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77
77화.
자신이 아는 얼굴을 모두 체크한 뒤 종이 위에 뚜껑을 닫은 펜으로 의미 없는 원을 그리던 선준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이거 전부 엄대진 라인인 건 확실해.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으면 너 이거 쉽게는 못 할 거다. 서온 게이트 때도 증거 없어서 특검에서 얘네 무혐의 처리한 거 아냐.”
“전 부장님한테 자료 좀 받아 볼 수 있어? 팀 분위기 장난 아닐 텐데 내가 묻기가 뭐하네.”
정언이 말을 돌리자 선준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때 아마 특검팀 통해서 취재한 자료 꽤 될 거야. 패소하고 후속 보도 못 내보내는 바람에 쓰려던 거 못 쓰고 그냥 묻어 둔 것도 있고. 그거 말 잘 해줄 테니까 지금 하는 거 뭔지 맛이라도 좀 보여 줘 봐. 어디 가서 소문 안 낼 테니까.”
“만약에 다른 데서 먼저 말 나오면 다 현 기자 소행으로 알고 죽여 버릴 거야.”
“농담 살벌하게 하지 마, 진짜 같으니까.”
“농담 아니거든.”
정색하는 정언의 표정에 선준이 즉시 겁을 먹은 얼굴로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정언은 그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 들려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정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준이 미간을 눌렀다.
“일이 크네. 일단 사람이 죽었다는 게 엄청 찝찝하다. 서온 게이트 때도 그런 얘기 있긴 있었어. 주요 증인이 갑자기 죽어서 혹시 누가 사주한 거 아니냐고. 증거가 없어서 넘어가긴 했는데…… 아무튼 이거 접근하면 엄대진이 눈치 까는 건 시간문제네. 그 전에 증거를 잡느냐 못 잡느냐 그게 문제겠다, 니들은.”
“주요 증인이 죽어?”
“교통사고랬나? 자세한 내용은 전 부장님이 잘 아실 거야. 내려가서 에서 자료 요청한다고 얘기해 줄게.”
“물난리 난 집에서 살림 꺼내 달라고 하는 거 같아서 영 그러네.”
정언의 말에 선준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정도는 달관한 듯한 표정이었다.
“다 각오는 했지. 뭐 우리도 그 정도 각오 없이 터트린 거 아니니까. 윗대가리들도 아무리 인사권을 칼처럼 쥐고 휘두른대도 사람 하나도 없이 무슨 수로 뉴스 내보내겠어. 이미 성 피디님하고 김진우 선배 잘랐는데 이런 일 있을 때마다 사람 계속 자르면 피디 앵커 기자 아무도 없이 뉴스를 누가 해? 정수창 선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경질하는 것도 부담일 거고. 우리 걱정은 우리가 하니까 걱정은 에서 해.”
“이사회 언제래? 인사위도 같이 열 건가?”
“월요일 오전. 인사위는 이사회 하는 거 보고 열 것 같아. 백 국장님하고 사장님 앉혀 놓을 모양인데 만약에 열린다면 우리는 안 들어가고 최병주 피디님하고 정수창 선배, 나명욱 부장님 들어갈 거 같아. 게이트키핑(gate keeping)7)하고 데스킹(desking)8) 과정 문제 삼겠지. 녹취록 진위 여부 걸고넘어질 거고. 걔들 수작 뻔하잖아. 뻔한데 당하는 게 열 받는 거라 그렇지. 이충민 피디님 말로는 이사회 저지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때 선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뒤집어 액정을 확인한 선준이 아이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출. 나 사무실 다시 들어가 봐야겠다. 얘기해 보고 연락 줄게.”
“알았어.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정언을 만류한 선준이 후다닥 사무실을 나갔다. 닫히는 문을 보고 있던 정언은 뒤통수에 깍지를 끼어 받치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형광등 빛이 눈부셨다. 눈을 가늘게 뜨자 시야가 온통 흰빛으로 가득 찼다.
결국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는 엄대진이었다. 모든 진실은 거기에 있었다. 선준의 말대로 취재가 계속된다면 엄대진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눈치 채이지 않을 수 있는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은 문제를 생각하던 정언은 선배, 하고 부르는 윤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왜.”
“저녁 드실 거죠?”
생각도 못 한 말에 정언은 순간 망설였다. 밥 같이 먹자는 소리인 걸 눈치챈 탓이었다. 아니라고 하자니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집에서 나오기 전 욱여넣은 식빵 한쪽이 전부였다. 게다가 윤도 내내 굶은 걸 빤히 아는 판이었다.
“밥 사드릴게요. 가요.”
윤은 정언이 갈등하는 사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얼떨결에 거절할 기회를 뺏긴 정언은 어정쩡한 기분으로 윤을 따라나섰다. 오피스 지구라 주말 밤 늦은 시간에 문이 열린 가게는 별로 없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던 정언은 가끔 밤샘 때 들르는 24시간 국수집을 가리켰다.
“그냥 간단히 먹자.”
윤은 별말 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정언은 작은 가게의 구석 테이블에 윤과 마주 앉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 세팅된 윤의 모습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지금 막 웨딩 촬영이라도 마치고 온 사람 같았다. 여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정언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왜요?”
“아냐.”
