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이야기가 진작 끝난 듯, 입구에서 윤을 기다리고 있던 계준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메이를 나섰다. 에이타워 주차장으로 돌아온 계준은 다시 차에 타 문을 닫으며 윤에게 물었다.
“영상은 받으셨습니까?”
“네. 정말 감사합니다. 의원님이 안 도와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윤은 진심으로 계준에게 감사를 표했다. 경찰이 와도 안 보여 줄 정도라니, 이런 증거는 어떻게 입수해야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계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동을 걸었다.
“차 가져오셨습니까?”
“요 앞 공영주차장에 세워 놨는데요.”
“그러면 제가 거기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가도 되는데요.”
깜짝 놀란 윤이 사양했으나, 계준은 이미 출구 쪽으로 차를 모는 중이었다. 윤이 정말 괜찮은데, 하고 쩔쩔매자 계준이 웃었다.
“피디님이 좀 눈에 띄시잖아요. 비서관이 의원 두고 혼자 가는 거 누가 보고 얘기하면 저도 좀 곤란합니다.”
그 말에 얼굴이 빨개진 윤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연예인 같은 느낌이라고는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누군가 자신을 쉽게 기억할 만하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조용해진 윤을 공영주차장까지 데려다준 계준이 말했다.
“아마 강 피디님한테 얘기 들으셨겠지만, 저희 당에서도 YBS 도와 드리려고 여러 가지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안에서 열심히 싸워 주십시오. 응원하는 의원들이 많습니다. 국민 여론도 YBS 편이니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뜻밖의 말에 멈칫한 윤은 주저하다 조그맣게 대답했다. 의 어제 방송이 생각나서였다. 누군가 자신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 잘 실감나지 않았다. 모든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서 기사 한 줄도 찾을 수 없고, 실시간으로 방금 본 기사가 지워지는 판에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건넨 윤은 계준의 차에서 내렸다. 계준이 떠나는 것을 보고 있던 윤은 한숨을 쉬며 눈썹 위를 두어 번 문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마음이 추를 매단 듯 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탄 윤이 막 시동을 걸려는 참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하고 핸드폰을 집어 든 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정언의 이름이었다.
“네, 선배.”
멈칫한 윤이 바로 전화를 받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지금 어디야?』
“신논현이에요. 메이 CCTV 영상 때문에…….”
『사무실로 들어와.』
사정을 설명하려 했는데 정언이 도입부도 듣지 않고 말을 잘랐다.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던 윤은 머뭇거리다 네, 하고 대답했다. 짧은 통화는 즉시 끊어졌다.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던 윤은 뒤늦게 괜찮냐고 물어볼 걸, 하고 후회했다. 맞은편의 목소리가 잠긴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시 주말 오후 강남의 교통체증을 뚫고 방송국에 도착했을 때는 윤도 좀 지쳐 있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꽉 막힌 도로를 간신히 지나온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기지개를 켜며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윤은 사무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보기 드물게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철진과 지혁의 자리에 컴퓨터가 켜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오라던 정언 역시 없었다. 어떻게 된 건가 싶어, 윤은 전화를 걸어 볼까 망설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막 통화 목록을 열어 보던 찰나,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철진이나 지혁인가 싶어 무심코 고개를 돌린 윤은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정언이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정언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선이 똑 떨어지는 까만 원피스에 정장 재킷, 핸드백, 하이힐, 빨간 립스틱.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모습에 머릿속이 그대로 날아갔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객관성을 발휘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정언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례해 보일 만큼 정언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걸 인식했지만, 윤은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놀라기는 정언 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들어오던 자세 그대로 문을 잡고 그 자리에 서서 윤을 빤히 쳐다보던 정언이 미간을 약간 좁혔다. 그 표정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 저, 지금 들어와서…… 저기, 그…….”
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숙이며 더듬거렸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조합되지 않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오늘따라 자주 뇌가 포맷되는 기분에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그 와중 이쪽을 물끄러미 보는 정언의 시선이 느껴져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정언의 등 뒤에서 나타난 재희가 이 숨 막히게 어색한 상황을 타개해 주었다. 재희는 사무실로 들어오다 말고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내밀어 문 앞에 달린 문패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나운서국 온 줄 알았어. 사보 모델 촬영한대? 둘 다 너무 빡세게 하고 간 거 아냐?”
“그거 칭찬 맞아요?”
새빨개진 얼굴을 들지도 못하는 윤을 슬쩍 본 정언이 냉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대답을 들은 재희가 어어, 하며 짐짓 정색했다.
“당연히 칭찬이지 그럼 욕하는 줄 알았어? 세상 모든 일을 너무 비판적으로 보지 마. 그거 직업병이야.”
