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75
75화.
재희가 갔다 올게, 하며 다시 사무실을 나가자 정언이 파티션 너머에서 말했다.
“영상 받아온 거 복사해서 선배랑 송 작가님 메일로 일단 보내고, 날짜별로 다 확인해 봐. 박규형 씨 찍힌 부분 하나라도 있으면 일단 무조건 캡처부터 뜨고.”
“네.”
윤이 겨우 작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폴더를 열었다. 옆에서 정언이 뭘 하는지 마우스 버튼을 딸깍대는 소리가 들렸다. 윤은 메일을 보내며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킨 채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곧 조용해졌다.
파일이 전부 다 전송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로딩 바를 멍하니 보고 있던 윤은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며 눈가를 눌렀다. 사춘기 지난 지는 십 년도 넘은 것 같은데, 서른을 목전에 둔 판에 갑자기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상 보라니까 뭐하는 거야?”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윤은 등 뒤에서 떨어지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정언이 서서 팔짱을 낀 채 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메일은 다 보냈어?”
모니터에는 그새 메일 발송 완료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 화면을 흘끗 본 정언이 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먼저 좀 돌려 보고 있어. 나 옷 갈아입고 올 거니까.”
“아, 네.”
문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던 정언이 불현듯 발을 멈추더니 다시 윤 쪽을 돌아보았다.
“김 피디는 그러고 일할 거야?”
“네?”
당황한 윤은 그제야 자기가 입사 면접 때나 할 법한 차림이라는 것을 겨우 다시 상기했다. 불편한 옷이었으나, 여기 앉아 있는 동안 그런 감각조차 싹 잊을 정도로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디에 정신을 팔았는지는 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은 눈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정언의 얼굴은 선명한 레드 립스틱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하얗게 보였다. 어제 내내 열에 들떠 핏기가 없던 정언을 떠올린 윤은 겨우 정언을 마주 보았다.
“……아픈 건 좀 괜찮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정언이 잠깐 의아한 표정을 하다 대답했다.
“덕분에.”
어쩐지 정언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윤은 가만히 정언을 응시했다. 다시 뺨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지만 눈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잠시 시선이 얽혔다.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보고 있는 게 이상했는지, 정언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왜 그렇게 봐?”
“예뻐서요.”
정언이 묻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이 튀어나왔다. 미친놈, 하고 속으로 생각한 건 직후였다. 미간을 좁힌 정언이 숨을 들이쉬며 약간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당황한 게 분명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새까만 머리칼이 스치듯 지나 다시 사락거리며 내려앉았다.
“화장 잘 됐다는 소리야?”
짧은 침묵 뒤 정언이 농담처럼 내뱉었다. 그러나 윤은 그 말에 웃지 않았다.
“화장 안 하셔도 예뻐요.”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보다 입으로 나오는 단어들이 훨씬 빨랐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정언이 서둘러 김 피디, 하며 윤의 말을 끊으려 했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그만뒀을 게 분명했다. 정언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싫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 그래서요. 그래서 본 거예요. 선배가 너무 예뻐서.”
그러나 캔디 통을 앞에 둔 어린애처럼, 윤은 그 말을 참지 못했다. 발음한 단어들에 머릿속이 확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정언이 선명한 립스틱으로 채워진 아랫입술을 말아 누르며 윤을 응시했다. 낯선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차라리 건방지다고 혼이라도 내면 이런 기분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사이를 둔 정언은 무슨 말을 하는 대신 곧 몸을 돌려 말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마치 그린 듯 떨어지는 그 무채색의 뒷모습이 눈에 박혔다. 새까만 재킷, 원피스, 핸드백, 하이힐, 그리고 단발머리 아래의 창백한 목덜미.
문이 닫히고 정언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불현듯 긴 숨이 터졌다.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던 윤은 미치겠다, 하고 중얼거리며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해 보지 않았다. 정언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윤은 무언가를 숨기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그게 좋아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먹은 적도 없는 초콜릿이 입 안에서 녹아든 것처럼 머릿속이 달콤하게 들떴고, 그 자리로 곧 낯선 감각이 밀려들었다. 아주 가늘고 차가운 통증 같은 것이 느릿느릿 그 달콤함 사이를 관통했다.
일방통행의 감정은 되돌아갈 지점을 놓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사실은, 처음부터 단 한 번도 돌아가고 싶었던 적 없었다는 것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윤은 이미 시작된 감정을 멈추는 법을 알지 못했다. 빠지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 * *
세면대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낯설었다. 정언은 그 얼굴을 뚫어지게 마주 보았다. 한 겹의 화장을 덧씌웠을 뿐인데, 거기 있는 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뻐서요, 하고 말하던 윤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언제나처럼 의도 없는 농담일 거라고 믿고 싶었으나, 이건 아무래도 그 선을 넘는 것 같았다.
“아, 진짜…….”
