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83
83화.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집어 든 정언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즉시 전화를 받았다. 선준이었다.
“어, 현 기자.”
선준의 쾌활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사무실 갔더니 너 지방 내려갔다고 그러더라. 그날 말했던 자료 있잖아. 디지털화한 건 지금 다 메일로 보냈고, 나머지는 자리에 뒀어. 송 작가님이 먼저 보겠다고 하던데.』
“아, 맞다. 고마워. 정신없었을 텐데, 거기 좀 어때?”
정언의 물음에 선준이 어휴, 하고 과장이 한껏 들어간 한숨을 쉬고는 웃었다.
『난리였지 뭐. 점심시간 지나고 오진문 이사 뒷문으로 들어오려다 걸려서 아주 가관이었다는 거 아냐. 우리끼리 보기 너무 아까워서 이따 뉴스 내보낼까 하는 중이야. 아무튼 이사회는 취소됐어.』
“다행이네.”
『그치. 겨우 이제 다들 한숨 돌렸다, 여긴. 그리고 전 부장님이 너 대체 뭐하는 거냐고 엄청 궁금해하셔서 아직은 말씀 못 드린다고 했어. 너 오면 잠깐 사무실 좀 들러 달라고 얘기 전해 달라시더라.』
“그래, 알았어.”
『갔다 와서 봅시다. 끊는다.』
짧은 통화였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정언은 노트북으로 다시 메일을 확인했다. 선준이 보낸 자료들은 양이 상당했다. 눈으로 목록만 먼저 훑어 본 정언은 그 메일을 윤에게 다시 포워딩하고는 노트북을 덮었다.
“현선준 기자야. 회사 상황은 좀 정리됐나 보네.”
“이사회 취소됐대요?”
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언은 미간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응. 일단 저녁부터 먹고, 방 잡아서 자료 온 것 좀 체크하자. 현 기자한테 받은 거 메일로 보냈으니까 이따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미치겠다. 시간이 너무 없네, 진짜.”
뒷목이 뻣뻣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젖힌 정언은 허공으로 한숨을 뱉었다. 천장의 조명이 쏟아져 눈이 시렸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정언은 곧 자세를 고쳐 앉으며 노트북과 선을 정리해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사이 정언이 커피를 다 마신 것을 본 윤이 서둘러 테이블 위를 치웠다. 가방을 메고 카페를 나서자 제법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조금 전 윤에게 묻어 있던 그 바람이었다. 윤이 뒤에서 선배, 하고 부르더니 곧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의 시동을 건 윤이 걸어가며 말했다.
“선배, 우리 저녁 맛있는 거 먹어요.”
정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래, 하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문득 그 말이 아주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우리, 저녁, 맛있는 거 먹어요. 여상하고 부드러운 단어들이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 평범함이 낯설어, 정언은 불현듯 윤에게 눈을 주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윤이 고개를 돌려 정언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투명한 물에 잉크를 떨어뜨리듯 그 흰 얼굴로 순식간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처럼 웃는 그 얼굴에 정언은 시선을 붙들렸다.
“왜요?”
말없이 빤히 보고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윤이 물었다. 이 기묘한 기분은 아마 지나치게 달았던 커피 탓일 거라고 생각하며, 정언은 대답 대신 앞을 보았다. 내려온 어둠이 더 짙어진 것이 다행이었다.
입 안에 남은 시럽과 휘핑크림의 단맛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 * *
바닷가니 꼭 회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해 영일대 근처의 횟집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식사를 한 뒤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비즈니스호텔에 나란히 방을 잡은 뒤 이따 보자, 하고 건넨 인사가 정언이 저녁 시간 한 말의 거의 전부였다. 그게 어쩐지 걱정돼, 방으로 들어온 뒤에도 내내 신경이 쓰였다.
조용한 방에 앉아 정언을 생각하던 윤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리모델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호텔은 비수기라 그런지 한산했다. 윤이 들어온 싱글 룸은 투숙객이 최소한 며칠쯤은 일절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둘러 샤워를 마친 윤은 침대에 잠시 누워 눈을 감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닫혀 있던 커튼을 열자 바다에 면한 창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하얗게 밀려왔다 부서지는 포말이 선명했다. 물과 땅의 경계를 흐리는 어둠 속에서, 윤은 잠시 불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흰 선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윤을 현실로 돌려놓은 건 사이드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퍼뜩 뒤를 돌아본 윤은 몸을 숙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메일 확인해서 내용 정리되면 내 방으로 와.
짧은 메시지는 정언의 것이었다. 윤은 덮어쓴 수건으로 아직 젖은 머리를 몇 번 대충 털어 내고는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민혜의 메일과 정언이 포워딩해 준 현준의 메일을 전부 확인하고 내용을 대충 파악하는 데는 의외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민혜의 메일 내용은 통화를 하며 대강 들은 것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현준에게서 온 메일은 서온건설 게이트 관련 취재 내용이었다. 파일명에 ‘비공개’라고 따로 붙인 것은 보도하지 못한 자료들인 듯했다.
