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82
82화.
속이 답답해졌다. 만약에 규형이 죽지 않았다면, 희경이 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이 사실이 영원히 묻혀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자재 때문에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었나요?”
“바닥재가, 바닥재에서 주로 그런 게 많다고 하대요. 나는 뭐 그쪽 일 오래 하진 않았으니까 들어도 잘 모르고…… 그거 작업하는 사람들이 냄새가 아주 독하다, 머리가 아프다 이런 소리를 자주 하기는 했어요.”
“이의 제기를 하신 분들은 없었고요?”
“아휴, 뭐 조금 불평 같은 것만 해도 그놈들이 눈깔을 부라리고 그러는데 겁나서 누가 그럽니까. 그런 일 있으면 그냥 안 나와 버리는 거예요. 병원비 따로 주고 그러는 것도 없으니까.”
후현이 다시 마른기침을 뱉었다. 그때 통화를 마쳤는지 돌아온 윤이 정언에게 귓속말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송 작가님이 안 그래도 그거 관련한 정보가 있다고, 메일로 바로 보내시겠대요. 일단 인터뷰 마치면 내용 공유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핸드폰에서 메일 알람이 울렸다. 보낸 사람이 민혜인 것을 먼저 확인한 정언은 후현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제가 급하게 확인해 봐야 할 부분이 있어서요. 잠시만요.”
정언은 노트북으로 서둘러 메일함을 열었다. 민혜가 보낸 메일에는 몇 개의 기사 링크와 첨부파일이 들어 있었다. 짧은 메일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서온건설 전신은 경북 지역 기반 건설사 남정건설. 창업주는 남제선 조부인 남평환, 2대는 아버지인 남강웅. 남강웅이 사망하면서 남제선이 기업 승계하는 과정에서 정계 로비로 규모 키움. TK 출신 의원들에게 정치자금 댔다는 의혹 있지만 증명 불가. 지역 신문 아카이브에서 예전 기사 찾아 보냄.
클릭해 본 기사는 남평환과 남강웅에 대한 것이었다. 수십 년 전 에 실린 기사 몇 꼭지였다. 대부분 지역 건설 수주에 관한 것으로, 특별한 내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정언의 시선을 끈 건 마지막 링크였다.
거기에는 남강웅이 공사 수주를 따 낸 자리에서 여러 사람과 기념 촬영을 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오래전 신문이라 화질이 나쁜 탓에 윤곽이 뭉개진 얼굴을 확실히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 사진을 응시하던 정언은 일단 창을 닫았다. 고개를 든 정언이 다시 후현을 마주 보았다.
“죄송합니다. 음, 아까 말씀하신 박 과장님이나 조창식 계장, 손경일 사장 관련해서 뭐 생각나는 건 더 없으시고요?”
정언의 물음에 후현이 턱 부근을 긁적거렸다.
“글쎄요…… 그 뭐, 박 과장이 우리한테는 아주 친절했어요. 깡패들이 사람 감시하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때리고 이러니까 그럴 때마다 박 과장이 여러 번 막아 줬다고요.”
“때렸다고요? 경일용역 사람들이 현장 분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거죠?”
“아이, 네. 그렇지요. 지 애비뻘은 되는 사람들을 얼마나 험악하게 막 그러는지 사람들이 꼼짝도 못 했어요. 현장에서 생긴 일은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처음에 현장 들어가서 그 뭐 계약서, 그런 거 쓸 때 지장도 다 찍었다고요. 지장 찍었으니까 지문 다 있고, 지문으로 못 찾는 게 없다면서. 쓸데없는 얘기 하면 자기들이 쫓아가서 죽여 버린다고, 얼마나 무섭게 막 그랬는지 몰라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이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정언을 보았다. 잠시 윤과 눈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눈 정언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 저희한테 이렇게 제보하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나야 뭐 이제 여기까지 내려와 있고, 그 작가인가 그분하고 얘기를 할 때 그러더라고요. 절대 나인 거 모르게 잘 해준다고.”
“네, 그런 부분은 절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정언은 후현을 안심시키려 다시 한 번 다짐을 두었다. 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은 나도 고민이 많았지요. 딸하고 사위는 하지 말라고, 세상이 너무 무섭다고 막 걱정을 하는데…… 내가 손자 손녀가 하나씩 있습니다. 이제 두 살, 네 살 된 것들인데 고만한 애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데서 산다고 생각을 하니까. 텔레비전에서 제보해 달라고 그러는 거 보고 나서 박 과장이 애들한테 그게 너무 안 좋다고, 진짜라고 막 그러던 게 떠오르니까 며칠 잠이 안 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박 과장 그 사람 잘 지내나 모르겠네요.”
불시에 파도가 덮치듯, 예상하지 못한 말에 순간 마음 한구석이 얼핏 무너졌다. 타인들의 입으로 한 사람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은 정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간혹 지금처럼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사람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아직 살아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 사람이 세상에 조금 더 오래 존재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칠 때면 따스한 동시에 스산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아까 포항중학교 얘기 하셨는데, 저희가 혹시 남제선 사장이나 손경일 사장에 대해 확인해 볼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아버님 졸업앨범 같은 건 너무 오래돼서 없으실 것 같고…….”
