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68
68화.
“아까 차 안에 액자하고 십자수 키홀더 있던데, 키홀더에 쓰여 있던 게 그건가요?”
정언의 물음에 희경이 놀란 표정을 했다.
“어머, 그게 차 안에 있었어요? 맞아요. 안 보여서 어디 갔나 했는데 바닥에 떨어졌었나 봐요. 저 학교에서 애들 십자수 가르치면서 재료가 조금 남아서 만들었던 건데, 그이가 그거 예쁘다고 달고 다녔어요.”
“아, 네.”
정언이 대답하며 서둘러 앱 화면에서 내비게이션 앱을 찾아 켰다. 정언은 잠시 몇 개의 메뉴를 눌러 보더니 자기 핸드폰을 꺼내 규형의 핸드폰 화면을 카메라로 찍고는 무언가를 메모했다. 바로 지도 앱으로 주소를 몇 개 검색해 본 정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최근 목적지가 다 남아 있네요. 이게 진짜 중요한 거라서, 저희가 오늘 이거 확인하러 온 거거든요.”
정언의 말에 희경이 눈을 크게 뜨더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저, 그게…… 사실 통화 목록 지워진 거 알고 너무 불안했거든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뭐가 또 없어졌으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희경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정언이 손을 뻗어 무릎 위에 놓인 희경의 손을 잡았다.
“저희가 지금 여러 가지로 취재하고 있고,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게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억울하신 거 저희가 가장 잘 압니다. 이 방송 꼭 나가게 할 거예요.”
정언은 부드러운 말이나 따뜻한 위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윤은 간혹 정언이 실은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규형의 메모리카드를 가져왔던 날, 정언이 떨고 있던 자신의 손을 꼭 그렇게 잡아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희경이 겨우 눈물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저, 그런데 요새 YBS 괜찮은 건지……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자꾸 얘기하는 거 봤는데 피디님 걱정이 돼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절대 못 건드려요. 저희 건드리면 난리 나죠.”
정언이 웃었다. 그 말을 하는 정언의 심경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기에, 윤은 부러 시선을 피했다.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에서 리아를 내려놓자, 리아가 손가락을 입에 물며 윤을 올려다보았다. 윤은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숙여 시선을 맞췄다. 리아가 희경을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윤을 가리켰다.
“삼촌 가.”
도로 시무룩해진 표정이었다. 윤은 리아를 한 번 꼭 안았다가 놓아 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리아가 고래 좋아한다며? 다음에는 삼촌이 고래 가지고 올게. 약속.”
“고래! 고래 좋아! 리아 고래 좋아해!”
고래라는 말에 리아가 윤의 손가락을 잡고는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리아, 그렇게 뛰면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했지?”
희경이 황급히 리아를 품에 끌어당겨 꼭 붙들었다. 윤이 씩 웃자 뒤늦게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이 빨개진 리아가 희경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죄송해요. 애가 아직 좀 산만해요.”
“에이, 리아 정도면 엄청 얌전한데요.”
미소를 지은 윤은 문득 작은방 문틈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다. 수아였다. 한쪽 눈만 빼꼼 내놓고 윤을 보고 있던 수아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라, 어쩐지 그게 마음에 걸렸다.
잠시 그 문틈에 시선을 주던 윤은 곁에서 자신을 툭 치는 정언의 손길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아, 저희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윤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희경도 마주 묵례를 건넸다. 정언도 희경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오지 마세요, 하고 만류하며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세워 둔 차에 타서 문을 닫자, 정언은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툭툭 박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작 이 생각을 했어야 되는데, 아 진짜…….”
“앱에 기록 남아 있었어요?”
정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 두 개만 검색해 봤는데 둘 다 한선당 의원 사무실 인근 주소였어. 내비게이션 목록까지는 생각 못 한 거 같아. 사무실에 가서 바로 확인하고, 파일도 한 번 열어 봐야겠어. 아, 진짜 나 왜 이렇게 멍청한지 모르겠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나 몰라, 도대체.”
마지막 말은 자책에 가까웠다. 한숨을 뱉은 정언이 춥네, 하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비가 와서 그런가 생각한 윤은 거의 반사적으로 히터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알아차린 정언이 윤을 막았다.
“아니, 됐어.”
가는 손가락이 손목을 잠시 쥐었다가 풀려나갔다. 다음 순간 멈칫한 윤은 정언을 마주 보았다. 닿은 손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본인은 자각조차 없는 것 같았으나, 아무래도 열이 나는 게 분명했다. 내내 컨디션이 나빠 보인 건 아마 그 때문인 듯했다.
윤은 다시 한 번 말했다.
“히터 틀어 드릴게요.”
“졸려서 안 돼. 아무튼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자.”
정언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약간 긁히는 것을 알아차린 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는 길에 집 앞에 내려 드릴 테니까 내일 다시 출근하더라도 오늘은 좀 쉬세요. 제가 가서 주소 체크하고 파일 열어 본 다음에 알려 드릴게요. 선배 지금 하루라도 쉬셔야 돼요.”
“시간 없다고 말한 거 못 들었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는 무뚝뚝했다.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으나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병원 실려 가시면 그게 더 시간 낭비예요.”
