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71
71화.
15.
― 백선경 시사보도국장 검찰 고발할 듯/뉴스라이트 제작진 전원 중징계 예정
짧은 메시지가 날아왔다. 은석이 보낸 것이었다. 재희는 핸드폰 화면에 잠시 눈을 주었다가 긴 한숨을 쉬며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대었다.
노조 사무실에서 를 보던 모든 사람들이 포털 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기사와 검색어가 지워지는 것을 목격했을 때 받은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그런 일은 벌어진 적도 없다는 듯, 세상은 아무 일도 없이 돌아간다는 듯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는 권력 앞에서 모두가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막막한 적이 있었던가, 멍하니 기억을 더듬던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파티션에 붙여 놓은 연수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프레임 속에서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음을 터트리는 얼굴은 언제나 재희가 연수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기억하는 표정이었다.
재희는 책상 위의 작은 액자에 끼워진 카드로 시선을 주었다.
난 두려움 없는 네가 좋아.
앞으로도 평생 너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길.
동글동글한 연수의 글씨는 그 목소리의 환각을 얼핏 불러일으켰다. 재희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던 그 선명한 목소리를 좋아했다.
만약 네가 지금 여기 있었다면 어땠을까. 너라면 답을 줄 수 있었을까…… 자문한 재희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결코 답을 알 수 없을 질문이었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빛이 눈에 시리게 흩어졌다.
허공에 대고 긴 숨을 뱉은 재희는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우스를 쥐고 모니터 위를 휘적이자 아까 보던 파일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된 엑셀 파일과 공사시방서, 설계내역서, 자재발주내역서 따위의 이름이 붙은 수많은 문서들이었다.
아까 윤에게 메일로 받은 것으로, 거기에는 대강의 내용이 설명되어 있었다. 규형이 다닌 의문의 출장, 거기 관련된 한선당 의원들, 현장에서 자재를 속여 왔다는 제보자의 전화, 그걸 감시하기 위한 불법 용역 고용,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
재희는 턱을 괸 채 화면을 보았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허락된 시간이 얼마일지, 지금은 무엇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집어 든 재희는 조금 전 정언이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내비게이션에 유란과 메이 주소가 남아 있었다며, 가게 내부와 인근의 CCTV를 체크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하여튼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지.”
중얼거린 재희는 열없이 웃는 소리를 냈다. 두 곳 다 내로라하는 VIP들의 핫 플레이스였다. 내부 CCTV를 확인할 길이 상당히 요원하다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다.
물론 정언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할 테지만, 거기에 낭비할 시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핸드폰의 연락처를 켜 잠시 스크롤을 하던 재희는 서둘러 누군가의 이름을 찾았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시겠습니까?
최대한 정중한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뜨는 차세진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재희는 즉시 전화를 받았다.
『강 피디님, 무슨 일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내가 연락하려고 했어요. 오늘 뉴스 봤는데, 거기 괜찮아요?』
재희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 빠른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의 중년 여성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재희는 애써 밝게 대답했다.
“저희 팀은 아직 괜찮습니다. 의원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강 피디님 이런 적이 없어서 내가 너무 걱정이 돼서요. 무슨 일이에요?』
세진은 국회 제1야당인 민권당의 국회의원이었다. 소위 ‘청문회 폭격기’로 이름난 변호사 출신의 재선 의원으로, 현재 법사위 소속으로 일하고 있었다. 세진은 변호사 시절부터 의 법률 자문팀에 있었기에, 재희와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지금도 서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재희가 이런 식으로 먼저, 그것도 한밤중에 연락을 한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싶어 놀란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까 그 뉴스를 봤다면 그럴 만도 했다. 재희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의원님 도움을 좀 받고 싶습니다.”
그 말에 흥미가 생긴 듯, 세진의 말투가 달라졌다.
『어려운 건가 본데? 강 피디님이 나한테 도움 받고 싶다는 거 보니까. 잠깐만, 지금 회사예요? 내가 약속이 있어 그 근처에 왔는데, 시간 되면 지금 만나서 얘기합시다. 거기 근처에 그랜드가든 호텔 지하 더 모먼트 알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보죠. 여기서 일 마치고 출발하면 거기까지 삼십 분 정도 걸릴 거예요. 내가 그쪽에 연락해 둘 테니까 도착하면 내 이름 대요.』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전화를 끊은 재희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눈가를 두어 번 누르며 몸을 일으키자,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아득했다. 재희는 창가를 짚으며 몸을 조금 숙였다.
고층 건물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하늘의 모든 별이 다 쏟아져 내려 이 도시 위로 수놓인 듯, 안개비 너머로 헤아릴 수 없는 빛무리가 윤곽을 흐리며 반짝였다.
그러나 재희는 자신이 빛보다 어둠을 먼저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눈부신 빛의 입자들 사이로 스며든 어둠을 들여다보는 건 늘 자신의 일이었다.
