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79
79화.
석건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정을 마주 보았다.
“야, 하나정. 너 지금 어디서 평피디가 국장한테 눈깔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국장 같지도 않은 게 지랄하네. 내 눈깔 내가 어떻게 뜨든 내 맘이다, 왜?”
아예 맞먹는 나정의 태도에 석건이 황당한지 삿대질을 했다.
“이거 뭐 이런 미친년이 다 있어?”
“미친년? 야, 너 같은 새끼들이 회사 작살내는데 내가 제정신이게 생겼어? 떡고물 받아먹겠다고 선후배고 동료고 다 팔아먹는 넌 안 미쳤냐? 내가 미친년이면 너도 미친놈이야,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정신 나간 여자처럼 악을 쓰는 나정의 모습에 등줄기가 서늘해진 윤은 숨을 참았다. 저 작은 체구 어디에 그 정도의 분노가 숨겨져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석건 역시 악귀처럼 자신에게 대드는 나정에게 기가 질렸는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경호원들이 나정을 뒤로 밀치자, 곁에서 은석이 나정의 앞을 가로막으며 석건에게 내뱉었다.
“오늘 이사회 못 열어요. 좋게 말할 때 돌아가시라고요.”
“아니, 나 이런…… 야, 니들 이거 다 징계감인 거 몰라?”
석건이 길길이 날뛰었으나 은석은 대답 대신 자리를 지켰다. 하 참, 하고 가슴을 친 석건이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요. 납니다. 아니, 지금 여기 이사회를 열어야 되는데 노조 새끼들 때문에 꼼짝달싹하질 못 해. 사람 좀 올려 보내 봐요. 이사님들 밑에서 기다리시는데 상황이 아주 안 좋다고. 어, 빨리. 최대한 빨리 좀, 많이 보내.”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람들로 가득 찬 복도에 기묘한 정적이 지났다. 공기가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곁에 서 있던 정언이 손목에 끼고 있던 끈으로 짧은 단발을 바짝 잡아당겨 묶었다. 누가 봐도 전투태세였다. 조금 앞쪽에 서 있던 지혁이 어, 하며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켰다.
“이 새끼들 올라오나 본데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쪽으로 몰려들었다. 머릿수에서부터 상대가 안 되는 탓에, 석건이 경호원들로 둘러싸인 채 엘리베이터 문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안에서 방호복을 입은 사설 경호원들이 쏟아져 나오며 사람들을 밀어붙였다. 덩치 큰 충민이 앞에서 버티며 소리를 질렀다.
“카메라 뒤로 빠져! 다 찍어! 이거 다 찍으라고!”
사람들이 일제히 앞으로 뛰쳐나갔다. 경호원들이 마구잡이로 밀치는 통에 여기저기서 고함과 비명이 터졌다. 비상구 계단으로도 올라온 건지, 한 무리의 경호원들이 옆 대열을 흐트러트리며 파고들었다.
이사회실 복도 앞이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직원들과 사설 경호원들이 온통 뒤엉켰다. 얼결에 떠밀린 윤은 벽에 부딪쳤다가 바로 제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정언이 저만치 앞으로 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정의 옷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기는 경호원들을 뿌리친 정언은 나정을 끌어당겨 안으며 고함을 쳤다.
“이 개새끼들이, 지금 어디다 손을 대! 전부 찍고 있는데 고소당하고 싶어?”
정언이 나정을 벽 쪽으로 밀고는 앞을 가로막았다. 달려드는 경호원들이 나정을 끄집어내려 했으나 정언은 절대 몸을 피하지 않았다. 그사이 여자 피디며 작가들 몇몇이 머리채를 잡히거나 거칠게 밀쳐져 바닥으로 뒹굴었다. 비명 소리가 아비규환인 복도에 울렸다.
“밟지 말라고, 이 새끼들아! 사람 다치는 거 안 보여? 여자들은 뒤로 빠져, 빨리!”
재희가 달려와 넘어진 채 웅크린 의 이은유 작가를 감싸 일으키며 덤벼드는 경호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서둘러 은유를 등 뒤로 숨긴 재희가 정언과 나정을 사각지대로 떠밀었다.
윤은 황급히 사람들을 헤치고 정언 쪽으로 달려갔다. 나정을 먼저 사각지대로 보낸 정언은 지혁에게 향하는 중이었다. 경호원에게 멱살을 잡힌 지혁이 놔요, 하며 소리를 질렀다. 지혁과 경호원 사이로 무작정 파고든 정언은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방호복을 입은 경호원이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간신히 정언을 발견한 윤은 뒤에서 그 팔을 낚아채며 경호원을 밀쳤다. 분노한 사람들 사이로 휩쓸려 들어간 경호원들에게서 고함 소리가 터졌다. 지혁이 몸을 숙이며 콜록거렸다. 정언이 지혁의 등을 두드리며 괜찮아? 하고 묻자 지혁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이라고 상황이 결코 좋지는 않았다. 몇몇 경호원들이 뒤쪽에 있던 촬영기자와 카메라맨들의 카메라를 뺏기 위해 달려들었고, 그 통에 의 촬영기자인 영목이 들고 있던 카메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경호원이 영목의 카메라 위를 밟아 망가뜨리자 곁에 있던 의 촬영기자들이 영목을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이거 기물 파손이야! 방송국 카메라 한 대에 얼만지나 알아?”
