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67
67화.
낮은 한숨을 뱉은 정언이 열린 운전석 안으로 들어가 앉아 카메라를 켜고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 문을 연 윤이 몸을 숙이며 안을 들여다보자, 정언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윤에게 주었다.
“촬영 좀 해 줘. 차 안 전부 다.”
윤이 차 내부를 찍는 동안 정언은 손을 뻗어 백미러 쪽의 블랙박스를 살펴보더니 메모리카드 삽입구를 열었다. 손끝으로 삽입구 위를 두어 번 쓸어 본 정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메모리카드가 없어.”
“누가 뺀 건가요?”
“원래 없었을 리는 없지. 누가 일부러 빼지 않으면 떨어질 리가 없는데…….”
차 뒷문까지 연 두 사람은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차 안에 딱히 눈에 띄는 물건은 없었다. 발판 매트까지 다 들어냈으나 나온 건 본래 백미러에 걸려 있었던 듯한 작은 액자와 십자수 키홀더뿐이었다.
긴 끈에 연결된 액자에는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리아가 갓 태어났을 때의 사진인 듯, 규형과 희경이 각자 품에 아이 하나씩을 안은 채였다.
끈에 같이 매달린 십자수 키홀더는 직접 만든 것 같았다. 약간 비뚠 글씨로 ‘슈아0410’, ‘리리0927’이라고 수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키홀더의 글씨를 보던 정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뭐지?”
“애들 별명하고 생일 아닐까요? 애들 이름이 수아하고 리아니까.”
윤의 대답에 정언이 멈칫하며 물었다.
“애들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박스 가져다주러 갔던 날 애들이 집에 있었거든요.”
손끝으로 키홀더를 만지작거리던 정언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누가 메모리카드를 빼 간 건 맞나 보네. 그거 빼면서 이게 바닥에 떨어진 거 같아. 걸어 두는 거라 어지간하면 떨어질 이유가 없는데.”
“그러면 핸드폰 메모리카드는 발견 못 했고, 급한 대로 차 블랙박스 증거라도 없애려고 한 걸까요?”
“주행 중 녹화 모드였으면 차 안 대화 같은 게 녹음됐을 수도 있으니까. 출장 다닌 목적지가 찍혔을 수도 있고.”
“내비라도 달아 놨으면 목적지 기록이 있을 텐데 그런 것도 없네요.”
윤은 대시보드 쪽을 살펴보며 말했다. 정언이 그 위쪽에 달린 홀더를 가리켰다.
“폰 홀더는 있잖아. 내비 앱 켜놓고 다닌…….”
순간 뭔가 생각났는지, 정언이 퍼뜩 말을 멈췄다.
“잠깐만. 박규형 씨 핸드폰에 내비게이션 앱 있었어?”
“통신사 기본 앱이라 있었던 것 같은데요.”
윤이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하자 정언이 재차 윤을 다그쳤다.
“켜 보진 않았지?”
“네.”
차 문을 닫고 다시 잠근 정언이 빨리 가자는 손짓을 했다. 입구로 나가며 우산을 펼치자, 곁에 선 정언이 두어 걸음 걷다 말고 자신 쪽으로 기울어진 우산에 눈을 주더니 윤을 툭 쳤다.
“우산 똑바로 써.”
“똑바로 쓰고 있어요.”
윤은 씩 웃으며 다시 정언 쪽으로 우산을 더 기울였다. 정언이 윤을 쳐다보다 이마를 짚었다. 말해 봐야 안 듣는다는 걸 아니, 더 말하기도 피곤한 모양이었다.
다시 희경의 집으로 걸어가는 사이, 윤은 우산 아래로 정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언은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채였다. 집 벨을 누르자 희경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갔다 오셨어요?”
희경이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하며 급히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정언은 잔을 감싸 쥐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혹시 차 가져오신 뒤로 누가 따로 손을 보거나 한 건 없었죠?”
희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없었어요. 시댁에서 왔을 때 한 번 보시고 그냥 파는 게 어떻겠냐 하셨는데 그이가 타던 차고 아직 멀쩡하니까, 제가 그냥 쓰겠다고 하고 둔 거라 그때 이후로는 누가 본 적이 없어요.”
“와서 차 안도 다 보셨고요?”
“아뇨, 회사에서 차 가져다주고 나서…… 시댁에서 보신 건 한 보름쯤 됐어요. 도련님하고 어머님이 오셔서 그냥 어디 긁힌 거 없나 그런 것만 잠깐 보셨어요.”
“차 안에는 누가 손을 댄 적이 없었다는 거네요. 블랙박스 혹시 확인해 보셨나요?”
정언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자 희경이 아아, 하며 생각났다는 듯 대답했다.
“메모리카드 없는 것 때문에 그러시죠? 그게, 사고 나기 한 이틀쯤 전이었나? 메모리카드 오류가 난 것 같다고 그래서 뺐던가, 버렸던가 그랬을 거예요. 집에서 영상이라도 백업한다고 가져왔는데 안 읽힌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블랙박스가 고장 난 건가 싶어서 수리 맡겨 본다고 했었어요.”
작은방 문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두 아이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사고. 문득 그 낱말이 작은 돌부리처럼 마음에 채였다. 아이들이 알아차릴까 싶어 돌려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희경이 이 일을 ‘사고’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였다.
