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86
86화.
“말 안 해도 갈 거야. 아무튼 강재희 이건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얼굴은 좀 괜찮지 않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어이 현진에게 한 대 쥐어박힌 재희는 아야, 하며 맞은 이마를 문질렀다. 무슨 농담을 못 해, 하고 투덜거리자 가방을 집어 든 현진이 나가려다 말고 다시 한 번 다짐을 두었다.
“제발 오늘은 집에 가서 잠 좀 자. 이건 뭐 날 받아 놓은 폐병 환자도 아니고…… 서정언이랑 너랑 있으면 사무실이 드라큘라 관짝 같아서 아주 칙칙해 죽겠어. 밖은 봄인데 니들은 천년만년 겨울왕국 찍고 앉았으니 내가 아주 관절 시려서 못 산다, 진짜.”
“작가님, 1절만.”
재희가 짐짓 두 손을 모아 비는 척을 하자 현진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간다, 하며 사무실을 나갔다.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은 재희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혜주와 성옥을 보았다.
“조 작가랑 이 작가는 왜 퇴근 안 해? 일 많아?”
“저희도 금방 가려고요.”
“차 끊기기 전에 가야지.”
두 사람이 네에, 하고 대답했다. 재희는 의자를 창가 쪽으로 돌려놓고 등을 묻었다. 쓸데없이 좋은 날씨 덕에, 유리창 너머의 어둠 속으로 별무리를 엎어 놓은 듯한 야경이 멀리까지 펼쳐졌다. 평온하기까지 한 그 광경은 매일 밤 보는 것이었지만 늘 새로웠다.
저 수많은 불빛 하나하나가 모두 누군가의 일상이었다. 자신이 있는 이 사무실 역시 어딘가에서는 그 빛의 점 하나일 터였다. 매일 반복되는 삶. 그런데 왜 이렇게 쉬운 게 하나도 없을까,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등 뒤에서 혜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디님, 저희 들어갈게요.”
“아, 응. 조심해서 들어가.”
재희는 의자를 돌리며 혜주와 성옥에게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자 텅 빈 사무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런 순간은 외롭고 편안했다. 무심결에 들이쉬는 숨으로 스미는 사무실의 냄새가 익숙했다. 희미한 먼지 냄새, 종이 냄새, 커피 냄새 따위가 서늘한 공기 안에 한데 뒤엉켜 있었다.
현진의 말대로 하루라도 집에 가서 쉴까 생각했으나 어차피 어디 있든 혼자이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던 재희는 정언의 자리로 향했다. 아까 저녁때쯤 잠깐 들렀던 선준이 서온건설 게이트 취재 자료를 놓고 간 것이 기억나서였다.
몸을 숙여 책상 아래의 박스를 열자, 저녁 내내 자료를 보던 민혜가 붙여 둔 건지 그새 색색의 포스트잇이 몇십 장 자료 사이사이로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는 박스를 안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밤은 이거나 읽어 볼까, 하고 생각하며 막 박스를 내려놓은 순간, 책상 위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재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재희는 핸드폰 액정으로 눈을 돌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선명했다. 서정언. 고개를 갸웃한 재희는 전화를 받았다.
“어, 서 피디. 이 시간에 뭐야?”
『내려와서 제보자 만났는데 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확인 좀 하려고요. 아무래도 하루 더 있어야 할 거 같아서요. 현선준 기자 통해서 전에 서온건설 게이트 취재한 자료도 받았는데, 디지털화한 건 메일로 받아서 포워딩해 놨어요. 나머지는 내 자리에 뒀다고 하더라고요. 송 작가님이 먼저 봤다니까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내일 작가님한테 물어봐요.』
돌아온 정언의 목소리에 재희는 눈썹을 약간 좁혔다. 그 목소리가 잠겨 있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어딘지 아픈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울었던 사람 같기도 했다. 물론 정언이 후자일 리 없었으나, 그런 목소리를 듣는 건 드문 일이라 저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현 기자가 자료 두고 간 거 봤어. 그래서 내일까지는 거기 있겠다고?”
『네. 가 봐야 될 데가 많아서…… 선배, 혹시 예전에 포항 취재 갔던 적 있어요? 포항서에 아는 사람 없나?』
“포항경찰서? 난 없고, 민 피디가 예전에 그 단란주점 살인사건 때문에 두 번인가 갔었어. 민 피디한테 문자 넣어 봐. 아직 안 잘 거 같은데.”
『알았어요.』
“그런데 목소리 왜 그래?”
불쑥 묻는 말에 순간 핸드폰 너머에서 정언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재희는 그 짧은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린 정언이 짧게 대꾸했다.
『뭐가요.』
“안 좋잖아.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 없어요.』
“아무 일 없는 거 같지가 않은데?”
물은 말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게 아니라, 대답을 못 하는 거다. 직감한 재희는 손끝을 책상 위에 톡톡 쳤다. 의외로 정언은 지금처럼 알기 쉬운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빤히 보인다고 그걸 건드린다면 정언은 즉시 조개처럼 껍데기를 닫아 버릴 게 뻔했다.
“지금 김 피디랑 같이 있어?”
