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80
80화.
“강 피디님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예요?”
“무슨 뜻이야?”
정언이 멈칫하며 되물었다. 내내 신경이 쓰인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참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낸 것이 충동적인 행동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윤이 잠시 대답을 고르는 사이, 정언이 팔짱을 끼며 시트에 등을 묻었다.
“김 피디, 진짜 왜 그래?”
“네?”
“내가 선배한테 무슨 감정 있다고 확신해서 그러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윤은 서둘러 부정했다. 그러나 정언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니다? 선배하고 나 사이에 감정 없냐, 내가 못 그만두는 거 선배 때문이냐, 선배 걱정돼서 그러는 거냐, 이거 다 아무 의도 없다고? 나 혼자 김 피디 의도 넘겨짚고 있다 그거야?”
충분히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정언의 말투는 차분했다. 그것이 도리어 더 불편해졌다. 재희에게 보이는 정언의 태도가 신경 쓰인다고 솔직히 말해 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죄송하다고 사과할 수도 있었다. 윤이 어느 쪽을 택할지 잠시 갈등하는 사이, 정언의 다음 말이 떨어졌다.
“나 선배 오래 좋아했어. 어차피 회사에 그거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들었을 수도 있겠네.”
순간 핸들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정언에게 확인사살을 당하는 건 기묘한 기분이었다. 정언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얘기했지만 난 가망 없는 일에 매달리는 거 싫어해. 선배가 나 봐줄 거라는 생각 안 하고, 내가 얼마나 오래 좋아했든 선배 그것 때문에 부채감 가지고 나 받아 줄 사람 아냐. 선배나 나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김 피디가 계속 그런 식으로 떠보는 거 불편하고.”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재희가 자신을 절대 돌아보지 않을 사람인 걸 알아도 상관없다는 정언의 말은 여상했다. 그러나 그 여상함이 도리어 심장 한쪽을 뜨끔하게 뚫고 지났다.
그런 감정들은 항상 예민하기 마련이었다. 아주 작은 것으로도 상처 입고, 얕은 상처에도 선명하게 고통을 느낄 만큼. 그러니 정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재희에 대해 얘기하는 순간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지 가늠하게 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나 아까 선배 걱정해서 그런 거 맞아.”
정언이 말했다. 차라리 묻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심장이 젖은 종이 위에 얹힌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충동의 대가를 감수할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처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이 잠시 먹먹하게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하게 귓가로 스몄다. 정언이 풀썩 소리가 나도록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맞는데, 그게 나한테 다른 일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하진 않아. 대답 됐어?”
정언은 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눈을 감았다.
“질문 시간 끝났어.”
지친 얼굴이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의하기 힘든 감정들이 교차했다. 다만 정언이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결코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윤에게 이상한 위안을 주었다. 가느다란 떨림을 감추기 위해 핸들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윤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는 싫었다. 아주 희박한 확률이더라도, 그것이 불가능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만큼이 아니라면 그 이상을 바라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건 본질적인 갈망에 가까웠다. 멈춘다는 건, 이미 윤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 * *
포항이 초행은 아니었으나, 내내 서울 한복판을 뛰어다니다 맞이한 조용한 거리는 낯설었다. 성수기에는 북적거렸을 영일대 앞도 늦은 평일 오후에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바닷가 앞을 지나 두호동 주택가로 접어들자 멀리 신축 빌라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은 시계를 보았다. 다행히 길이 막히지 않아 제보자와 약속한 시간까지는 이십 분쯤 남아 있었다. 윤이 시장 근처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이 장시간의 운전 탓에 몸이 찌뿌둥한지 으으, 하고 기지개를 켰다.
안 그래도 긴 몸을 잡아 늘리는 윤에게 무심코 시선을 주자, 눈이 마주친 윤이 팔을 위로 쭉 뻗은 채 멋쩍게 웃었다. 정언은 잠시 그 얼굴을 빤히 보았다.
차 안에서 윤이 재희에 대해 물었을 때 화를 냈어야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굳이 그런 일로 화를 낸다는 건 이상했다. 어차피 자신이 재희를 좋아했다는 건 시사보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딱히 그걸 부끄럽게 여겨 본 적도 없었다.
