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70
70화.
정언은 눈으로 거기 쓰인 내용들을 읽었다. 날짜, 장소, 품목, 수량으로 나눠진 항목 아래는 빼곡했다. 10/7, 한교, 예산 사과, 1. 10/18, 을정, 영주 인삼, 1. 10/27, 애포, 성주 참외, 0.5, 11/5, 강남, 흑산도 미역, 2…… 암호처럼 남겨진 기록들은 스크롤을 몇 번 내리도록 끝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기록은 규형이 죽기 일주일 전의 날짜였다.
“이거 지금 있는 자료랑 대조해 봤어?”
“다이어리에 출장이라고 적혀 있어도 여기엔 없는 날짜도 있긴 한데, 일단 여기 있는 날짜가 전부 출장이라고 돼 있는 건 확실해요. 목록에 있는 날짜에는 대부분 조창식 계장하고 통화한 내역 있었고요. 6개월 전까지밖에 없어서 그 전은 확인 못 했어요.”
윤은 정언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아직도 달아오른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으나, 정언은 부러 거기서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왜 어떤 건 기록을 하고 어떤 건 안 했지? 내비게이션 최근 주소는?”
“의원 사무실 인근 지역이 많아요. 아마 주변에서 접선하는 장소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강남은 유란하고 메이 주소가 있던데요. 아세요?”
윤의 물음에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란은 한정식집, 뭐 요정이지. 메이는 일식집인데 여기도 비슷하고. 둘 다 VIP 단골 많기로 유명한 집이야. 룸이 많고 보안 철저하니 남들 눈 피하기 좋아서 고른 거 같은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부 CCTV 확보할 수 있으면 제일 좋지. 그게 안 되면 인근 CCTV 다 뒤져서 박규형 씨가 거기서 누굴 만났는지 찾아봐야 되고.”
CCTV라는 말에 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눈알이 빠지게 영상을 돌려 보던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피식 웃은 정언은 바탕화면에 놓인 다른 파일들을 하나씩 클릭해 보았다. 공사시방서, 설계내역서, 자재발주계획서 등의 이름이 차례로 등장했다. 어떻게 입수해야 할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자료들이었다.
화면을 뚫어지게 보다가 저도 모르게 하, 하고 숨을 토한 정언은 머리를 감싸며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내가 죽어야 돼. 이걸 눈앞에 두고 며칠을 버린 거야, 도대체.”
중얼거린 정언은 테이블 위에 이마를 박았다. 눈을 감자 빙산의 일각이라는 관용구가 얼마나 명징한 것인지 새삼 실감됐다. 수면 위로 나온 건 언제나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다…… 수면 아래 얼마나 큰 빙산이 숨겨져 있는지 바깥에서는 절대 알 수 없기 마련이었다.
바닥을 모르는 물속으로 계속해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세상에 심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심연 속에 세상이 있는 건 아닐까. 정언은 문득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수많은 어둠을 들여다봤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림자가 너무나 많았다. 바로 지금처럼.
“김 피디, 지금 이거 자료 전부 다 송 작가님한테 보내. 참조에 선배 넣고 같이. 메일 보낸 다음에 송 작가님하고 선배한테 문자로 자료 보냈다고 알려 드려.”
정언은 테이블에 머리를 댄 채 내뱉었다. 윤이 얼른 노트북을 자기 앞으로 끌어다 놓고는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렸다. 메일을 보냈는지 잠시 말이 없던 윤이 멈칫하더니 정언을 불렀다.
“선배, 이거 보셨어요?”
정언은 고개를 들었다. 윤이 굳은 표정으로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 화면을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조에서 보낸 단체 메시지였다. 메시지 마지막에는 동영상 링크가 포함되어 있었다.
― 여러분, 지금 즉시 오늘자 동영상을 SNS와 커뮤니티에 공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서 모든 관련 기사와 실시간 검색어가 삭제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윤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챈 정언은 즉시 인터넷 앱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청와대에서 직접 공영방송에 개입하고 있다는 뉴스라면 당연히 특종이어야 했다. 녹취록까지 공개했다는 건 지금 상황의 보도국에서는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 메인에서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뉴스라이트’라는 검색어를 입력해도 마찬가지였다. 검색되는 것은 오늘자 에서 방송한 다른 뉴스들뿐이었다.
