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사고사였습니다. 현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추돌 사고가 났어요. 운전기사는 즉사했고, 김장순은 이십 분 뒤에 도착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사이에 죽었습니다. 운전기사가 졸음운전을 했다, 일단 사고 원인은 그렇게 봤죠. 새벽 시간이라 목격자가 없었습니다.”
“일단 그렇게 보셨다고 하시면 실제로는 다른 원인이 있었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정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창도의 얼굴에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 비쳤지만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린 팩트가 없다, 그 부분은 여기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남정건설 차기 사장으로 거의 결정이 된 상태에서 김장순이 갑자기 죽어 버렸다, 그러니까 얼마나 난리가 났겠어요. 그때 제가 사회부였습니다. 취재를 나갔는데 이게 아무래도 영 느낌이 이상했어요. 당시에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하고 CCTV가 있었으면 그러지를 못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찝찝하죠.”
“어떤 부분을 의심하신 겁니까?”
“졸음운전이다, 회전하면서 연속으로 충돌하다 마지막에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경찰은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보니까 차 오른쪽을 박아서 오른쪽 보닛부터 조수석까지가 거의 뭐, 날아갔다 할 정도로 파손이 심했는데 정작 오른쪽 백라이트는 멀쩡하더라는 겁니다. 회전한 게 아니라 곧장 사선으로 이렇게 박은 거죠.”
창도는 그 말을 하며 두 손을 나란히 해 오른쪽으로 기울여 보였다.
“당시에 김장순이 탔던 차가, 제가 차종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은색 그라나다 V610). 그때 기준으로 그게 아주 고급 자동차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제가 현장에서 확인하니 깨진 게 왼쪽 백라이트였다. 그리고 왼쪽 트렁크 부근에서부터 긁힌 자국이 상당히 컸어요. 거기서 도료 이염이 있었다, 이걸 제가 발견한 겁니다.”
정언은 다이어리에 도료 이염, 하고 메모를 하며 밑줄을 그었다. 긁힌 자국에 도료가 이염됐다는 것은 어떤 물체가 마찰로 인해 이쪽의 도료를 차체에 남겨 두었다는 뜻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 이염을 시킬 만한 물체라면 다른 차량밖에 없었다.
정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졸음운전이 아니라 사고 유발 차량이 있었다고 보신 거군요. 왼쪽에 긁힌 흔적이 있었다면 뒤에서부터 사고 유발 차량이 달려와서 운전석 방향으로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그 바람에 경찰 얘기와는 다르게 회전을 한 게 아니라 핸들을 급격히 꺾으면서 바로 가드레일에 충돌했다, 이렇게 보는 게 더 논리적이었을 테고요.”
정언의 말에 창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런데 당시 포항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전혀 수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아, 이게 너무 뻔하잖아요. CCTV 한 번 돌려 보고, 현장에 남은 스키드 마크라든지 도료 분석 이런 걸로 충분히 전후 사정하고 용의자 알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죠. 증언을 할 사람이 둘 다 죽었고 목격자도 없었고, 그냥 사고사로 종결이 돼 버린 겁니다. 우리 측에서도 기사로 내기가 어려워졌죠. 의혹이 있다고 데스크에 올렸더니 지역 경제에 기여가 큰 기업인데 이런 기사가 나면 좋지 않다, 그래서 반려를 당했습니다.”
“당시에 기사를 반려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문종헌 편집국장님이었습니다. 이분도 돌아가신 지 오래됐죠. 당시에는 지금보다 접대 문화, 이런 게 훨씬 당연시됐으니까 남정건설하고 언론사들 사이도 아주 좋았습니다. 김장순이 그렇게 갑자기 죽으면서 중역들이 구심점을 잃었어요. 갑자기 추가 남제선 쪽으로 확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니 아마 그분 입장에서는 빠르게 판단을 하신 거겠죠.”
“그래서 결국 국장님은 남제선 사장이 사주를 했다, 그렇게 보신 겁니까?”
직접적인 질문에 창도가 난처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렇게까지 딱 정해서 말을 한다,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소문이 있었다, 이 부분까지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장순 죽음에 당시 포항 폭력조직이었던 황구파가 관여를 했다, 이런 소문이 돌면서 남정건설 내부에서 남제선 반대파들이 목소리를 못 내게 된 겁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중역들 입장에서는 김장순처럼 어느 날 갑자기 제거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상당히 컸겠죠.”
황구파. 손경일이 몸을 담고 있던 조직의 이름이었다. 경영권을 얻기 위해 남제선이 손경일을 이용했다고 생각할 여지는 충분했다. 그러나 문제는 창도의 말처럼 팩트가 없다는 점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던 정언이 물었다.
“소문이었다면 증명은 안 된 거겠네요.”
“그렇죠. 증명할 길도 없었고, 증명할 의지도 없었고. 남정건설 정도 되면 지역 경제 의존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알아도 말할 수 없는 거죠.”