다만 정언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윤의 태도였다. 정언은 언제부터인가 윤이 자신 앞에서 재희 얘기를 꺼낼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려 노력한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는 거라면 말을 안 꺼내면 될 텐데, 꼭 물어봐 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내내 자신 쪽을 보지도 못하던 윤을 떠올린 정언은 미간을 눌렀다. 사실 화를 내지 못한 건 그 때문이기도 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잔뜩 풀이 죽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대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팔짱을 낀 정언은 뒷좌석에서 카메라며 노트북 따위를 꺼내는 윤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자 윤의 목소리가 문득 뇌리를 지났다.
― 그런 적 없어요. 아무한테나 이러는 거 아니니까. 선배가 아픈 거 싫어요…….
그러니까, 그때 물었어야 했다.
날 좋아하는 거냐고.
그러지 못한 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윤이 정말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입사한 이후로 연애 같은 건 정언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단어나 다름없었다. 재희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거니와, 누가 자신에게 관심을 둘 거라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정언에게는 요 몇 년간 가 삶의 전부였다.
재희가 자신을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던 건 이 감정을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존경, 동경,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들이 정언을 움직였다. 그렇기에 정언은 재희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공연히 그 이상을 욕심내다 지금의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윤이 자신에게 뭘 바라는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윤의 태도도, 간혹 드러내는 감정도, 서로의 모호한 거리도 정언에게는 전부 낯설었다. 정언은 선을 넘고 싶다는 욕망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저, 제보자 어디서 만나기로 했죠?”
뚫어지게 응시하는 시선에 눈치가 보였는지, 윤이 공연히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정언은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를 가리켰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건물 지층 전체를 쓰는 널찍한 매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먼저 앞장서 카페로 들어간 윤이 정언을 돌아보았다.
“뭐 드실래요?”
“김 피디 마시는 거.”
별생각 없이 대답한 정언은 구석 자리에 앉아 인터뷰 준비를 시작했다. 노트북을 펼치고 초소형 카메라가 든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정언은 모듈을 연결해 앵글을 확인했다. 그사이 아이스 카페모카 두 잔을 사서 돌아온 윤이 한 잔을 정언의 앞에 놓았다.
정언은 눈만 들어 휘핑크림을 올린 커피를 흘끔 보았다. 윤의 손에도 똑같은 커피가 들려 있었다. 돔 리드 안까지 알차게 채워진 휘핑크림을 본 정언은 저도 모르게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카메라 위치를 조절하며 말했다.
“나 단 거 안 좋아해.”
윤이 그 말에 움찔하며 당황하다 황급히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뭐 다른 걸로…….”
“됐어. 그냥 해 본 소리야. 송 작가님이 제보자 연락처 보낸 거 있지? 전화해 봐, 지금.”
내버려 두면 정말 다른 걸 사 올 기세라, 정언은 말을 끊으며 내뱉었다. 머뭇거리던 윤이 네, 하며 자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세팅을 마친 정언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카페의 전면 창을 마주 보는 위치의 자리에서는 바깥 거리가 훤하게 보였다.
옆자리에 앉은 윤이 통화 연결을 기다리는 듯 핸드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아, 하며 자세를 고쳤다.
“네, 안녕하세요. 제작진입니다. 오늘 만나 뵙기로 했는데…… 아, 네. 여기 두호시장 근처 카페입니다. 네, 맞습니다. 제일 큰 카페요. 아, 네. 네, 기다리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마친 윤이 전화를 끊었다.
“근처에 계신다고 금방 오시겠대요.”
정언은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 뒤로 따라오는 우유와 시럽, 휘핑크림의 하모니는 한 모금 들어간 순간 두통이 날 정도로 달았다. 아주 화가 나거나, 아주 견디기 힘들 때가 아니면 이렇게 단 걸 먹는 일은 드물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는 정언의 얼굴에 윤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진짜 다른 걸로 사다 드릴게요. 피곤하신 것 같아서 일부러 샀는데…….”
정언은 대답 대신 휘핑크림을 산처럼 쌓아올린 윤의 컵에 눈을 주며 물었다.
“원래 단 거 좋아해?”
“자주 먹는 건 아닌데…… 기분 좋아지잖아요.”
윤이 머쓱한 표정으로 목을 조금 움츠리며 대답했다. 단맛의 잔상이 입 안에 남아 감돌았다. 쓸데없이 세심한 것도 천성일까, 정언은 문득 그런 것을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윤이 다시 한 번 선배, 하고 불렀으나 정언은 손을 내저었다.
“그냥 마실 테니까 제발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좀 더 친절하게 말해 줄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한 건 역시나 말을 뱉은 후였다. 괜히 조금 민망해져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정언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랜차이즈 카페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한 초로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선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