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예, 사학재단. 정화재단이라고, 당시에 이게 정화재단 소유 초중고 건물 전체 공사를 남정건설에서 수주했던 겁니다. 대선초, 당시엔 국민학교였군요. 그리고 대선중, 대선고. 대선고가 나름 지역 명문고였어요. 여기 이 엄중길이 한선당 엄대진 아버지 아닙니까. 이 양반도 죽은 지 꽤 오래됐어요. 엄대진이 TK 벗어나면서 재단도 정리했죠. 아마 부친이 재단 비리로 말이 좀 나와서 향후에 정치하려면 걸림돌이 되겠다 판단했던 것 같아요.”
갑자기 튀어나온 엄대진의 이름에 윤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정언도 마찬가지였다. 엄대진의 집안이 예전에 사학 재단을 운영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걸 여기서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정언은 황급히 그 사진을 다시 확대해서 들여다보았다. 픽셀이 깨져 윤곽선이 흐려진 엄중길의 얼굴에는 엄대진의 흔적이 남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남정건설하고 엄대진 사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관계가 있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까?”
정언의 물음에 창도가 모호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엄대진하고, 그렇게까지 하면 비약이 아닐까요? 일단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엄중길하고는 확실히 관계가 있었다는 겁니다. 재단 학교 공사 전체를 맡긴 것만 봐도, 당시에 이 정도 규모의 공사가 아주 흔하지는 않았는데 남정이 입찰 단독으로 들어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밑에서 무슨 작업을 했다, 충분히 그렇게 볼 여지는 있죠. 엄중길도 지역 유지였으니 관계가 긴밀했을 겁니다.”
“혹시 남강웅 사장 사망 이후에 남정건설이 수도권 진출하기 전까지의 자료가 있다면 저희가 좀 볼 수 있을까요?”
“자료라고 할 건 없고요, 이미 기사는 전부 아카이브화 돼 있습니다. 지금 이 사진도 거기서 가져오신 것 같은데요. 일단 저희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보시면 기사는 충분히 다 보시는 게 가능하죠. 저도 오래된 일이라 확실치가 않은데 추가로 드릴 게 있다면 나중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시 남정건설 중역들 명단이라든가 이런 건 확인할 수 없을까요?”
정언의 물음에 창도가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벽의 책장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가장 아래 칸의 상자를 끄집어냈다. 뚜껑을 열자마자 먼지가 날릴 정도로 오래된 서류 같은 것들이 상자 안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자를 몇 개인가 뒤져 보던 창도가 마침내 작은 책자 하나를 찾아내 몸을 일으켰다. 무릎 부근을 툭툭 턴 창도는 정언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게 당시 경북, 경남 중견기업 목록하고 간부들 연락처 정리한 책인데, 남강웅 사장 살아 있을 때 만든 거라…… 매년 만들던 건데 워낙 오래돼서, 저도 이거 딱 하나 남아 있네요.”
정언은 그 책자를 손끝으로 빠르게 넘기며 훑어보았다. 오래되어 황변한 종이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았다.
질 나쁜 종이에 인쇄된 이름과 주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업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정리된 듯, 남정건설은 제법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열댓 명 정도 되는 간부들의 이름이 직급과 함께 정리된 채였다. 창도가 물었다.
“남정건설 부분만 필요하신 거면 복사해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고요.”
정언이 다시 창도에게 책을 돌려주자 창도가 잠시 나갔다가 바로 다시 돌아왔다. 복사한 종이 두어 장을 정언에게 건네 준 창도가 먼지 묻은 손을 털었다. 윤이 카메라를 정리하는 사이, 망설이는 기색으로 주저하던 창도가 정언을 마주 보았다.
