.”
“정수창 앵커가 회의에서 자기 잘릴 각오는 돼 있다고 했대. 파업하면 아나운서국도 전체 참여하기로 합의했다고 그러고. 지금 포털에서 우리 서명운동 관련 게시물 올라가는 족족 계속 블라인드 처리하고 있다며. 그것 때문에 팀에서 어떻게 되든 일단 터트리자, 더 기다리는 거 의미 없다는 의견이 대세인 거 같더라.”
“블라인드 처리를 한다고요? 누가?”
정언이 묻자 석현이 손을 깍지 끼어 뒤통수를 받치며 혀를 찼다.
“누가 하겠어, 그걸. 윗분들이 하시겠지. 댓글 작업 들어갔는지 페북에서는 갑자기 특정 시간대만 되면 악플 엄청 달리고, 유튜브에서 서명 릴레이 영상 올리는 계정마다 블라인드래. YBS 이사진하고 정부 비판하는 블로그 포스팅마다 족족 신고 먹고. 인터넷에서는 말 많이 나오는 거 같던데 공개적으로 때릴 수가 없으니…… 미치겠다, 정말. 이 새끼들 어떻게 해야 돼?”
재희가 커피 스틱을 입에 문 채 약간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왜 나왔겠어.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때려야지 뭐.”
“펜이 아무리 강해도 총으로 쏘면 속수무책인 거 알지?”
“그러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가오 있게 죽자 이거지. 김상옥 의사3) 얘기 몰라? 엔딩이 완전 끝장이잖아. 일본 경찰 400명하고 혼자 총격전 벌인 것도 멋있지만 마지막에 왜놈들의 포로는 되지 않겠다, 이러고 자결했으니까 역사에 남은 거 봐. 그때 포로가 돼서 변절했으면 그게 뭐가 멋있어.”
재희의 말에 석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 그게 역사에 왜 남았겠어. 그렇게 가오 있게 죽기가 힘드니까 남은 거지.”
“그러니까 우린 가오 있게 죽진 않더라도 변절은 하지 맙시다. 그건 너무 폼 안 나잖아. 독립운동은 못 해도 친일인명사전 올라가진 말아야 할 거 아냐.”
“그렇지, 그건 인정한다.”
킬킬거리는 석현의 얼굴에 정언은 바람 새는 소리로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윤이 출근한 건 정언이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넨 윤이 자리에 앉았다. 정언의 책상 위에 놓인 커피로 흘끔 눈을 준 윤이 파티션 너머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커피 드시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벌써 드셨네요.”
“아, 응. 선배가…….”
대답하던 정언은 말을 멈췄다. 윤에게 재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였다. 정작 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게 다였는데도 공연히 잘못한 것도 없이 좌불안석이라, 가만히 생각하자 도리어 성질이 났다.
정언은 그날 회식 이후로 윤의 말수가 어쩐지 줄어든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 건 정언만이 아닌 듯했다. 다들 지나가며 한마디씩 김 피디 힘든가 보네, 요새 웃는 거 잘 못 보겠다, 하며 윤에게 말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윤은 아니에요, 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게 정언의 신경을 묘하게 더 긁었다. 정언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몰라 스스로도 답답해졌다. 애초에 먼저 쉽게 선을 넘은 건 윤이었다. 다가오라고 기다린 적도 없었고 끌어당긴 적도 없었다. 제멋대로 가까이 온 쪽은 윤이었는데 왜 이런 식으로 불편해지는 건 자신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모니터에 띄워 놓은 제보 게시판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언은 공연히 안구건조증을 탓하며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애초에 머릿속이 복잡해 그런 걸 눈 탓을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때 요란하게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아홉 시도 안 됐는데 벌써 누가 전화질이야, 하고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입니다.”
『서정언 피디님 계시면 바꿔 주실 수 있어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바람 가득 든 공이 튀는 듯한 말투가 낯설었다. 정언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전데요. 무슨 일이시죠?”
『어머, 서정언 피디님 맞으세요? 저기, 기억하시나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현장 오셨잖아요. 제가 그때 남자 피디님한테 명함 받았거든요.』
“진송신도시요?”
