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81
81화.
어깨가 구부정한 남자가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이 그에게 다가가 뭐라고 몇 마디를 건네더니 곧 남자를 이쪽으로 안내했다. 남자가 쓰고 있던 낡은 모자를 벗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가벼운 묵례를 마주 건넨 정언이 그에게 물었다.
“로 연락 주셨던 이후현 제보자님 맞으신가요?”
“예, 맞습니다.”
후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랜 시간 끽연을 해 온 사람 특유의 끓는 듯한 쇳소리가 칼칼한 목소리 끝에 섞여 있었다. 정언은 이런 장소가 영 어색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후현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김 피디, 우선 뭐 하나 시켜 드려. 뭐 좋아하세요?”
“아이구, 이런 데는 잘 몰라서…… 그냥 주스로, 주스로 주세요.”
윤이 후현의 말을 듣자마자 카운터로 뛰어갔다. 잠시 후 오렌지 주스 한 잔을 가지고 돌아온 윤이 후현의 앞에 컵을 놓아 주었다. 후현은 주스 몇 모금을 마시더니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정언은 그가 긴장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제보자들을 만나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정언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신원 보호는 확실하게 해 드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편안하게 제가 질문하는 말에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힘드신 부분은 굳이 대답 안 하셔도 되고요.”
“예.”
“저희 작가님하고 먼저 통화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예, 아이, 그 뭐냐…… 텔레비전 보는데 자막으로 신도시 현장에서, 그런 거 제보해 달라고 나오더라고요. 제가 올 초까지 진송신도시 현장에서 일하다가 여기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내가 원래 여기가 고향인데 일 때문에 서울 올라간 지 한 이십 몇 년 됐거든요. 안사람 먼저 죽고, 현장 나가서 일하다 우리 딸이 여기서 시집을 갔는데 아빠 고생한다고 내려오라고 그래서…… 내가 그거 보고 딸한테 부탁해서 인터넷에 글 좀 올려 달라 했지요.”
후현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정언은 노트북으로 후현의 말을 받아 적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셨던 거죠?”
“그러니까 그게, 작년부터 한 반 년인가…… 원래 경비 일 하다가 그만두고 아는 사람 소개로 같이 간 거거든요.”
“반년이요. 서온건설이 현장에서 별도 용역을 고용해서 인부들을 감시했다고 하셨다는데, 사실인가요?”
“어휴, 내가 살다 살다 그런 놈들은 처음 봤습니다.”
용역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후현이 질색하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후현이 잠시 기억을 되짚는 듯 눈알을 굴리더니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십장이 아주 단단히 주의를 주더라고요. 여기는 다른 현장하고 달라서 인부 관리가 아주 철저하다, 규칙 어기면 즉시 해고다 뭐 이러면서…… 저는 다른 데서 일을 안 해 봤으니까, 그런 노가다판은. 그래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지요. 했는데, 이게 사람을 아주 막 못 살게 구는 겁니다. 인부들이 점심 먹으러 모여서 잠깐 잡담을 해도 그 깡패들이 딱 붙어 가지고 옆에서 다 듣고 있으니까. 경비일 할 때도 뭐 그, 입주자 대표 그런 사람들이 못 살게 구는 건 있었지마는 그런 데서도 그렇게 할 줄은 몰랐지요.”
“혹시 용역업체에 기억나는 사람 있으세요?”
“그, 거기 계장이 하나 있어요. 키 작고 걸걸한 사람인데, 조창식이라고. 그게 용역 대빵 시다바리라고 그러데요.”
정언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췄다. 조창식.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뿌려 둔 조약돌을 주워 가며 길을 되짚어 오듯, 몇 번이나 마주치게 되는 그 이름. 정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조창식 계장이 관리 감독을 해 왔다는 거죠?”
“예. 그러니까 그게 내가 나중에 그거를 알았어요. 내가, 예전부터 거기 용역 하는 손경일이를 건너건너 알았다고요. 손경일이 밑에 있는 게 조창식이다, 그건 내가 나중에 알았지.”
“경일용역 손경일 사장 말씀하시는 겁니까? 원래 알고 계셨다고요?”
정언은 생각도 못 한 말에 노트북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정언의 놀란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후현이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면도가 덜 되어 짧은 수염이 하얗게 올라온 턱 부근을 긁적였다.
“아, 예. 그 경일용역 손경일, 그놈이 여기 포항 출신이에요. 지금 서온건설 사장 하는 남제선이, 남제선이랑 손경일이랑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어요. 우리가 포항중학교 동문이란 말입니다.”
순간 입이 바짝 말랐다. 정언은 앞에 놓인 커피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채 후현을 뚫어지게 마주 보았다.
“서온건설 대표하고 손경일 사장이 언제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중학교 동문이라니까요. 남제선이가 우리보다 한 한두 살 더 많았나, 그거는 내가 지금 기억이 안 나고. 암튼 그때부터 남제선이는 유명했지요. 원래 그, 서온건설이 포항에서 유명한 지방 건설사였단 말이에요. 그때는 서온건설이 아니고, 이름이 뭐였더라…… 남, 무슨 건설이었는데.”