인천 서구 경서동 인근에서 빈집털이를 하고 다니던 50대 남성이 검거되었다든지,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아기 펭귄이 태어났다든지, 주말 날씨는 예년 평균 기온보다 2도 낮은 맑은 날씨일 거라든지 하는 평범한 기사들만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정언은 윤의 핸드폰을 도로 밀어 놓으며 미간을 눌렀다.
“……이 작가 연락처 알지? 아냐, 됐어. 내가 할게.”
조금 전 먹은 진통제도 보람 없이 다시 두통이 시작됐다. 정언은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 뒀던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성옥에게 방금 온 문자를 전달했다. ‘홈페이지하고 시청자 카페에 동영상 첨부해서 바로 올려 줘.’ 하고 메시지를 덧붙이기 무섭게 성옥이 답을 보내 왔다.
― 네 근데 피디님 어떡해요 저 진짜 무서워요 우리 어떡하죠
정언은 쓰기 창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아는 사람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터였다.
멍하니 대화창을 보던 정언은 두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선배.”
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정언을 불렀다. 고개를 저은 정언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그런 거야.”
“약은 드셨어요?”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그만 가 봐. 하루 종일 기다렸을 텐데 미안하고, 다음부터는…….”
이마로 따뜻한 손이 닿았다. 이러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려 했으나, 불시에 스민 타인의 체온에 순간 입 안의 단어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당황한 정언이 눈을 들자 손을 떼며 윤이 시선을 맞춰 왔다.
“아직 열 있어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걱정하는 기색이 선연했다. 정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의도가 없다고 해도 이쯤 되면 범죄 수준이라는 걸 자각은 할까 싶었다.
정언은 스스로 자기 객관화를 잘 한다고 믿는 편이었다. 호의와 호감 정도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언젠가부터 미묘하게 경계를 넘어오는 윤의 태도를 어느 쪽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자신의 잘못일까, 혹은 윤의 잘못일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복잡해진 정언의 머릿속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윤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정언에게 건넸다. 작은 종이 봉투였다. 안에는 진통제, 해열제, 종합감기약, 드링크제 따위가 들어 있었다. 잠시 말을 잃은 채 봉투 안을 들여다보는 정언에게 윤이 조금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약 안 드셨을 거 같아서요.”
“김 피디.”
정언은 미간을 누르며 윤을 불렀다. 윤이 씩 웃었다.
“저 되게 제멋대로인 거 아는데, 그냥 고맙다고 해 주시면 안 돼요?”
이런 식으로 선수를 뺏기는 건 낯설었다. 하지만 이 얼굴에 대고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게 분명했다. 대답 대신 봉투를 든 정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외면하며 고마워, 하고 중얼거린 말은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굴렀다.
“빨리 들어가.”
정언의 말에 윤이 대답했다.
“선배 가는 거 보고 갈게요.”
“왜.”
“그냥요.”
그냥요. 윤이 그 말을 자주 한다는 걸 정언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저 스치는 것처럼 발음하는 그냥, 이라는 말 뒤에 윤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언은 그 한 겹의 단어 아래 감춰진 윤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하고 무신경한 척 내뱉은 정언은 카페를 나섰다. 윤의 시선이 내내 등 뒤로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 탄 정언은 닫힌 문을 응시하다 손에 든 봉투로 시선을 주었다.
짧은 한숨을 뱉은 정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문 앞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막 손잡이를 잡은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무심코 내려다보자 미리보기 창으로 뜬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 아프지 마세요.
윤이었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백지처럼 지워졌다. 문을 열려던 것조차 잊어버려, 그사이 도어록이 다시 잠겼으나 정언은 그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산발적으로 몇 개의 물음들이 지나갔다.
원래 아무한테나 이런 식이야?, 왜 나한테 그렇게 신경을 써?, 친절이 너무 과한 거 아냐?, 그리고…….
진짜 나 좋아해?
착각하는 건 싫은데, 마음의 어딘가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다시 열이 오르는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복도의 센서 등이 꺼졌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정언은 손잡이를 잡은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복도 끝까지 물든 어둠은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