직감적으로 되물은 정언은 즉시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처음 윤과 함께 진송신도시 현장에 갔던 날, 사무실 직원들에게 명함을 돌렸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네,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어젯밤에 집에서 텔레비전 보는데 제보 달라고 자막 나와서, 생각나는 게 있어서요.』
“선생님, 성함 먼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계신 곳으로 찾아뵐 수도 있는데요. 성함 말씀해 주셔도 방송에는 안 나가니까요. 저희가 그냥 신원 확인 차 여쭤보는 겁니다.”
정언의 말에 여자가 조금 주저하다 대답했다.
『제 이름이요? 음, 저기, 장해나예요. 해가 여, 이 말고 아, 이. 근데 제가 얼굴 보는 건 좀 그렇고요, 전화로 하면 안 돼요?』
장해나, 하고 입 안으로 그 이름을 한 번 뇌어 본 정언은 퍼뜩 그날 사무실에서 규형에 대해 얘기해 준 여직원을 떠올렸다. 용민이 그녀를 미스 장이라고 불렀던 것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목소리가 비슷한 듯싶었다.
“편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제보하실 내용 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녹음 기능이 켜진 것을 확인한 정언은 바로 다이어리를 펼치고 펜을 찾아 들었다. 해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뭐 이런 얘기도 제보가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너무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계속 너무 마음에 걸려서 전화를 할까 말까 되게 고민했어요. 제가 사실은 회사를 그만둬서 이거를, 제보를 하기로 한 거거든요. 그래서 이름이나 목소리 나가는 건 좀 그런데.』
“방송 날짜는 아직 미정이고요, 그런 부분은 절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방송 나가게 되면 대역을 사용하고 음성 변조하니까요. 이름은 당연히 밝히지 않습니다.”
정언이 다짐을 두자 해나가 한참 주저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가 피디님을 믿고 얘기할게요. 있잖아요, 서온에서 용역 깡패를 써서 현장을 감시해요. 이거는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확실히 더 잘 아시는 거거든요. 다른 데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진송신도시 현장에서는 그렇게 했어요.』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순간 매일 현장에 드나드는 경일용역 차량을 촬영한 블랙박스 영상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지나쳤다.
정언은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경일용역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머, 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해나가 놀란 투로 되물었으나 정언은 대답 대신 재차 그녀에게 물음을 던졌다.
“회사가 경일용역을 고용해서 현장 감시를 하고 있다고요?”
『네. 그, 제가 서온 입사하기 전부터 지금 한 사오 년, 회사 몇 군데 돌면서 현장 사무실에 계속 파견 나와서 일하는데, 솔직히 이렇게 돌아가는 현장은 여기가 진짜 처음이에요. 용역 사람들이 현장도 그렇고, 사무실도 그렇고 계속 감시를 한단 말이에요. 밖에서는 그 십장이라고 하죠? 노무감독님. 그거 완장을 딱 차고 다니면서 그래서 외부인들은 봐도 몰라요.』
“왜 감시를 하는 거죠?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회사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뭐라고 씹나, 그거 감시하는 거예요. 그 무슨 비리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막 데모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끼리 뭐, 회사가 자재 같은 것도 속이고 그런 비리, 그런 거 막 얘기하고 그럴까 봐서.』
“자재를 속인다고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이미 분양이 됐고 건설 중인 아파트 자재를 속인다니, 이게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 우리도 보면 대강 어느 정도 알거든요. 사무실에서 발주서 이런 거 다 쓰잖아요. 입고 확인도 하고요. 저는 뭐 잡무를 하지만 그래도 단가표 이런 거 다 보고, 경리 일도 좀 하니까 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내장재, 이런 거를 원래 외부에 고지한 것보다 한 등급 두 등급 아래, 이렇게 써요. 회사 말로는 그게 관행이라고 막 그래요. 그런데 이게 단속 나오면 아주 크게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걸릴까 싶어서 미리 입단속을 하는 거죠.』
개자식들, 하고 소리 없이 중얼거린 정언은 무의식중에 구겨진 미간을 쥐고 있던 펜 끝으로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