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7
7화.
불행은 소리 없는 암살자처럼 다가왔다.
그 일이 벌어진 건 결혼식을 꼭 보름 앞둔 날이었다. 연수는 발령 전 미국 지부에 잠시 처리할 일이 있다며 워싱턴으로 향했다. 겨우 3박 4일,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이틀이니 빠듯한 일정이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연수는 공항에서 재희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그날따라 비바람이 꽤 거세게 불었다. 연수는 옷을 얇게 입어 춥다며 재희에게 투정을 부렸다. 비행기가 한 시간 정도 지연될 것 같다고 했다. 예정 도착 시간도 알려 주었다. 모든 게 평소와 똑같았다.
「금방 만나.」
연수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전 다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참, 사랑해.」
연수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았었다. 재희는 뭐야, 하며 웃었다.
그건 재희가 마지막으로 들은 연수의 목소리였다.
연수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기상 악화와 기체 노후로 인한 비행기 사고였다. 폭풍우 속에서 비행기는 제때 임시 착륙을 하지 못했다.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방송국에 사고 속보와 탑승자 명단이 들어온 순간 재희 자리의 내선 전화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 시각 재희는 반차를 내고 연수를 데리러 공항으로 가는 중이었다. 정언은 재희의 전화를 당겨 받았다.
입니다, 라는 말을 채 끝맺기도 전 건너편에서 고함 소리가 넘어왔다. 국제부의 박창신 부장이었다.
「야! 강재희, 강재희 지금 어딨어!」
「네?」
한국행 비행기에서 사고가 났다, 탑승자 명단에 지연수가 있다, 생존자가 없다…… 수화기 너머의 단어는 멀게 들렸다. 정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나가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지만 정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놀란 팀원들이 정언을 쳐다보았다. 끊어진 전화를 든 정언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새파랗게 질린 정언의 얼굴을 보고 팀원들이 왜 그래, 하고 물었다. 다음 순간 사내 메신저로 속보가 날아들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팀원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거센 빗줄기가 창가의 풍경을 이지러뜨리며 흘러내렸다. 정언은 손을 떨며 재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날따라 재희는 연락을 잘 받지 않았다. 재희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온 건 부재중 통화가 몇 통이나 들어간 후였다.
「무슨 일이야? 비 때문에 차 엄청 막히네. 이제 공항 도착했어. 운전하느라 못 받았는데.」
돌아온 목소리가 여상했다. 재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정언은 정신없이 선배, 뉴스, 뉴스요, 하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삼십 초도 지나기 전 전화가 끊겼다. 그날 재희와의 연락은 거기서 끝이었다.
재희가 공항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연수의 장례식을 마치고 일주일 뒤에 돌아온 재희는 이전과 달라 보였다. 영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사람 같았다. 재희는 돌아온 즉시 선경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재희에게 방송국은 연수와의 모든 추억이 있는 장소였다. 여기 있는 모든 순간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게 뻔했다. 그러나 선경은 그 사표를 반려했다. 원하는 만큼 유급 휴가를 줄 테니 언제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누구도 재희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희와 연수가 시보국의 유명 인사였던 만큼 사람들은 재희의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렸다. 내심 걱정하는 척 악의를 담아 자살이나 안 하면 다행이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언은 그때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그들에게 재희의 고통은 그저 남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정언은 그 일을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정언 역시 내심 재희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쩌면 재희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말처럼 최악의 선택만은 피하기를 바라는 건 당연했다.
정언은 자주 재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잘 지내냐든지, 몸은 좀 괜찮냐든지 하는 일상적인 안부 인사였다. 열 번에 한두 번쯤은 답이 돌아왔다. 잘 지내. 고마워. 짧은 답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정언은 마음 한구석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재희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대답할지 생각하면 심장 한편이 선뜩했다.
그렇게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자정이 넘어 퇴근한 정언은 자리에 누웠다. 막 잠이 들려던 찰나 핸드폰이 진동했다. 무심코 새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정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 별일 없지?
