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85
85화.
“안 갈 거야?”
정언이 앉아 있는 윤을 내려다보았다. 윤이 잠시 주저하자, 정언이 들고 있던 캔을 윤에게 건네고는 다시 새 캔을 꺼내 들었다. 얼결에 받아 든 캔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윤이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캔을 딴 정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마시고 가서 자.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정언은 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침대에 걸터앉은 정언의 시선은 어두운 창 너머를 향해 있었다. 짙게 깔린 어둠 너머로 부서지는 파도는 하얗고 희미했다.
윤은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내려다보다 한 모금을 마셨다. 떫은 듯 씁쓸한 탄산과 알코올 향이 익숙하게 넘어갔다. 그 차가움에 한순간 머리가 찡하게 울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자, 창에 비친 윤을 보고 있던 정언이 입을 열었다.
“김 피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윤은 퍼뜩 눈을 들어 정언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의 단어들이 전부 지워졌다.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있는 말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윤은 잠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어두운 창에 등을 돌리고 앉은 정언의 얼굴이 비쳤다. 윤은 그 창을 통해 정언의 눈을 보았다. 거울 속의 상을 보듯, 정언 역시 창에 비친 자신의 눈을 보고 있었다. 정언이 말없이 맥주를 조금 마시고는 고개를 숙였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가 돌아온 건 직후였다.
“이런 말 아주 웃긴다고 생각할 거 아는데, 나한테 어떤 인간적인 부분 바란다면 미안하지만 난 원래 그런 거하고는 인연 없는 사람이야.”
무감한 말투였다. 어떤, 인간적인, 부분. 세 어절로 표현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윤은 잘 알고 있었다. 열이 오르는 듯 목덜미가 뜨거워졌으나, 정작 머릿속은 얼어붙었다. 온몸이 순간적으로 굳어 버려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언이 말을 이었다.
“난 누구하고든 일정한 거리 있어야 한다고 믿어. 그게 좋은 관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서로 볼 필요 없는 부분까지 보게 되니까. 내가 쉬운 사수 아니라는 거 잘 알아. 김 피디가 이렇게 따라와 주는 거 정말 고맙고. 그러니까 서로 선 넘지 않았으면 좋겠어. 좋은 선배 원하는 거라면 내가 더 노력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업무 외적으로 내가 김 피디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자로 잰 듯한 단어들이었다. 그 사이마다 그어지는 선은 명백했다. 분명히 귀로 듣고 있는데도 그 말을 전부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윤은 숨을 들이쉬었다. 누가 심장을 쥐고 있는 것처럼 호흡이 내려가지 않았다.
“선배.”
그 짧은 단어를 발음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모래를 씹은 듯 말라 버린 입 안이 까끌거렸다. 손에 쥐고 있는 캔 표면에 습기가 맺혀 찬 물기가 옅게 스몄다. 몸이 떨리는 건 아마 그 차가움 때문일 거라고 애써 생각하며, 윤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 보고 얘기하시면 안 돼요?”
지금의 자신은 아주 형편없는 꼴일 게 분명했다. 창에 비치는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윤은 시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윤은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마셨다. 입술에 닿은 캔에서 스미는 냉기에 몸이 떨렸다. 숨도 쉬지 않고 절반쯤은 비운 것 같은데도 여전히 입 안은 바짝 마른 채였다. 정언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선배, 저 보고 얘기하세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윤은 다시 한 번 말했다. 말끝이 갈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밀어내지 말라고 애원해야 할까, 아니면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어야 할까. 들이쉬는 숨에도 가슴 어딘가가 베인 듯 아릿했다. 침묵하던 정언은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좋은 생각 아닌 것 같은데.”
그 목소리만으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모든 신경이 스위치를 내려 버린 것 같았다. 뭐든 생각해 보려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윤은 들고 있던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 더 이상 들고 있을 수가 없는 탓이었다.
정언과 자신의 거리는 고작 두어 걸음도 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정언을 붙들고 자신을 보게 만들 수도 있었다. 방 안에 떠도는 습하고 희미한 향이 문득 선명했다. 물기가 덜 마른 정언의 머리칼에서 스치던 향이었다.
윤은 무의식중에 습기로 젖은 손을 말아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정언과 더 가까이 있다면, 손을 뻗었을 때 바로 정언에게 닿는다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을 마주 보게 하고, 그 손을 잡고, 그리고, 어쩌면.
어린애는 아니었다. 윤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욕망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바람을 깨닫는 순간 얼굴로 열이 몰렸다. 다음 순간 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윤은 겨우 웃는 얼굴을 했다.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저 좀 취했나 봐요. 피곤하실 텐데 일찍 주무세요. 내일…….”
아무렇지도 않은 척 꺼낸 말의 끝이 순식간에 잠겨 들었다. 윤은 공연히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처럼 두어 번 마른기침을 했다. 정언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얄팍한 속임수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 뵈어요.”