정언은 말을 돌렸다. 규형의 죽음에 대해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후현이 잠시 기억을 더듬듯 눈을 굴리다 말했다.
“앨범 그런 거는 잘 모르겠고, 이사를 많이 해서 그사이에 없어진 거 같아요. 그 동네에 우리 어릴 때부터 하던 해장국집이 아직도 있어요. 거기 주인이, 지금은 며느리가 하는데 가게가 아주 크게 됐죠. 거기 주인이 동네에 대해서는 잘 아니까. 재개발이 돼 가지고 옛날 사람들이 많이 떠나긴 했는데 아마 기억은 할 겁니다. 당시에 동네에서 남제선이 모르면 간첩이었으니까.”
대답한 후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 표시된 시계로 눈을 주었다. 정언은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가 시간 너무 많이 뺏은 건가요?”
“아, 저기, 오늘 우리 딸하고 사위하고 손주들하고 다 같이 저녁 먹자 했거든요. 내가 여기 온다고 하니까 사위가 퇴근하고 데리러 온다고 해서…… 올 시간이 다 됐습니다.”
후현이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카페 앞으로 차 한 대가 섰다. 창가를 보고 있던 정언은 뒤쪽을 가리켰다.
“지금 도착하신 것 같은데요.”
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차의 뒤쪽 좌석 창이 내려가며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먼저 얼굴을 내밀었다.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동그란 얼굴은 기껏해야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아이가 뭐라고 입을 벙긋거렸다. 아마 할아버지, 라고 부르는 듯싶었다.
정언은 웃으며 말했다.
“가 보셔야 되겠네요. 아버님, 혹시 저희가 더 여쭤볼 게 있으면 다시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예, 그럼요. 저기, 죄송합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오셨는데, 제가 뭐 도움을 크게 드리지 못하고…… 제가 갔어야 하는데 나이가 드니까 몸이 아무래도 여기저기 아프고, 오래 걷기가 힘들고 그래서요.”
후현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닙니다. 저희 만나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손을 저은 정언은 윤에게 모셔다 드리라는 뜻으로 슬쩍 문 쪽을 가리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이 후현을 안내해 문 밖으로 나갔다. 창밖을 계속 보고 있던 정언의 눈에 자동차 뒷좌석에서 후현의 품을 파고드는 아이들이 비쳤다.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삼십 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정언에게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딸일 터였다. 가벼운 묵례로 답을 하자 곧 창이 닫히고 자동차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정언은 차가 사라진 자리에서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언은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너무나 쉽게 무너뜨리는 그림자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까닭이었다. 정언은 잠시 이마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희경과 두 딸, 해나, 후현과 그의 가족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여느 날과 똑같은 삶을 항상 지킬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지금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그것이 너무 큰 소원이 아니기를.
“선배, 괜찮으세요?”
곁에 앉은 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짧은 사이 윤에게 묻어 온 저녁 바람이 찰나에 밀려왔다. 대답 대신 잠시 침묵하던 정언은 테이블 위에 시선을 둔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 서울 못 올라갈 것 같아. 확인해야 할 게 많은데 시간이 너무 늦었어. 일단 내일 아침에 바로 포항중학교 들러 보고, 동네에서 탐문도 좀 하고. 송 작가님 메일 보니까 참조로 김 피디 넣어 놨던데 노트북 가져왔지? 이따 메일 내용 확인해 보고 얘기 좀 하자. 에 들러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라고.”
“어디서요?”
진심으로 당황한 말투에, 정언은 눈을 들어 윤을 보았다.
“모텔이고 호텔이고 널렸는데 왜, 길바닥에서 자려고? 노숙 취미 있어?”
“아, 아뇨!”
윤이 화들짝 놀라 도리질을 쳤다. 그새 달아오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한 건데?”
놀리듯 묻자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진 윤이 아무것도요,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피식 웃은 정언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을 응시했다. 먼 지평선 부근으로 노을의 흔적이 붉은 잉크가 번진 선처럼 얇게 띠를 그렸고, 그 위로 푸른 어둠의 그러데이션이 광활하게 내려앉았다.
잠시 거기 눈을 두고 있던 정언은 카메라를 정리하고는 남은 커피를 마셨다. 정언과 나란히 앉아 창 쪽을 보고 있던 윤이 입을 열었다.
“선배는 겁 안 나세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아침에 이사회실 앞에서 그런 것도 그렇고, 지금 우리가 취재하는 것도 그렇고…….”
윤이 말끝을 흐렸고, 정언은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사람인데 안 그럴 수는 없겠지. 그런데 생각 안 해. 생각이 많으면 몸이 안 움직이니까.”
“그래도…….”
“죽는 날 받아 놓고 사는 사람도 있나? 가는 건 순서 없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오늘 겁내서 뭐해.”
정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윤이 그 말에 뭐라고 말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그때 정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