한참 시끄러울 때도 뉴스에서 헤드라인만 보고 지나쳤던 것이 전부라, 이렇게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는 건 처음이었다.
소위 ‘서온건설 게이트’의 골자는 서온건설이 국토위 소속 여당 의원들과 국토부 장차관급 인사 일부에 수년간 금품 등의 뇌물을 제공했고, 그들이 그 대가로 서온건설 측에 신도시 개발 및 각종 SOC9) 공사 수주 특혜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수사를 담당했던 이정수 검사와 진형은 검사는 애초에 서온건설을 이들에게 연결시켜 준 사람이 엄대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서온건설 대표 남제선은 엄대진이 TK 지역구를 기반으로 세력을 다져 나가던 정치 신인 시절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 친분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엄대진이 수도권으로 지역구를 옮기며 차세대 대권 주자 물망에 오르기 시작한 것과, 지방 건설사에 불과했던 서온건설이 수도권으로 진출하며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거의 일치했다. 둘의 관계는 겉으로 말하지 않을 뿐 모두가 아는 비밀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착은 철저해졌고, 엄대진과 서온건설의 힘 역시 무소불위로 강해졌다.
한선당 내부에서 소위 말하는 ‘엄대진 라인’은 당내 주류 세력이었다. 서온건설은 그 엄대진을 통해 여당 주류 의원들과 가장 파워 있는 보수 일간지 를 등에 업었다. 톱 5 건설사 규모로 성장한 서온건설은 수많은 사업에 손을 뻗쳤다.
서온건설 게이트가 터지자마자 검찰이 엄대진을 정조준한 건 당연했다. 서온건설에서 하청을 받기 위해 국토위 소속 한선당 의원들에게 향응과 금품을 제공했다고 제보한 업체들만 해도 한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였다.
모든 상황이 확실했다. 뇌물을 받은 정치권 인사들이 차명으로 서온건설 아파트 분양권 혜택을 받았다는 증거도 속속 발견되었다. 심지어 서온건설 직원들을 뇌물 전달책으로 쓴 정황도 발견됐다. 전달책이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검찰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엄대진과 한선당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민권당의 여성철 의원이었다. 엄대진 게이트가 물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를 필두로 모든 언론이 즉시 야당과 검찰의 정치 공작이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엄대진 측은 대권 주자 죽이기다, 불경기인 건설업을 더욱 침체시키는 중상모략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의 변순철은 이런 일이라면 이골이 날 대로 난 사람이었다. 그는 애초에 정치인 사위를 맞이했을 때부터 이런 일을 준비했던 사람처럼 보였다.
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역으로 야당에 뇌물 프레임을 뒤집어씌웠다. 서온건설에 정치 자금을 요구했다 거절당한 여성철 의원이 보복성으로 국회 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터트렸다는 것이었다.
팩트를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거짓을 사실로 만드는 건 쉬웠다. 한선당과 는 여성철 의원과 민권당 측에 ‘뇌물을 요구한 적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맞섰다. 그러나 뇌물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걸 명백히 증명할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언론을 중심으로 여론이 돌아서기 시작하자 증인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그 중 가장 큰 치명타는 공판에 출석하기로 한 검찰 측 증인의 죽음이었다. 서온건설 직원으로 금품 전달을 담당했다는 직원이 공판 전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 것이었다.
사인은 교통사고라고 했으나, 출석을 약속한 증인들은 그 일로 전부 증언을 거부했다. 담당 검사들이 수세에 몰린 건 순식간이었다. 엄대진에게 흘러들어 간 자금 흐름의 추적도 쉽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국토부 차관급 인사 두 명이 사직하고, 엄대진계 초선 비례의원 한 명이 벌금형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데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담당 검사였던 이정수 검사와 진형은 검사가 인사 보복을 당하고, 민정수석이 라인인 신환석으로 교체되면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침대에 엎드려 턱을 괴고 자료들을 살펴보던 윤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불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희경이 쓴 글을 처음 읽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일이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집에서 알면 기절하시겠지, 하고 생각한 윤은 헛웃음을 뱉었다. 실은 가족들에게 아직 에서 잘리고 에서 일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였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든 몰랐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얘기할 날이 오겠지 뭐, 하고 태평하게 생각한 윤은 노트북을 챙겨 옆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정언이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들어와.”
정언의 머리칼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희미하게 물 냄새와 비누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스치고 지났다. 심장이 덜컥하는 감각에 잠시 머뭇거린 윤은 정언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펼쳐 두었던 노트북이며 다이어리 따위를 정리해 테이블 위에 놓은 정언이 스툴에 걸터앉으며 윤에게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정리 좀 됐어?”
9) SOC : 사회 간접 자본(social overhead capital)의 약자. 도로, 철도, 항만, 통신, 전력, 공공서비스, 교육?보건 시설 등 생산 활동에 기하는 자본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