정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 하고 말했을 수도 있지만 설령 그랬다 해도 지금은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테이블에서부터 작은 싱글 룸의 문을 빠져나오는 건 몇 걸음이면 충분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등 뒤에서 문이 닫힌 순간, 완전히 무너진 윤은 벽에 기대섰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고작 그 몇 걸음을 견디는 데 모든 이성이 다 소진된 것 같았다. 어떻게 말했어야 할까. 그런 게 아니라고, 전부 오해라고, 난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그 중 무엇도 답이 될 수는 없다는 걸 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언에게 바라는 건 정언의 표현대로 ‘어떤 인간적인 부분’이었다. 자신이 정언의 선 안을, 그 뒷면을, 그림자를 본다고 느꼈을 때 윤은 결코 그게 착각일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윤은 벽에 머리를 대며 눈을 감았다. 심장 한구석이 선뜩했다. 불현듯 종이에 베인 상처처럼, 어딘지도 알 수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아픔이 지났다. 윤은 떨리는 손끝으로 셔츠 위를 더듬어 그러쥐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끝에서부터 부드러운 천이 부정형의 패턴을 그리며 구겨졌다.
내내 단 한 번도 자신을 보지 않던 정언의 뒷모습이 감은 눈 안으로 떠올랐다. 창을 온통 물들인 밤빛에 그 눈동자가 녹아들어, 비친 상으로는 정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왜 자신을 보지 않았을까. 윤은 멍하니 그런 것을 생각했다.
가까워진다는 건 타인의 어떤 부분이든 감수하게 되는 일이다. 그 가장 어둡고 약한 일면까지도. 정언이 누구에게나 거리를 두는 것은 그런 부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 게 분명했다. 그건, 결국 겁이 나기 때문이다…….
윤은 그 두려움을 이해했다. 정언과 자신은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는 건 불가능했다. 밀려나는 것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센서 등이 꺼지며 옅은 어둠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존재할 리 없는 어둠의 무게가 실려 왔다.
윤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이 벽 하나 너머에 정언이 있다는 사실은 윤에게 얕은 안도감을 주었다. 윤은 눈을 감았다. 그 안도감이 소용돌이치는 감정 위로 엷은 베일처럼 내려앉았다.
정언이 어떤 말로 자신을 밀어내든, 내일 아침이면 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것. 결국은 지금과 무엇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 마치 그런 일은 일어난 적도 없다는 것처럼.
그러니 이 밤을 견디는 건 쉬웠다.
17.
이미 한밤중이었고 방송국 문 앞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도 모두 철수한 지 오래였지만, 마치 언제라도 공습경보를 대비하는 벙커처럼 건물 전체에 들어찬 불안한 술렁거림까지 가시지는 않았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재희는 피곤한 눈가를 눌렀다. 이사회가 취소된 걸 확인하자마자 종편실에 몇 시간을 붙어 있다가 이제 막 나온 참이었다. 창가에 서 있던 현진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주예준 종편 끝났으면 들어가서 좀 자. 우리 거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그 꼴로 어떡하려고 그러냐, 넌.”
“그래서 사이즈 작은 걸로 했잖아요. 아우트라인 다 뽑았으니까 금방 쳐. 섭외는 끝났으니 제보자 인터뷰 좀 따고…… 이 시대 최고의 베테랑 한현진 작가님이 있는데 뭐 그런 거 한 사흘이면 안 끝나나?”
기지개를 켜며 나른하게 대꾸하자 현진이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커피를 끼얹으려는 시늉을 했다. 재희는 다급하게 어어, 하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사흘은 좀 그렇죠? 그래도 2주 안 걸릴 거야, 아마. 쉬어 가는 느낌으로 할 거니까. 소스도 쪽에 거의 다 있잖아요. 한 작가님이 구성만 잘 해 주면 금방 끝나요.”
현진이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재희를 빤히 쳐다보다 혀를 찼다.
“쉬어 가는 느낌이면 좀 쉬어라, 이 진상아. 너는 쉰다, 퇴근한다, 집에 간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 아니냐? 국립국어원 사이트 가서 검색 좀 해 봐. 제발 요절하게 해 달라고 여기서 고사 지내지 말고. 하여튼 강재희 이 새끼 아주 싸가지 없는 건 알아줘야 돼. 어디서 아직 마흔도 안 된 새파란 새끼가 나도 가기 전에 먼저 과로사를 하려고 그래? 아무리 가는 데 순서 없다지만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반박할 새도 없이 쏟아지는 총알 같은 단어들에 잠시 말을 잃고 있던 재희가 항변했다.
“아니, 내 걱정 너무 하드하게 하는 거 아니에요? 좋은 말로 할 수도 있잖아. 한 작가님은 말을 꼭 그렇게 하고 그래요.”
“지랄하네. 좋은 말로 하면 들은 척이나 하냐? 내가 강재희를 몰라?”
“그건 그렇지.”
순순히 인정한 재희가 씩 웃는 얼굴에 현진이 눈을 부라렸다.
“어디서 실실 쪼개, 이게? 쪼갤 시간 있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
“한 작가님도 미모 유지를 위해 퇴근하시죠, 내 걱정 그만하고.”
재희가 더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현진이 자리로 돌아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