의아하게 묻는 윤에게 대답을 피한 정언은 아주머니를 불러 잔치국수 두 개를 주문하고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옆얼굴로 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언은 창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뱉었다.
“화장 지웠으니까 그만 봐.”
윤이 대답 대신 웃었다. 웃긴 왜 웃어, 하고 속으로 투덜거린 정언은 창가에 비친 윤을 흘끔 보았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단정한 얼굴에 어쩐지 속이 더워졌다. 그사이 흰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국수 두 그릇이 금방 앞에 놓였다.
정언의 수저를 먼저 챙겨 준 윤이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정언은 윤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국수를 밀어 넣었다. 의무방어전 같은 식사였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맛이었으나, 때를 한참 건너뛰어 허기진 속에 따뜻한 것이 들어가자 젓가락을 움직이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문득 고개를 든 윤이 정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천천히 드세요.”
그 말에 정언은 퍼뜩 손을 멈췄다. 정작 윤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자기 몫의 식사를 계속했다.
결국 문제는 이거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흔들어 놓고, 그런 적 없었다는 듯 다시 여상해지는 그 태도. 윤의 사소한 다정함은 지금처럼 때로 신경을 당겼다.
정언은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까닭 없이 조금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의식하고 싶지 않은데 의식하게 되는 건 누구의 잘못일까. 정언이 결국 몇 젓가락 더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자, 윤이 물었다.
“더 드시지, 그거 다 드신 거예요?”
“다 먹었어. 그만 가자.”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갑을 꺼내자 윤이 얼른 정언을 슬쩍 밀고는 먼저 계산을 했다. 아니, 하며 정언이 윤을 만류했으나 이미 부질없는 짓이었다.
한숨을 쉬며 가게를 나선 정언은 곁에 선 윤의 그림자를 보았다. 가로등 빛에 길게 떨어지는 그림자가 눈에 밟혔다. 그러자 어제 카페에서 선배 가는 거 보고 갈게요, 하던 윤의 얼굴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내내 자신의 뒷모습을 따라오던 그 시선도.
잠시 말없이 곁에서 걷던 윤이 카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직 불이 켜진 카페 안을 넘겨다본 윤이 정언에게 물었다.
“커피 드실 거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윤은 정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하던 정언은 곧 윤이 언제나처럼 커피 드실래요, 하고 묻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약 그렇게 물었다면 거절했을 텐데, 그걸 눈치채서 그런 건지 퍼뜩 궁금해졌다. 이마를 짚은 정언은 열없이 눈썹 위를 문질렀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정언은 카페의 통유리 안으로 보이는 윤의 뒷모습에 눈을 주었다.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이 웃으며 윤에게 뭐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윤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과 있을 때 늘 그런 얼굴을 하곤 했다.
어쩌면, 가끔은 자신도 저렇게 웃는 걸까.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까닭 없이 심장이 빨라졌다. 곧 테이크아웃 컵 두 개를 들고 나온 윤이 하나를 정언에게 내밀었다.
“아이스 드시는 거 아는데 날씨가 추워서요. 따뜻한 걸로 샀는데 괜찮으세요?”
“아, 고마워.”
시선을 피하며 대답한 정언은 컵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손으로 온기가 스몄다. 걷기 시작하자 윤이 곁에 나란히 섰다.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등 빛에 긴 그림자가 달라붙었다. 정언은 거기 시선을 두고 침묵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윤이었다.
“아까 그분하고 무슨 얘기하신 거예요?”
뜻밖의 물음에 정언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 현 기자? CCTV 화면에 잡힌 거 누군지 아냐고 물어본 거야. 현 기자가 한선당 마크맨이었고 지금도 국회 출입기자라 혹시 아는 사람 있을까 해서.”
“친한 분이에요?”
“입사 동기야. 팀하고 우리 친하니까 잘 아는 거고. 왜?”
“너무 친해 보여서 좀 질투 나던데요.”
윤이 리드를 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옅은 커피 향이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떠돌았다. 농담인가 싶어 윤을 쳐다보았으나, 가로등 빛을 받은 얼굴은 표정이 잘 읽히지 않았다. 정언은 걸음을 멈췄다.
“김 피디, 뭐 하나 물어보자.”
어쩌면 묻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말이 이성을 앞질렀다. 하얗게 흩뿌려지는 가로등 불빛이 보도블록 위로 튀어 올랐다. 윤이 따라 멈추자 발치의 그림자가 길게 겹쳐졌다. 정언은 그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매번 이런 식이면 오해 안 받아?”
시선을 내린 정언은 지금 윤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림자 속의 표정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지났다. 윤이 되물었다.
“매번 이런 식이요?”
“아무한테나 그렇게 말하면 오해 안 받냐고.”
윤이 아, 하더니 웃는 소리를 냈다.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 건 그 순간이었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아주 얇은 얼음 위를 실수로 디딘 것 같았다. 발밑에서 깨지는 살얼음처럼, 가슴 부근이 불현듯 파삭 내려앉았다.
7) 게이트키핑(gate keeping) : 뉴스 결정권을 지닌 사람(기자나 편집자 등)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과정.
8) 데스킹(desking) : 현장 취재 기자가 작성한 원고를 상부에서 검토하고 다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