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8
8화.
윤은 입사 후 한 번도 거기에 글을 올리는 일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내 게시판은 강성 노조원들이나 쓰는 건 줄 알았다. 부당 인사 조치에 해명을 요구한다든가, 경영진의 태도를 비난하는 글이 대부분인 탓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곳에 글을 쓸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사실 이사진을 비판하는 글을 썼던 건 솔직히 말해 취한 탓도 있었다. 윤은 소주 반병이면 거의 인사불성에 가까워지는 타입이었다. 그날 저녁 태훈과 마신 소주 한두 잔은 윤에게 이미 치사량이었다. 게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집에 와서 캔맥주까지 한 캔 깠던 것이다.
그러니 그때 제정신이었을 리가 없었다. 술이 깨고 나자 뒤늦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노트북 앞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부랴부랴 게시판에 쓴 글을 확인했는데, 또 그런 주제에 글은 멀쩡하게 쓴 게 신기했다.
YBS는 공영방송이다, 어떤 이유로든 이사진이 방송을 좌지우지하려는 건 월권이다, 방송이 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결정하는 주체는 오직 국민들이다, 불편하다는 말로 입을 틀어막으려 하지 말라…… 취한 사람이 썼다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연했다.
작성자란에 김윤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분명 이건 노조에서 쓴 글이고, 자신은 게시판에 글 쓰는 꿈을 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 같았다. 그새 공감하는 댓글도 수십 개가 달려 있었다. 소속을 보니 대부분 시사보도국 피디들이었다.
글을 지워야 할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맞는 말 한 건데 뭐 어떠랴 싶었다. 사내 게시판에 쓴 글 가지고 해고당할 리도 없었고, 지금처럼 진수에게 혼이나 좀 나면 될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중얼거린 윤은 에너지 바를 입 안에 마저 쑤셔 넣었다. 방송국이 가까워지니 갑자기 금요일 아침의 접촉 사고가 생각났다. 주말 내내 연락이 안 온 걸 보면 역시 그냥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들어선 윤은 걸음을 멈췄다. 진수가 창가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진수였으나, 어쩐지 그 뒷모습이 초조해 보여 의아했다.
뭘 얼마나 혼내려고 그러나 속으로 생각한 윤은 진수에게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부장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진수가 윤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 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윤을 보자마자 얼굴을 구기며 뒷목을 움켜잡았다.
드라마에서 많이 본 장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진수는 고혈압 환자였다. 윤은 황급히 어어, 하며 진수를 부축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진수는 윤의 등짝을 후려쳤다.
“야, 이 망할 놈의 새끼야! 너 진짜…….”
말도 채 잇지 못한 진수가 다시 헉헉거렸다. 아야, 하며 얻어맞은 자리를 문지른 윤은 진수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내 게시판에 글 하나 쓴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렇게 혈압을 올리나 싶었다. 사실 등짝을 얻어맞을 정도의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윤이 천하 태평한 생각을 하는 사이, 뒷걸음질을 쳐 자리에 앉은 진수가 이마를 짚으며 윤을 쳐다보았다.
“너 어쩌자고 그랬냐?”
“뭐가요?”
“이거 말이야, 인마. 이거!”
진수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프린트 몇 장을 손으로 탁탁 쳤다. 윤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사내 게시판을 출력한 종이였다.
김윤(glosskim), 교양국 1부, PD. 어용 이사진은 방송에 간섭할 권리가 없습니다.
작성자의 이름과 아이디, 소속, 글의 제목까지 선명하게 출력된 종이를 본 윤은 그럼 그렇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내 게시판은 사원들이 쓰라고 만든 거 아닙니까?”
한껏 무해함을 가장한 윤의 표정에 진수가 기가 찬다는 얼굴을 했다. 다시 혈압이 오르는지 뒷목을 주무르던 진수가 삿대질을 했다.
“야 이 새끼야, 너 입사할 때부터 나한테 뭐라고 그랬냐?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며? 야망 같은 거 쥐뿔도 없다며? 나중에 하는 게 꿈이라며?”
“도 하고 싶다고 그랬는데요.”
그 말을 정정하자 벌떡 일어난 진수가 윤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키 차이가 한 뼘은 났기에 이마를 쥐어박기 위해서는 까치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진수는 그런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윤이 맞은 이마를 감싸며 아 부장님, 하고 투정을 부리자 진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말꼬리 잡지 마! 너 이거 왜 썼냐? 어쩌려고 썼어? 눈치가 없는 거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으면 병원을 가야지 이딴 글은 왜 올려?”
“이딴 글이요?”