기억을 더듬으며 느릿느릿 말하는 후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언은 모니터에 ‘송 작가님한테 지금 나온 얘기 말씀드리고 관련 내용 서치 부탁해, 바로 연락 달라고 해.’라고 적어 윤에게 슬쩍 보여 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윤이 핸드폰을 들고 잠시 자리를 떴다. 정언은 후현에게 물었다.
“그러면 굉장히 오래된 인연인데요.”
“그렇지, 당시에 남제선 하면 위세가 아주 대단했다고요. 그 시절에 기사 딸린 자가용으로 학교 왔다 갔다 했으니까. 손경일이는 그, 어릴 때부터 양아치여 가지고. 부모가 일찍 죽고 지 할매 할배랑 살았는데, 영 질이 안 좋았지요. 그런데 남제선이 그거를 돈 몇 푼 쥐여 주면서 자기 시다바리로 데리고 다녔다는 거 아닙니까.”
“아버님은 그 사실을 다 알고 계셨다는 거죠?”
정언이 확인하듯 재차 묻자 후현이 마른기침을 뱉고는 손을 내저었다.
“그거는 그때 포항중 그 동네 살던 사람이면 다 알아요. 근데 그 남제선이도 부친이 일찍 죽었다고요. 아직 젊은데 큰 회사가 손에 떨어지니까 남제선이 그걸 관리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을 건데, 나는 그 뒤 얘기는 잘 모르지요. 서울로 올라갔으니까. 그러고 몇 십 년 지나서 내가 서온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그 손경일을 거기서 본 겁니다.”
서온건설이 본래 지방 건설사에서 시작한 회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이미 95년 을정신도시 개발 현장에서 서온건설과 경일용역이 파트너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영상도 본 뒤였다. 오래된 결탁이었으나, 그들의 인연이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다는 건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정언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 서온건설이 수도권으로 진출할 때 경일용역도 같이 올라온 거라고 봐야겠네요.”
“그것까지는, 뭐 그런 자세한 얘기까지는 나는 잘 모르지요. 아무튼 나는 그것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현장에서 조창식이가 손경일 사장님, 손경일 사장님 하는 거 듣고 알았단 말이에요. 손경일이가 가끔 현장에 왔으니까. 늙었으니까, 까까머리 하고 돌아다닐 때만 알다가 다 늙어서 보니까 내가 얼굴은 못 알아보고 그냥 어디서 들은 이름이네, 그러고 말았다가 나중에 안 거지.”
“손경일 사장도 아버님을 알고 있었습니까?”
“아이, 아니지. 우리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고요. 손경일이는 학교 다닐 때 워낙 날렸으니까, 그래서 내가 알고 있었던 거지.”
후현이 손을 저었다. 미간을 누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언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희가 다른 제보자 분에게 들은 얘기로는 현장에 자재 문제가 있어서 이 얘기가 새 나가지 않도록 인부들을 감시했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사실입니까?”
정언의 물음에 후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괴로운 듯한 표정이었다.
“아휴, 그게…… 갑갑하네. 그게, 그것도 원래 우리 같은 일반 노가다꾼들은 그런 거 몰라야 된다고요. 솔직히 무슨 자재를 뭐 어떻게 쓰는지, 그런 걸 알 일이 뭐가 있어요. 그런데 이제, 현장 사무실 나와 있던 박 과장이라고, 그 사람이 이게 문제가 있다 이걸 알려 준 거죠.”
“박규형 과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이름은 정확히 모르겠어요. 키가 크고 인상이 좋은 사람인데. 한 서른대여섯이나 먹었나, 젊은 사람이라고요. 그 사람이 현장에서 우리가 쓰는 게, 그 뭐? 무슨, 뭐라는 안 좋은 물질이 많이 나와서, 정부에서 사용 제한을 한 자재니까 쓰지 마라. 안 쓰기로 한 건데 왜 쓰냐, 작업하는 인부들한테도 아주 안 좋다. 그리고 자재를 너무 부족하게 쓴다, 문서하고 다르다, 이렇게 하면 부실 공사다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창식이하고도 싸우고, 본사 직원들하고도 싸우고. 그거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봤죠.”
후현의 말을 들으며 정언은 해나가 걸어 온 전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같은 내용의 증언을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규형이 현장에서 자재를 속이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이 점을 지적했다가 본사에 밉보였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후현이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투로 덧붙였다.
“그게 그 아파트가, 진짜로 올라가면 안 되는데 말이에요. 우리도 모르고 공사를 했지만은 거기 쓴 게 어린애들한테 아주 안 좋은 뭐라고 하데요, 박 과장이. 자기도 애가 있는데, 어린 애기들 있는 사람들이 이 아파트 많이 샀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그게 애기들한테 정말로 아주 안 좋다고 그래서 싸운 거지.”
신축 건물의 유해 자재로 인해 아이들에게 원인 불명의 아토피나 알레르기, 호흡기 질환이 발병하는 경우는 흔했다. 에서도 몇 차례 방송한 적이 있었고 아직도 꾸준히 제보가 들어오는 케이스였다. 그 정도의 대단지 전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부실 공사로 인한 위험이었다. 이런 식의 날림 건축으로 입주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만에 하나, 그 때문에 건물이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그나마 진송신도시 실제 입주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다는 것만이 한 가지 다행스러운 부분이었다. 이렇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방송해야만 하는 이유가 추가된다는 건 정언에게 묵직한 책임감을 안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