재희의 메시지였다. 재희가 먼저 연락해 온 건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 선배는요?
정언의 물음에 답은 없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정언은 바로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몇 통을 걸어도 신호음만 갈 뿐이었다. 정언이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샌 건 당연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닐까, 별일 없겠지…… 수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언은 다음 날 언제나처럼 이르게 출근했다. 재희의 생각으로 초조함에 마르는 입술을 문지르며 문을 열었을 때, 정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 서 피디. 일찍 출근했네.」
재희였다.
쌓아올린 서류 더미 앞에서 재희가 웃었다.
재희는 그렇게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획안을 체크하고 촬영 일정을 잡았다. 회의에서 지시를 내리고 끊임없이 취재원들과 통화를 했다.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았다. 늘 책상 위에 두었던 연수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든 액자까지도.
마치 신이 재희에게만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독한 줄은 알았지만 보통 독한 놈이 아니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정언은 그게 아니라는 걸 곧 알아차렸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재희의 책상 위에는 단 하나, 이전에 없던 물건이 있었다. 작은 생일 축하 카드였다. 연수가 죽기 직전 맞이했던 재희의 생일에 준 것이었다. 재희는 그것을 연수의 사진이 든 액자 위에 끼워 놓았다. 그 카드에 쓰인 건 단 두 줄뿐이었다.
난 두려움 없는 네가 좋아.
앞으로도 평생 너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길.
연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짧은 메시지는 재희에게 연수의 유언이 되었다. 정언은 그것을 본 순간 재희가 여기로 다시 돌아온 까닭을 깨달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의 눈으로 담은 세상을 연수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정언은 자신이 절대 연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상 어느 누구라도 그녀에게서 강재희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다. 존재하지 않기에 이길 수도 없는 상대. 정언은 그 강력한 부재 앞에서 깨끗하게 승복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재희가 그녀의 유언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 이상은 바란 적도 없었고 꿈꾸지도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재희는 절대 를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이상 정언 역시 다른 곳으로 갈 마음 따위 없었다.
정언은 소파에 누워 긴 한숨을 뱉었다. 팔걸이 바깥으로 걸쳐진 다리가 불편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 속에서 남은 얼음이 점차 녹아 달각거리며 움직였다. 정언은 손을 뻗어 투명한 테이크아웃 컵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기를 문질렀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대로 길이 났다. 차갑고 습한 감각이 스몄다.
곧 소파 아래로 힘없이 팔을 떨어뜨린 정언은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02.
월요일 아침부터 고막을 때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윤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럴 때의 전화가 좋은 소식일 확률은 그다지 없었다.
윤은 냉장고에 박스채로 넣어 두는 에너지 바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는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액정에 뜬 여섯 글자의 이름은 선명했다.
최진수 부장님.
긴 한숨을 내쉰 윤은 에너지 바를 한 입 씹었다. 견과류와 초콜릿이 범벅된 칼로리 덩어리가 달콤하고 고소하게 입 안에서 뒤엉켰다. 그 황홀한 하모니가 잠이 덜 깬 머릿속을 강타했다. 윤은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심호흡을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김윤입니다.”
『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너 지금 어디야? 언제 출근할 거야?』
입을 떼기 무섭게 고함 소리가 돌아왔다.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잠시 귀에서 핸드폰을 뗀 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보통 출근은 열 시까지였고, 지금은 여덟 시 사십 분이었다. 지각과는 거리가 한참 먼 시간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윤은 늘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는 편이었다. 진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전화를 해서 묻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졌다. 윤은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며 대답했다.
“아홉 시면 도착할 것 같은데요.”
『당장 튀어와, 당장!』
진수가 빽 소리를 지르더니 전화를 끊었다. 대답도 하지 못한 윤은 투덜거렸다.
“아니, 왜 자기 할 말만 하고 끊고 그러셔.”
윤은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진수가 월요일 아침부터 이렇게 화가 난 까닭이 뭔지 내심 짐작이 가는 참이었다.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 때문인 게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