“니들이 못 찍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모를 줄 아냐?”
“회사랑 관련 없는 새끼들은 여기 있을 자격 없으니까 꺼져!”
산발적으로 터지는 고함 소리가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뒹굴었다. 상처가 나거나 코피를 흘리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울음소리와 비명 소리, 욕과 고성이 한데 뒤엉킨 복도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겨우 조금 가라앉은 건 거의 두 시간이 다 지나서였다.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와 비상구를 막아 버린 통에 경호원들은 더 올라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인원수가 절반도 안 되는 경호원 측이 복도 구석으로 밀려났다.
석건은 언제 도망쳤는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경호원들도 지시를 받았는지 서둘러 하나둘 자리를 피했다. 복도에 남은 건 엉망진창이 된 직원들뿐이었다. 다들 바닥에 넘어지고 벽에 부딪치고 떠밀린 통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 있던 재희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짧은 통화를 마친 재희가 곁의 충민에게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얘기하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정언은 넋이 나가 주저앉은 나정을 달래던 참이었다. 윤은 그런 두 사람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서 피디, 괜찮아?”
재희가 부르는 소리에 정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뭐 어떻게 됐대요?”
“지금 아래층에서 시민단체하고 직원들이 주차장 막아서 이사들 세 명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돌아갔대. 나머지 이사들도 오늘 이사회 못 열 것 같다고 했다네.”
재희의 말에 정언이 긴 한숨을 내쉬며 무릎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맥이 탁 풀린 윤이 벽에 기대서자 재희가 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처음이라 많이 놀랐겠네. 다친 데 없어?”
“아, 네. 괜찮습니다.”
“서 피디랑 오후에 출장 있다며.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까 둘은 일단 내려가 봐.”
그 말을 듣고 있던 정언이 고개를 들어 재희를 쳐다보았다.
“만약에 오후에 다시 이사회에서 치고 들어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야당 의원들도 지금 오는 중이라고 하고, 시민단체는 오늘 저녁까지 계속 남아 있을 거래. 노조에서도 오후 방송 있는 사람들 제외하고 교대로 잔류하기로 했고. 저녁까지 못 들어오면 이사회 못 열리는 거 확실하니까 걱정하지 마.”
정언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아이 씨, 하고 중얼거리며 그렇지 않아도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한 번 흩었다. 재희가 물끄러미 정언을 내려다보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갔다 와. 서 피디 하나 없다고 어떻게 될 것 같으면 회사 벌써 망했어.”
“회사가 문제가 아니고…….”
정언이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가 결국 말을 멈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 내키지 않는 투로 알았어요, 하고 내뱉은 정언은 엉망이 된 머리를 고쳐 묶고는 몸을 숙여 나정을 부축했다. 거의 반 실신한 나정이 축 늘어져 정언에게 기댔다. 정언은 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정 선배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사무실 가 있어.”
윤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정언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재희가 정언이 사라진 쪽을 보고 있다가 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보자 만나러 간다며? 장거리라 피곤할 텐데 얼른 내려가. 늦으면 서 피디 난리난다.”
윤은 네, 하고 대답했다. 재희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 있는 충민 쪽으로 멀어졌다. 어지간히 지쳤을 텐데도 그 뒷모습은 꼿꼿했다. 물끄러미 재희를 보던 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정언이 하려던 말이 뭔지 깨달은 탓이었다.
정언이 진짜 걱정한 건 재희였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사무실로 내려온 윤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카메라와 보이스리코더 따위를 챙겼다. 곧 뒤이어 들어온 정언이 자기 가방을 찾아 메고는 윤에게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정언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윤은 자기 차에 먼저 시동을 걸었다.
“내가 운전해도 돼.”
멈칫한 정언이 말했으나 윤은 대답 대신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자기 차 키를 내려다본 정언이 주머니에 키를 쑤셔 넣고는 윤의 차에 탔다. 윤은 운전석 문을 닫으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주차장 입구 쪽에는 피켓을 든 시민단체와 노조 마크가 박힌 조끼를 입은 직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빠져나오는 동안 차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도로로 접어든 윤은 정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언은 창가에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다치신 데 없어요?”
“괜찮아.”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하나정 피디님은 좀 어떠세요?”
“탈진해서 좀 쉬라고 했어. 며칠째 한숨도 못 잤대. 원래 조용한 사람인데 스트레스 심했던 것 같더라고.”
윤의 물음에 가벼운 한숨을 섞어 대답한 정언이 이마를 짚었다.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는 걸 보니 두통이 있는 듯했다. 윤은 곁눈질로 정언을 흘끔 보며 물었다.
“선배, 아직도 몸 안 좋으세요?”
“아냐. 괜찮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재희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던 정언의 얼굴이 뇌리를 지나친 건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