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66
66화.
14.
“어떻게 된 게 장마도 아닌데 일주일 내내 비가 와.”
정언이 곁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와이퍼가 지나가기 무섭게 창은 곧 빗물로 뒤덮였다. 여름 한중간의 장마처럼 쏟아지는 폭우였다.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차들 사이에 서서 느릿느릿 전진하는 사이, 윤은 조수석에 앉은 정언 쪽으로 흘끔 눈길을 주었다.
희경에게 혼자 갔다 오겠다고 하자, 정언이 어차피 주말이라고 해서 출근 안 하는 거 아니니 상관없다고 같이 가자고 하는 통에 동행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이번 주 내내 정언은 그리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취재를 시작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고, 그사이 집에 들어간 게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다행히 이전처럼 갑자기 코피를 쏟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지만, 입으로 피를 토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다 그러려니 할 것 같을 정도라 내심 겁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핏기 없는 얼굴이 요즘은 더 창백했다. 민혜가 옆에서 보면 납량특집이 따로 없다며 수시로 잔소리를 해 댔으나, 그럴 때마다 정언은 아 괜찮아요, 괜찮다고, 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든 정언을 챙겨 주고 싶었으나, 정언은 그 회식 이후로 미묘하게 윤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때문에 선뜻 행동하기 조심스러워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정언이 거리를 두는 까닭을 정확히 짚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재희와의 일을 자신이 본 것 때문인지, 아니면 재희에 대한 감정을 눈치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혹은 그 모든 상황이 그저 불편하고 민망하기 때문인지.
사실 무엇이든 거기에 재희가 관련돼 있다는 건 윤에게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취한 재희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내고 텅 빈 정류장에 나란히 앉았을 때, 윤은 사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두운 거리에서 자동차가 연이어 지났다. 그때마다 헤드라이트의 빛이 정언의 얼굴 위로 명암을 그렸다. 윤은 오랫동안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언이 어쩐지 울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건 착각일까.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정언의 창백하게 점멸하던 얼굴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그날 이후로 내내 다운되어 있었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티를 안 내려고 나름대로는 애를 썼지만 보는 사람마다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건 좀 창피했다. 정언 역시 몇 번이나 정말 아무 일 없냐고 물을 정도였던 것이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렇게 묻는 게 속상해, 재희 얘기를 꺼낸 건 반쯤은 투정이었다. 그러지 말걸,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말이 튀어나온 뒤였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감정들은 위험했다. 어린애처럼 굴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윤은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시간을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있었지만 정언을 볼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얘기를 꺼냈을 때 화가 난 것 같았던 정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본 윤은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현실로 돌아왔다.
“차가 되게 막히네요. 송 작가님 제보자들한테 연락해 보셨대요?”
창가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받치고 있던 정언이 대답했다.
“몇 명 정도 통화됐대. 나머지는 인터뷰 거절했고 두 명은 다음 주에 약속 잡았는데, 하나는 지방이라 좀 멀리 나가야 될 것 같아. 다른 사람은 송 작가님이 만나 본다고 했고.”
“아, 네.”
해나에게 제보 전화가 왔던 날, 민혜 역시 SNS와 제보 게시판에 제보된 글 중 몇 개를 추려 가져왔다. 그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 몇 가지가 있었다.
세부적인 사항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으나, 회사가 현장에서 용역을 고용해 인부들을 계속해서 감시하며 항의하는 인부들을 부당 해고했다는 내용은 대부분 동일했다. 민혜가 직접 제보자들에게 연락해 진송신도시 현장인지 확인한 후 인터뷰 의사를 물었는데, 두 사람이 응해 준 것이었다.
“지방 출장 가 본 적 있어?”
잠깐 말이 없던 정언이 입을 열었다. 윤은 기억을 더듬다 대답했다.
“네, 특집 할 때 한 두세 번 정도요.”
“어디?”
“전주하고 제주도 갔었던 거 같은데요. 지방 음식 특집이었나 그래서, 거기 무슨 전통 음식 전수자 뭐 이런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하고 촬영하고 그랬죠.”
“거기 일도 힘든가?”
윤이 슬쩍 정언 쪽으로 눈을 주었다. 정언은 빗물이 흘러내리는 앞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표정은 언제나처럼 읽기 어려웠다.
“출연자가 좀 까다로울 때 있긴 한데, 그럴 때 빼고는 괜찮았어요. 촬영 자체가 어렵거나 그런 건 아니라서요.”
“여기 와서 괜히 고생하네.”
정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건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는 정언 나름의 노력처럼 느껴졌다. 굳이 정언과 어색함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두어 번 헛기침을 한 윤은 웃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여기가 훨씬 재밌어요. 부장님이 지금 저 보시면 완전 뒤집어지실 걸요. 너 그렇게 열심히 하는 놈인 줄 몰랐다고. 그때는 진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시간 되면 딱 퇴근하고 그랬거든요. 부장님이 넌 그따위로 하려면 동사무소 직원이나 하지 피디는 왜 됐냐고 맨날 뭐라고 하셨죠.”