“왜 하필 황구파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까요? 혹시 손경일 때문이었습니까?”
손경일의 이름을 들은 창도가 흠,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손경일, 손경일이 누구더라……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 같기는 한데.”
“중학교 시절부터 동네에서 같이 어울리던 후배인데, 황구파 소속으로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그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아요, 그게. 다만 남제선이 배후에 황구파를 꼈다, 이런 얘기만 언젠가부터 돈 겁니다.”
이런 소문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퍼졌을 리는 만무했다. 창도가 손경일의 존재를 모른다는 건 뜻밖이었다. 포항중학교 인근의 동네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대부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지역 건설사와 지역 신문 기자들 사이는 가깝기 마련이었다. 손경일과 남제선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창도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손경일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감췄거나 남제선이 그것을 드러내기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때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잠시만, 하고 양해를 구한 창도가 자리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잠깐 건너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도가 알았어, 하고 상대방에게 말하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정언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잠깐 사무실에서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한 십 분 정도면 될 겁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정언이 대답하자 창도가 바로 국장실을 나갔다. 곁에 앉아 있던 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복잡하네요. 결국 남제선이 손경일을 이용해서 경쟁자를 제거했다고 봐야 돼요?”
“심증은 있다 그거지. 물증이 없으니 문제야. 이런 경우가 까다로워. 만약에 재판을 갈 만한 일이었으면 기록이 더 있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닌 데다 너무 오래전 일이고.”
“여기를 먼저 왔으면 포항경찰서에서 기록 뒤져 봤을 텐데, 다시 가기도 그렇고…….”
윤이 말끝을 흐리자, 정언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자가 봤을 때도 한눈에 졸음운전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정도면 경찰도 분명히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거 알았을 확률이 높지. 그런데도 사고로 그냥 처리해 버렸다? 그러면 중요한 증거나 기록은 이미 다 없어진 지 오래라고 봐야 돼. 지역 유지들은 공권력하고 밀접하게 결탁돼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차라리 국장님한테 당시 자료 좀 달라고 요청하는 게 나을걸.”
정언은 다이어리에 메모한 내용들 위로 밑줄을 그으며 말하고는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민혜가 보내 주었던 기사 링크의 사진을 따로 저장해 둔 것이 있었다. 에 오래전 실렸던 것으로, 남강웅이 공사 수주 후 여러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이 사진에서 그와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가져온 것이었다.
정언이 그 사진을 확대해 들여다보자, 곁에서 윤이 이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 익숙한 향이 훅 스며들었다. 섬유유연제 향, 혹은 햇살 냄새 같은 그 향을 정확히 표현할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곁에서 윤이 부슬부슬하게 쏟아져 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그 사이사이로 희미한 비누 냄새의 입자들이 떠올랐다가 한순간 흩어졌다. 공연히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정언은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윤이 태블릿 위의 사진을 가리켰다.
“이게 다 누구죠?”
“모르지. 안 써져 있으니까.”
정언은 애써 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윤이 물었다.
“이 사람들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공사 수주 기념사진이니까 아마 당시 정부 부처 관계자거나 할 확률이 높아. 보통 기사에 이름 표기하는데 없으니까 신경 쓰여서 확인해 두려고 가져온 거야.”
그렇구나,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윤이 태블릿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눈을 들어 정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심결에 시선이 마주치자, 윤이 서둘러 자세를 고치며 아까처럼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 찰나의 순간 윤이 분명 멈칫했다는 걸 눈치챈 정언은 약간 괴로워졌다. 윤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이딴 눈치는 있어 봐야 국 끓여 먹을 것도 아닌데, 하고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눌렀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아무것도 아닌 침묵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이 자리를 뜨고 말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행히 때맞춰 돌아온 창도가 미안한 표정을 했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혹시 이 사진 한 번 봐 주시겠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누구죠?”
정언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창도에게 건넸다. 사진을 확대해서 가만히 들여다보던 창도가 턱 밑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이거 굉장히 오래전 건데, 이게 아카이브에 올라가 있었습니까? 아마 신축 학교 공사 수주한 뒤에 찍은 사진이었을 겁니다. 왼쪽부터 당시 경북도청장 김관석하고 포항시장이었던 김건욱, 그리고 아마 이 사람은 경북교육청장인가…… 이름이 확실하게 기억이 안 나네요. 오른쪽 이 사람은 포항 국회의원, 그때는 한선당이 아니라 대한자주당이었죠. 대한자주당 이노명이고, 그 옆은 재단 이사장 엄중길입니다.”
“재단이요?”
10) 그라나다 V6 : 1978년 현대자동차에서 출시한 6기통 고급 승용차. 독일 포드사의 그라나다를 들여와 일부를 국산화해 판매한 제품으로, 출시 가격은 약 1,100만 원 이상이었다. 당시 아파트 한 채 가격과 맞먹는 고급 승용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리는 수요에 판매 지연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84년 독일 포드사에서 차체 생산을 중단하며 국내에서도 1985년 단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