“사돈 남 말 하지 마요. 그리고 그 칭찬 평소에 좀 해야 칭찬인 줄 알지.”
“아, 그래? 그럼 내 잘못이네.”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안 가는 말투로 쿨하게 인정한 재희가 물었다.
“영상은?”
정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져오긴 했는데, 유란 사장 보통내기 아니더라고요. 차 의원님도 등에 식은땀이 다 났대. 이거 뭐 찾아도 방송 내보내면 그쪽에서 영상 빼돌렸다고 뭐라고 할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이명희 사장 말하는 거지? 5공 시절부터 요정정치가 뭔지 눈앞에서 다 보고 들은 사람이야.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보이는 것만큼 호락호락하겠어? 재선 의원 정치력도 그 앞에서는 어린애지 뭐.”
윤은 컴퓨터를 켜고 외장하드를 연결하며 귀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속으로 쿵쿵거렸다. 손이 떨려 몇 번을 쥐었다 폈다 한 윤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숨을 들이쉬었다. 재희가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원래 문 의원님하고 내가 갈까 했다가 난 얼굴 너무 팔려서 절대 안 되겠다 싶어 김 피디 보낸 건데, 그래도 서 피디는 얼굴 덜 팔려서 못 알아봤나?”
“그런 것 같던데요. 이러고 가서 못 알아봤나 싶기도 하고. 문 의원님하고 두 분이서 전화로 우리 새 비서관인 척 끼고 가기로 합의 보신 모양이더라고요.”
윤은 그제야 계준이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럼 처음부터 비서관 행세를 시키기 위해 정장 차림으로 오라고 한 모양이었다. 정언이 그런 차림으로 나타난 것 역시 같은 이유인 듯했다.
재희가 가벼운 한숨을 뱉고는 팔짱을 끼었다.
“차 의원님은 만약 여기서 증거 나오면 법적 문제 검토하면서 시간 버리지 말고 먼저 방송부터 내보내래. 법적 문제는 민권당 법조계 출신들이 도움 주겠다고. 이거 터지면 대선하고 직결되는 문제라 그쪽에서도 계산기 두드린 거지.”
“백 퍼센트 선의라는 게 없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솔직히 나도 이거 부탁하는 거 진짜 싫었어. 차 의원님이 나쁜 분이라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엮이는 게 부담스럽잖아. 대선 앞두고 있으니까 괜히 다른 소리 나올까 봐 걱정도 되고. 다른 방법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까 그런 거긴 한데…….”
“선배한테 뭐 부탁하려고 한 얘기 아니었어요.”
정언이 민망한 표정을 하자 재희가 손사래를 쳤다.
“알아. 그냥 내 마음이 급해서 그랬던 거야. 아무튼 이거 가지고 한선당에서 우리가 민권당하고 야합해서 언론 공작 한다 이렇게 치면 말려들 여지가 있으니까, 안 말려들려면 확실하게 팩트로 무장하고 덤비라고.”
정언에게 당부한 재희가 윤 쪽을 슬쩍 넘겨다보더니 물었다.
“김 피디도 영상 받아 왔지?”
“아, 네.”
윤은 바닥에 시선을 둔 채 겨우 대답했다. 왜 저러나 싶었는지 의아한 표정을 하던 재희가 다시 정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둘이 고생 좀 해. 나 지금 노조 사무실 내려갈 거니까 이따 연락 주고.”
“아, 어떻게 한대요?”
“이사회에서 백 국장님 검찰 고발할 건가 봐. 팀은 전원 징계 예정이고.”
재희의 말투는 담담했으나 얼핏 숨겨진 분노가 스쳤다.
정언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검찰 고발? 보자보자 하니까 그 새끼들 진짜 웃기네. 무슨 죄목으로 고발할 건데?”
“그거 만들려고 머리 쥐어짜고 있겠지. 녹취 조작됐다고 주장할 거 확실하고, 지금 세무조사 중이니까 시사보도국 경영 상태 물고 늘어질 거고. 이걸로 사장님까지 날릴 생각인가 봐. 국장님도 대비는 하신 것 같은데 우리가 지켜드릴 수 있을지가 문제야. 당장 이사회부터 막아 봐야지.”
정언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차라리 지금 셔터 내리지 뭐 하러 질질 끌어요?”
“안 그래도 시사보도국 없애고 교양국에 통합시키고, 보도 프로그램은 뉴스만 남겨서 뉴스센터 운영하는 방안 생각 중이라는 얘기도 있더라.”
“그 새끼들 아주 창의적으로 돌았네.”
기가 막혀 죽으려는 정언을 본 재희가 대답 대신 정언의 등을 툭툭 쳤다. 잠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정언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희미한 화장품 향이 훅 밀려들었다. 윤은 순간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