“그런데 왜 여기서는 그렇게 딴소리 한 번 안 하고 따라와?”
“궁금하세요?”
농담처럼 되묻자, 고개를 돌려 윤을 응시하던 정언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아니. 안 궁금해.”
“저한테 궁금하신 거 너무 없으면 서운한데요.”
“요새 조용해서 걱정했더니 그럴 필요 없었나 보네.”
농담 같은 말에 대답 대신 혼잣말처럼 내뱉은 정언은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 말에 약간 놀란 윤은 불현듯 카페에서 정말 아무 일 없냐고 몇 번이나 묻던 정언을 떠올렸다.
최근 생각이 많았던 건 사실이었다. 정언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면서,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 머리가 늘 복잡했다.
정언이 재희에게 대수롭지 않게 건네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건 타고난 낙관주의자인 윤에게도 약간 괴로운 일이었다. 과민반응은 집어치우자고 자신을 달래고는 있었지만, 저절로 쓰이는 신경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재희와 자신이 정언에게 결코 같아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그랬다.
그렇기에 정언이 자신을 걱정했다고 말하는 건 뜻밖이었다. 다정한 말투는 아니었으나, 싫지 않았다. 이건 무슨 뜻일까.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심장이 낮게 뛰었다.
자신의 태도가 걱정된다는 건 어쩌면 정언도 자신을 조금쯤은 의식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만 정언에게 자신은 사무실 동료, 부사수, 좀 이상한 후배, 혹은…….
윤은 서둘러 그 이상을 넘겨짚으려는 생각을 끊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다 못해 내버려 두면 아예 봉산탈춤도 출 것 같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끓이겠다고 배추 씨부터 뿌리는 꼴이 한심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언은 빗물로 흐려지는 풍경에 눈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홍제동에 도착한 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였다. 빗줄기는 그새 더 거칠어져 있었다.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기 무섭게 우산 위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윤이 조수석 문을 열고는 정언에게 우산을 받쳐 주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내리던 정언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듯 윤을 흘끔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왜요?”
이런 건 눈치 못 챘어도 될 텐데, 쓸데없이 빠른 눈치 탓에 반사적으로 반응이 먼저 나갔다. 정언이 아냐, 하고 눈을 피하더니 현관 앞에 선 그림자를 가리켰다. 희경이었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현관 앞에서 목을 빼고 서성거리던 희경이 윤과 정언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비 때문에 차가 너무 막혀서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정언의 말에 희경이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안 그래도 비가 많이 와서 걱정이 돼서요. 지금 막 나온 거예요.”
“아, 다행이네요. 차는 어디 두셨어요?”
희경이 빌라 반대편의 공터 쪽을 가리켰다.
“이쪽에는 주차할 데가 없어서, 요 앞에 공영주차장 건물 쪽에 세워 놨거든요. 입구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자리예요.”
“그러면 저희가 갔다 올게요. 비 오는데 괜히 움직이시면 불편하시잖아요. 차 번호 좀 알려 주시겠어요?”
희경이 핸드폰으로 차 번호판을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정언에게 차 키를 건넸다. 윤은 고개를 들어 창가 쪽을 쳐다보았다. 희경의 집 베란다에서 두 아이들이 난간 사이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아와 리아였다.
윤이 손을 흔들자 수아도 손을 흔들었다. 윤의 시선을 따라간 정언이 잠시 두 아이에게 눈을 주었다.
“어머, 비 들어오는데 쟤들이…….”
희경이 그쪽을 쳐다보더니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언이 웃었다.
“얼른 들어가 보세요. 저희도 금방 갔다 올 거니까요.”
“네, 죄송해요. 제가 같이 가야 되는데, 오늘 토요일이라 애들을 어린이집에 못 보내서요.”
“괜찮습니다.”
정언이 고개를 까딱이자 희경이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 베란다에서 희경이 두 아이를 달래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언이 가자, 하며 먼저 몸을 돌렸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큰 장우산으로도 세찬 빗줄기를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했다. 곁에 선 윤은 슬쩍 정언 쪽으로 우산을 더 기울이며 걸음을 옮겼다.
규형의 차는 공영주차장 건물 입구 안쪽에 세워져 있었다. 평범한 은색 중형차로, 7, 8년쯤 된 모델이었다. 관리를 열심히 한 듯 차 외관에는 눈에 띄는 흠집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차를 발견하고 앞질러 나가며 운전석 문을 열던 정언이 뒤늦게 물이 뚝뚝 듣는 우산을 접어 든 윤을 보고는 미간을 약간 좁혔다.
“왜요?”
윤이 묻자 정언이 대답 대신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윤은 그제야 시선을 내렸다. 회색 셔츠의 오른쪽 어깨 부근이 온통 젖어 있었다. 그게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윤은 얼른 우산을 말아 갈무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다 젖었는데.”
윤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잠시 윤을 빤히 바라보던 정언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