『이 시간에 왜 같이 있어요. 자기 방에 있지.』
말을 돌리자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 말투로 정언이 내뱉었다. 재희는 그 말에 푹 웃었다.
“이 시간에 김 피디랑 같이 못 있을 이유는 뭔데, 내외해?”
약간 짜증이 묻은 대답이 한숨과 함께 되돌아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끊어요. 그거 얘기하려고 전화했어요.』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을 기세였기에, 재희는 얼른 그 말끝을 잡았다.
“아, 농담 아냐. 목소리 진짜 안 좋은데 아픈 거면 약 먹고 자. 한 작가님이 요새 서 피디랑 나랑 사무실에 있으면 드라큘라 관짝 같다는데, 둘 중 하나라도 멀쩡해야 되는 거 아니냐?”
『선배나 좀 잘 해요. 지금도 사무실에 있는 거 다 아니까.』
“어디서 나 감시해?”
『몰랐어요?』
되물은 정언이 끊어요, 하고 내뱉었다. 곧 짧은 통화가 끊어졌다. 액정에서 통화 종료 메시지가 깜빡였다. 귀신을 속이지 날 속이냐, 하고 중얼거린 재희는 혀를 찼다.
물론 정언이 자신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정언은 남들이 다 알도록 좋아하는 티를 내면서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실수도 하지 않을 만큼 빈틈이 없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더 이상 물어봐야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게 당연했다. 그걸 잘 알기에 굳이 무슨 일인지 캐묻지는 않았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정언이 그럴 만한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생각을 되짚는 사이, 혹시 윤하고 뭐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재희는 미간을 좁히며 손끝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몇 달을 일하는 사이 정언이 쟤하고는 일 못 하겠다든지, 윤이 제발 다른 사수하고 일하게 해 달라든지 하는 말이 안 나온 것만 해도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들 앞에서는 정언의 눈치가 보여 차마 말을 못 했지만, 뒤에서는 팀원들 모두가 김윤이 서정언보다 더 대단하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던 것이다. 다정함이나 자상함 따위와는 천만 광년쯤 떨어진 정언 밑에서 이렇게까지 말 한마디 안 나오는 후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윤이 정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일을 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최근 들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이상한 기류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눈치를 본다, 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서로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이라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다 싶었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하고 생각한 재희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 건데, 원래.”
재희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치를 본다, 가 아니라 의식한다, 가 아닐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가까이 있다 보면 마음이 가는 건 쉬웠다. 정언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재희는 정언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남들이 듣는다면 질색할 게 뻔했지만, 윤 역시 정언에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두하는 여자가 아름답긴 하지, 하고 중얼거린 재희는 피식 웃었다.
“김 피디 생각보다 눈 높네.”
장난처럼 뇌면서도 문득 가슴 부근이 싸해지는 건 묘한 감각이었다. 있지도 않은 딸자식 남자친구 생긴 기분이 이런 건가, 하고 부러 농담 같은 생각을 한 재희는 고개를 두어 번 저어 그 생각을 떨어 버렸다.
“늙긴 늙었나 보다, 남 일에 이렇게 관심도 많아지고.”
공연히 민망한 기분에 투덜거린 재희는 박스 안의 내용물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읽기 시작했다.
이 취재를 담당했던 사회부 전한동 부장은 보도국에서도 거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신기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할 정도로 촉이 좋은 데다 YBS의 국정원이라고 부를 만큼 정보력이 뛰어났다. 그가 한 번 특종이 될 만한 걸 물면 그게 실패하는 일은 전무했다.
재희가 아는 한 이 서온건설 게이트가 한동의 기자 인생에 거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와 한선당의 총공세에 여론이 뒤집히며, 이 사건을 초반에 보도했던 YBS 역시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된 탓이었다.
이 일로 민정수석까지 갈아 치우는 것을 본 유동욱 사장이 한동을 직접 불러, 이대로라면 정말 신변이 위험할 것 같으니 더 이상의 추가 보도를 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재희도 당시에 와 공조해 심층 취재를 준비할 예정이었기에 대부분의 내용은 잘 아는 것이었다. 한동과 서로 이걸 터트리면 한선당에 타격이 대단할 거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다. 당 주류인 엄대진계 의원들이 다수 엮여 있었고, 사건과 액수가 크다 보니 대부분 의원직 박탈의 위험이 컸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선당에 불리한 보도를 내보내면 즉시 다양한 루트로 압력이 들어오는 데 이골이 난 두 사람이었다. 이거 터트리고 아주 당 해체시켜 버릴 거라며 농담을 주고받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물론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나 경악할 정도의 특종이라도 진짜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진실은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건 재희를 움직이는 신념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는 건 재희에게도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한동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선경이 이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한동을 보호한 덕분에 인사 불이익이라든지 다른 징계는 받지 않았지만, 한동은 최근 이 일로 회사에 상당한 부채감을 갖는 중이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말려들지 않고 여론을 다시 뒤집을 수 있었다면 청와대와 엄대진, 한선당이 공모하는 지금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민권당 의원들을 비롯해 여러 루트를 통해 입수한 수많은 문건과 증언을 다시 보자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