윤이 이마를 문지르며 되묻자 진수가 씩씩대며 윤을 다그쳤다.
“너 지금 회사 분위기 어떤지 몰라?”
“아니까 썼죠. 이사진들은 지들 마음대로 프로 찍어라 마라 하는데 피디가 왜 이런 글도 못 씁니까?”
딱히 대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말하다 보니 슬슬 열이 올랐다.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 보는 윤의 얼굴에 진수가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야, 김윤 새롭다. 너 언제부터 이렇게 정의감 넘쳤냐? 나는 여태 몰랐네?”
말투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정작 표정은 복잡했다. 그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윤은 진수에게 항의했다.
“정의감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잖아요. 우리는 상관없으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어요? 그까짓 재개발 지역 다큐가 뭐라고 왜 하라 마라 합니까? 우리 개국 때부터 그런 다큐 찍은 거 백 개는 있잖아요. 왜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는 건데요? 대한민국이 독재 국가였어요? YBS는 어용 방송이고요? 이사진들 기분 상하는 프로는 찍지도 말아야 돼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윤을 쳐다보던 진수가 이사진 소리가 나오자마자 다급히 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입이 막힌 윤은 긴 팔을 휘적거렸다. 진수가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대며 윽박질렀다.
“조용히 해, 이 새끼야! 밖에 다 들려!”
“제가 뭐 죽을죄 지은 거예요? 밖에서 들으면 안 되게?”
윤은 진수의 손을 떼어 내며 부루퉁하게 되물었다. 사내 게시판에 글 하나 쓴 게 이럴 일인가 싶어 슬슬 정말 화가 나기 시작하는 판이었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 진수가 벽에 걸린 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홉 시 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수가 다시 한 번 윤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까와는 달리 그새 힘이 빠진 손길이었다.
“나는 죽을죄라고 생각 안 하는데 윗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신대, 이 등신 같은 놈아. 너 지금 나랑 같이 인사위 가야 돼.”
“왜요?”
윤은 진심으로 까닭을 몰라 되물었다. 인사위원회는 주로 징계 대상인 직원들을 부르는 곳이었다. 자신처럼 평범하고 조용히 일상을 영위하는 직원들이 인사위에 드나들 일은 거의 없었다. 어리둥절한 윤의 표정에 진수가 혀를 찼다.
“왜? 왜는 무슨 왜야. 너 인사위 회부됐으니까 가야지. 나는 너 관리 못한 책임으로 가는 거고.”
“농담하시는 거죠?”
“농담 좋아하네. 내가 지금 너랑 농담 따먹을 정도로 한가해 보이냐?”
진수가 한 대 더 쥐어박고 싶다는 얼굴로 내뱉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 넥타이를 꺼낸 진수는 다 구겨진 셔츠에 주섬주섬 넥타이를 맸다. 마지막으로 후줄근한 재킷을 걸친 건 덤이었다. 언제 마지막 드라이클리닝을 했는지도 알 수 없는 옷이었다.
진수는 멀뚱거리며 선 윤에게 빨리 따라와, 하고 고함을 쳤다. 윤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위원회실로 가는 진수의 뒤를 따랐다.
윤이 알기로 인사위에 회부될 정도라면 대부분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남들 다 보라고 공개된 곳에 올린 글도 아니고, 사내 게시판에 쓴 글을 가지고 이런다는 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위원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미리 와서 일렬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순간 입 안이 확 말랐다. 윤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
“교양국 1부 최진수 부장, 김윤 피디 맞습니까?”
가운데 앉은 중년 남자가 물었다. 무감한 목소리였다. 앞에 놓인 명패에는 ‘위원장 송정호’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얼른 네, 하고 대답한 진수는 얼어붙은 윤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인사위원들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입사 면접 때의 긴장감이 되살아났다. 주목받는 건 언제나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말아 쥐었다. 어릴 때도 교무실 한 번 불려간 적이 없었던 모범생이었는데, 그런 자신이 다 커서 이렇게 혼나는 자리에 끌려왔다는 게 기막혔다.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애써 참으려 했으나 그새 그걸 알아차렸는지, 정호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즉시 얼굴을 찌푸렸다.
“김윤 피디, 여기 인사위원회예요. 왜 왔는지 몰라요?”
“제가 사내 게시판에 작성한 글 때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침착함이 여자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여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는데 웃어요?”
“인사위원회에 회부될 정도의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였다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숙이고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이 상황이 황당했다. 옆에 앉아 있던 진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진수는 탁자 아래로 보이지 않게 윤의 허벅지를 콱 꼬집었다. 윤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