정언이 그 말에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어디 따로 두신 건 아니고요?”
“그건 모르겠어요. 그러고 그냥 버렸던 것 같은데…… 중요한 건가요?”
“아, 그냥 저희가 뭐 좀 확인해 볼 수 있을까 했거든요. 핸드폰 한 번만 다시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정언은 얼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말을 돌렸다. 네, 하며 몸을 일으키던 희경이 안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저, 그런데 조 계장님은 혹시 어떻게 되신 건지 아세요? 연락이 안 돼서요.”
“회사 그만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정언의 대답에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한 희경이 안방에서 규형의 핸드폰을 가지고 나와 정언에게 건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주저하던 희경은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제가 사정이 그렇다 보니까 자꾸 이 사람, 저 사람 다 의심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제가 이런 얘기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정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희경이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가슴이 답답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저한테 작가님이 애기 아빠 마지막 통화 목록 보내 주셨잖아요. 혹시 아는 전화번호 있으면 연락 달라고요. 그런데 제가 보니까, 분명히 통신사에서 뽑아 준 목록에는 그 시간에 그 번호가 있는데 핸드폰 통화 목록에는 그게 없는 거예요. 통화 목록 지우고 이러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조 계장님 번호가 저장도 안 돼 있고…… 사무실 여직원들 번호도 다 있고 한데, 그분 번호만 딱 없는 거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자꾸 너무 안 좋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희경의 속내를 즉시 알아차린 정언이 물었다.
“일부러 지웠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네. 처음 연락해 주셨다고 하고, 저한테도 병원에서 연락 주시고 그런 분이니까 나쁘게 생각 안 하려고 하는데 상황이 너무, 좀 그러니까요. 담당 형사님한테도 혹시 몰라서 얘기해 봤는데 그냥 알겠다고만 하시고…… 부검 결과 나오고 나서는 이제 받아들이시겠냐, 사건 자체는 종결이 됐다고 보셔야 한다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맘에 너무 걸리는 거예요.”
혹시 아이들이 듣기라도 할까 싶어서인지 희경은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한 번 손끝을 만졌다. 무심코 그녀의 손으로 시선을 준 윤은 순간 멈칫했다. 희경의 손톱은 거의 다 뜯긴 채였다.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걸 한눈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의연하게 일상을 지탱하려 할수록 그 슬픔의 무게는 얼마나 가중되는 것일까.
거기 생각이 미치자 어둠 속에 주저앉아 죽고 싶다는 말을 발음하던 재희가 떠올랐다. 맞은편에 앉아 그런 재희를 물끄러미 마주 보던 정언의 모습이 되살아난 건 필연적이었다. 가슴 한쪽이 날카로운 것에 스친 듯 선뜩해졌다.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도 이렇게 괴로운데, 그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 역시 그날 밤 정언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 한숨도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윤은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말을 돌렸다.
“선배, 핸드폰 확인해 보세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언이 아, 하며 퍼뜩 현실로 돌아온 듯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켰다. 그때 방 문틈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리아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정언에게 매달렸다. 놀란 정언이 리아를 보자, 리아가 조그만 손을 뻗으며 옹알거렸다.
“아빠 거, 아빠 거야.”
“리아, 이리 와. 아빠 거 뺏으려는 거 아냐. 금방 보고 주실 거야.”
정언의 당황하는 표정에 희경이 얼른 리아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리아가 바동거리며 자꾸만 정언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희경이 리아를 꼭 안고는 아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유튜브로 동영상 같은 거 많이 보여 줘서 아빠 핸드폰만 보면 그래요.”
시무룩해진 리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윤은 얼른 자기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 앱을 켜고는 아이들이 많이 보는 동영상을 찾아 리아에게 내밀었다.
“리아, 삼촌이랑 같이 볼래? 이거 좋아해?”
음악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리아가 희경의 품을 벗어나 윤에게 뛰어왔다. 윤은 무릎 위에 리아를 앉히고는 핸드폰을 쥐여 주며 정언에게 얼른 보라는 눈짓을 했다. 잠시 윤과 눈을 마주친 정언이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앱 목록을 살폈다.
“비밀번호는 원래 안 쓰시나 봐요?”
윤은 리아를 품에 안고 시선은 핸드폰에 둔 채 귀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희경이 대답했다.
“썼었는데 귀찮아서 풀었나 봐요. 항상 애들 생일로 했거든요. 처음 화면 켤 때는 수아 생일, 앱에 비밀번호 걸면 리아 생일, 이런 식으로요. 앞에 애들 별명 붙여서 쓰면 남들이 잘 모른다고 그랬는데, 자주 입력해야 되니까 번거로워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애들 별명이요?”
“네. 리아가 처음 말문 트였을 때 언니 이름이 잘 안 되니까 수아라고 못하고 슈아, 슈아, 이랬거든요. 자기 이름도 리아라고 못하고 리, 리, 이러니까 애기 아빠가 그게 귀여웠는지 슈아, 리리, 이렇게 불렀어요. 아마 블로그에도 애들 이름 안 쓰고 그렇게 적었을 거예요.”
그때 문득 윤의 뇌리를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두 개의 비밀번호, 규형이 언제나 사용하던 것,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언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듯 달라진 눈빛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