연수가 바랐던 건 자신이 끝없이 이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을까. 이제는 답을 해 줄 사람이 없는 물음이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생각을 지운 재희는 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몰고 그랜드가든 호텔에 도착한 건 십 분쯤 지나서였다.
칵테일 바인 더 모먼트 안은 주말 밤인데도 한산했다. 문 앞에 선 직원에게 세진의 이름을 대자, 직원은 말없이 재희를 가장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앉은 재희는 의자에 깊숙하게 등을 묻었다. 바에는 아트 블래키 앤 재즈 메신저스의 앨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클래식한 취향이네, 하고 중얼거린 재희는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눈을 감고 그 멜로디에 잠시 의식을 맡겼다.
세진이 도착한 건 앨범의 마지막 곡인 ‘Come rain or come shine’이 막 시작됐을 즈음이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렸어요?”
세진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재희는 자세를 고치며 가벼운 묵례를 건네고는 웃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음악 감상 잘 했는데요.”
재희의 말에 세진이 바 안을 둘러보다 그제야 음악을 인식한 듯 아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아트 블래키죠? 이거 오랜만이네, 나 어릴 때 많이 들었는데. 일단 뭐 하나 마시면서 얘기합시다.”
“아, 저는 차 가져와서요.”
“넌알콜로 한잔해요. 그러고 보니까 얼굴 본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말랐어요? 방송에서 볼 때는 이 정도는 아닌 거 같더니.”
재희가 사양하자 재차 권한 세진은 가까이 다가온 바텐더에게 주문을 했다.
“진토닉 하나랑 넌알콜 제일 잘 나가는 걸로 아무거나.”
바텐더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세진이 낮은 한숨을 뱉었다.
“아까 피디들이 SNS에 글 올린 거 봤어요. 우리 당에서도 이거 해결하려고 노력 많이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방통위를 움직일 방법이 없어요, 지금. 너무 답답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미치겠네. 여소야대 구도인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선에서 우리가 이긴다는 확신만 있으면 내가 지금 강 피디님한테 몇 달만 더 버텨 달라고 하겠는데, 상대가 워낙…….”
세진이 말끝을 흐렸다. 재희는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대진한테 5060 보수 결집력이 상당히 있지 않습니까. 민권당에서는 민주영 의원님이 경선 당선되실 확률이 높죠? 민 의원님 참 좋은 분인데, 상대가 너무 강하긴 하네요.”
세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백이 장난 아니잖아요. 솔직히 진짜 내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엄대진 터트릴 수만 있으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청와대에서는 이미 엄대진한테 권력 이양할 준비 마쳤다는 게 정설이에요. 서로 딜 있었겠지. 그런데 얘들이 방송을 이런 식으로 주무르려고 할 줄은 우리도 상상 못 했어요. 방통위원하고 위원장 교체하자마자 민 의원 두들기기도 더 심해졌잖아요. 당 차원에서 대응책 고심하는 중이에요.”
“대선 전에 언론 장악 마쳐야 할 테니 아무래도 급할 겁니다. 서온 게이트 문제도 그렇고, 야권 후보 진영에서 공격당할 부분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 전까지 언론 완전히 조종해서 여론 흔들지 못하면 엄대진 쪽도 곤란해지죠.”
그때 바텐더가 칵테일 두 잔을 내려놓고 돌아갔다. 세진은 진토닉을 한 모금 마시고는 등을 기댔다.
“엄대진이 뒤가 구린 거야 다 알지만 증거가 없고, 있다고 해도 끝까지 갈 수가 없어요. 이미 검찰 실세 장악한 게 엄대진 라인이라…… 전에 서온건설 커넥션 터졌을 때도 남부지검 이정수 검사하고 진형은 검사가 그거 기소했다가 결국 무혐의 처리된 뒤에 둘 다 승진에서 밀려 버렸단 말이에요. 그때 언론에서 검찰이 야당하고 야합해서 정치 공작 한다고 그 둘 얼마나 때렸는지 기억나요? 그러고 나서 신환석계가 개혁파 검사들 싹 쓸어버렸잖아요. 이미 검찰 상부도 청와대하고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라 우리 쪽에서 공격하면 역풍 맞는데, 미치겠어요.”
세진의 하소연에 재희는 내심 안도했다. 세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자신의 제안을 절대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이 선 까닭이었다.
“의원님, 만약에 엄대진을 때릴 방법 있다면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멈칫하며 눈썹을 좁힌 세진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 피디님, 지금 그 얘기…….”
재희는 즉시 손가락 하나를 입술 위에 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희 팀에서 지금 취재 중인 건이 하나 있습니다. 엄대진 관련 건인데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이것 때문에 꼭 입수해야 할 자료가 있습니다. 저희 힘으로는 얻기 어려운 자료라 무리한 부탁인 거 알면서 의원님께 연락드린 겁니다. 강남 유란하고 메이 잘 아시죠?”
뜬금없는 물음에 세진이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죠. 나도 단골인데. 거기 단골인 의원들 많은데 왜요?”
“내부 CCTV 입수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