“누가 병원에 실려 간다고 이 난리야?”
“선배 지금 열 있는 건 아세요?”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정언이 놀란 듯 눈을 약간 치켜떴다. 그럴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윤은 즉시 후회했다.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차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그 침묵을 채웠다.
정언을 응시하던 윤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속에 있는 말이 전부 쏟아질 것 같아서였다. 이런 건 위험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입술 안쪽을 깨물고 있던 윤은 겨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주제넘은 거 알아요. 아는데, 진짜 너무 걱정돼서 그래요. 요새 선배 그러다 갑자기 쓰러질 것 같다고요. 주말 저녁에 쉬시는 것도 안 돼요? 뭐라도 나오면 바로 연락해 드릴 테니까 제발요, 네?”
내뱉은 말끝이 떨렸다. 창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궤적이 망막과 머릿속을 얽었다. 정언이 눈치채지 못해야 되는데 하면서도, 반쯤은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이런 태도가 정언을 더 불편하게 만들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울컥 치받히려는 감정을 겨우 누른 윤은 시동을 걸었다.
“집 앞에 내려 드리고 저 바로 사무실 들어갈게요.”
앞을 보며 말한 윤은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퍼붓는 비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잠깐 또렷해졌다 다시 흐려지는 시야에 시선을 둔 윤은 침묵했다. 마치 열이 옮은 듯 귀 끝부터 뜨거워져 정언 쪽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심장 부근을 꽉 움켜쥐었다 놓는 듯한 생경한 감각에 속이 답답해졌다.
다시 한 시간 가까이를 달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이미 날이 거의 어두워진 채였다. 창백한 주차장의 조명이 선팅된 창 너머로 흘러 들어와, 그렇지 않아도 파리한 정언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보였다.
윤은 정언의 손등 위로 창가에 맺힌 물방울의 그림자가 얼룩진 것에 시선을 주다 정언 쪽의 도어록을 풀었다. 탁 소리가 나자 손잡이를 쥐었던 정언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김 피디.”
“네.”
윤은 정언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긴 정적이 이어졌다. 정언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윤 쪽을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무감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냐. 연락해.”
정언이 차에서 내렸다. 윤은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정언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언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이쪽을 보는 정언과 잠시 눈이 마주친 것 같았으나, 그 찰나는 곧 닫힌 문 사이로 사라졌다. 핸들 위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은 윤은 두어 번 이마를 박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 * *
정언은 문득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웠다. 손을 뻗어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켠 정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너무 피곤해서 잠깐만 누워 있어야지 하다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정언은 이마와 목덜미 부근을 짚어 보고는 긴 숨을 내쉬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닿은 손끝에서부터 열감이 스몄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윤이 말하기 전까지는 열이 난다는 걸 전혀 몰랐던 게 사실이었다. 그저 이상하게 머릿속이 약간 붕 뜬 것 같고 기운이 없어,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게 고작이었다. 잦은 밤샘에 하드한 스케줄을 내내 유지하다 보면 늘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때문에 차 안에서 윤이 날카롭게 구는 걸 보고 놀란 건 당연했다. 자신이 아픈 걸 윤이 먼저 알아차려 그런 건 둘째 치고라도, 이게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인가 싶어서였다.
― 진짜 너무 걱정돼서 그래요. 요새 선배 그러다 갑자기 쓰러질 것 같다고요.
나지막한 윤의 목소리가 떨리던 것이 뇌리를 스쳤다. 모두가 비슷한 형편이라 남 걱정할 여유가 없는 팀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낯설었다. 화가 난 듯, 혹은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눈을 떠올리자 더 그랬다.
긴 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지른 정언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여덟 시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서너 시간쯤 잔 것 같았다. 드문 일이었다. 나이가 드니까 진짜 예전 같지 않네, 하고 중얼거린 정언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장마처럼 쏟아지던 빗줄기는 그사이 부슬거리는 이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리모컨을 집어 들어 텔레비전을 켠 정언은 거실의 조명 스위치를 올렸다. 때마침 의 오프닝 송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데스크에 앉은 정수창 앵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뉴스를 거의 챙겨 보지 못한 탓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알던 것보다 상당히 수척한 느낌이라, 정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김진우 앵커가 해고된 후 대타로 들어왔으니 마음고생이 어느 정도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장 정확한 뉴스, 앵커 정수창입니다. 미국의 독립 언론가, 진보 언론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지 스톤6)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아주 유명한 말이죠.』
정시 알림과 함께 텔레비전에서 수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답지 않게도 수창은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이지 스톤의 말을 인용한 수창은 아주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화면을 응시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하지만 관리들이 거짓을 유포하면서 자신들도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때, 그런 나라에는 곧 재앙이 닥친다.’ 저희는 그런 재앙을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저희들의 눈은 가려졌고, 입은 막혔습니다. 누군가 저희에게 정권의 앵무새가 되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매일 전투에 임하는 심정으로 여러분 앞에 서고 있습니다. 오늘 첫 뉴스로 현재 YBS에 가해지고 있는 언론 탄압의 실체에 대해 보도합니다. 이현림 기자, 나와 주십시오.』
침대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수창을 보고 있던 정언은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