중얼거린 정언은 세면대를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장난이랍시고 던지는 플러팅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런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유독 별것도 아닌 윤의 그 한마디에 왜 이런 기분이 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자꾸만 마음의 어딘가가 덜컥거렸다.
종이 타월 몇 장을 뽑아 클렌징워터를 대충 적신 정언은 거울을 외면하며 얼굴을 닦아 냈다. 색색의 파운데이션, 아이섀도, 블러셔, 립스틱 따위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묻어 나왔다.
몇 번을 문질러 화장을 지운 정언은 다시 한 번 세수를 하고는 거울을 보았다. 핏기 없는 거울 속의 얼굴은 이제야 자신 같아 헛웃음이 났다. 이런 몰골인데 화장을 안 해도 예쁘다니, 아부가 지나친 게 아니라면 심각하게 눈이 나쁜 거겠지 생각한 정언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물기를 대강 닦은 정언은 숙직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늘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는 검은색 데님에 후드티를 뒤집어쓴 정언은 침대 위에 벗어 놓은 재킷과 원피스에 눈을 주었다.
정언의 옷장에 딱 한 벌 있는 이 원피스는 아버지의 기일 때만 입는 것이었다. 올해는 두 번 입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영 남의 옷 같은 재킷과 원피스를 접어 작은 핸드백과 함께 쇼핑백 안에 넣었다.
바닥에 벗어 둔 하이힐을 내려다본 정언은 고개를 젖혔다. 숙직실의 흰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덧그리는 사이,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을 마주 보던 윤이 떠올랐다. 잠시 두 손으로 눈가를 누른 정언은 한숨을 뱉었다.
아무도 없는데 공연히 민망해졌다. 사람 착각하게 왜 그래, 하고 혼잣말처럼 투덜거린 정언은 서둘러 비닐봉투에 하이힐을 넣고 둘둘 말아 쇼핑백 안에 쑤셔 넣었다.
쇼핑백을 차에 던져 놓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오자, 윤이 아직도 그 차림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자리에 앉은 정언은 받아 온 CCTV 영상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고화질의 CCTV 영상 속에서 규형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룸 안에는 CCTV가 없었으나 외부 주차장과 홀에는 모두 설치되어 있었기에, 규형의 모습은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규형의 출장은 대개 그리 길지 않았다. 주차장의 CCTV를 돌려 보던 정언은 낯익은 얼굴을 하나 더 쉽게 발견했다. 조창식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창식은 마치 규형의 상사처럼 보였다. 창식은 대개 규형이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내내 조수석에 앉아 규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규형은 트렁크에서 작은 상자나 쇼핑백 따위를 들고 내렸다. 들어가는 방은 매번 같았다. 유란의 VIP룸인 백란실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규형은 보통 삼십 분이 지나기 전 다시 나왔다.
정언은 CCTV 영상을 앞뒤로 돌리며 백란실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같은 얼굴도 있었으나, 다른 얼굴도 꽤 많았다.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모두 캡처한 정언은 파일을 다시 살폈다.
그 중 정언이 아는 얼굴은 하나였다. 한선당 소속의 강남 정 지역구 의원 성재춘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처음 당선된 초선 의원으로, 역시 엄대진계로 분류되는 의원 중 하나였다. 규형이 나가고 두어 시간이 지난 뒤 백란실을 나오는 재춘의 손에는 항상 규형이 들고 들어갔던 상자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그러면 이걸 성재춘이 받아 간 건 확실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언은 성재춘이 찍힌 CCTV 화면을 전부 프린트했다. 사무실 구석의 복합기에서 윙윙대며 빠져나오는 종이 쪽으로 눈을 돌렸던 정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합기 앞에서 침침해진 눈가를 문지르고는 프린트된 종이를 집어 든 정언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정신없이 영상을 보는 사이 이미 서너 시간도 넘게 흘러 있었다.
저녁때를 놓친 지 오래였다. 이미 저녁이라기보다는 야식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기지개를 켠 정언은 문득 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도 이어폰을 꽂은 채 무언가를 쓰는 듯 등을 숙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윤도 내내 굶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잠시 갈등하던 정언은 뒤로 다가가 윤의 어깨를 툭 쳤다. 멈칫한 윤이 고개를 들며 한쪽 귀의 이어폰을 뺐다.
“뭐 좀 나왔어?”
“네. 박규형 씨 오가는 거 확인했고 그 룸에 같이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 전부 캡처했어요. 박규형 씨가 뭐 들고 들어가고, 나올 때는 다른 사람이 들고 나오고 하더라고요.”
윤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정언은 부러 거기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화면을 가리켰다.
“캡처한 거 한 번 보자.”
윤이 파일을 저장해 둔 폴더를 열어 캡처한 화면을 하나하나 넘겼다. 화면을 보던 정언은 잠깐, 하며 윤이 쥐고 있던 마우스 위로 손을 올렸다.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으나, 손이 닿기 무섭게 윤이 움찔했다. 누가 봐도 의식하고 있다는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