“피디님, 제가 노파심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무슨 사업 운영한다는 게 정말 다 그렇지만, 건설 쪽은 특히 로비라든가 이런 거 없이 돌아가기가 힘듭니다. 정계하고 아주 긴밀한 분야고요. 이거 가지고 뭐하려고 그러시는지 제가 지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민철진 피디님이 특별히 부탁하셔서 피디님한테 협조를 해 드렸습니다. 이 부분은 확실히 하고 싶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팩트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일절 방송에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언의 말에 창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피디님. 그, 제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고요. 아까 제가 남정건설하고 엄대진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건 비약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그게 관계가 없다, 이 뜻도 아닙니다. 대기업 뒤 캔다는 거 가볍게 생각하시면 큰일 납니다. 제가 비록 지방지지만 기자 생활 오래 했고,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한민국에 대통령보다 더 힘 있는 기업도 있습니다. 돈이 곧 권력이에요.”
정언은 눈썹을 약간 좁혔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창도가 복잡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제가 민 피디님한테 얘기 듣고, 오늘 두 분을 봤는데 너무 젊은 분들이라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제가 피디님들만 한 자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 자식 생각나서 그래요. 저 같은 사람이야 그냥 지방지 기자고 살 만큼 살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 하다 잘못되면 어떡할 겁니까. 우리 사회가 그런 거 책임져 주지 않아요. 늙은 사람이 참견한다, 비겁하다, 이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지만 일단 그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그 말은 진심으로 들렸다. 창도의 얼굴 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찰나에 겹쳐졌다가 곧 사라졌다. 문득 머릿속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자신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정언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새겨듣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건넨 정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도가 뭐라고 말하려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윤과 함께 건물을 나선 정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와 저녁의 경계에 걸친 하늘이 멀리서부터 붉은색과 보라색의 그러데이션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잠시 거기 시선을 주었던 정언은 그새 시동을 걸어 둔 윤의 차에 타며 시계를 보았다. 서울로 올라가면 빨라야 아홉 시는 될 것 같았다.
“김 피디는 바로 퇴근해. 집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역 있으면 나 거기 좀 내려 주고. 사무실에 좀 들렀다 가야 될 것 같아서.”
“그럼 사무실 들어갔다 가죠, 뭐.”
정언의 말에 윤이 앞을 보며 대답했다. 정언은 눈썹을 약간 좁혔다.
“피곤하게 뭐 하러…….”
“어차피 저도 사무실에 두고 온 거 있어서 가지러 가려고 했어요.”
윤이 말을 잘랐다. 정언은 뭐라고 더 말하는 대신 윤의 옆얼굴을 보았다. 윤이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이런 순간이면 그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건 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움찔하며 떨어져 앉던 윤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언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떤 말로도 규정할 수 없는 감정들이 수많은 정보 사이마다 스며들어, 생각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윤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두려웠다.
하지만 뭐가.
까닭도, 실체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문득 아주 얇은 유리로 만든 공 안에 갇힌 사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스스로도 깨질까 두려워 움직일 수 없는.
낯선 풍경들이 창밖으로 지나쳐 흘러갔다. 이런 감정들도 내버려 두면 삶의 속도에 휩쓸려 마음에 맺히지 않고 흘러가 버리는 것일까. 정언은 문득 그런 것을 생각했다. 한적한 도로 위를 달리는 침묵은 길고 무거웠다.
19.
윤은 회의실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슬쩍 눈을 주었다. 연락이 올 곳이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잠잠했다. 그사이 테이블을 뒤덮을 정도로 자료를 쌓아 놓은 민혜가 턱을 괸 채 말했다.
“야, 이거 완전 대박이다. 그니까 포항에서 어릴 때부터 남제선하고 손경일이 아는 사이였다 이거잖아. 남제선이 조폭인 손경일 이용해서 회사에서 걸림돌 되는 김장순을 제거했다, 근데 중역들이 회의에서 대놓고 남제선 깔 정도였는데 김장순 죽자마자 입을 다물진 않았을 거 아냐. 손경일 가지고 무슨 수를 썼을 거 뻔하네. 아버지 대부터 남제선하고 엄대진도 서로 관계가 있었다는 거고. 지역 유지 아들들이고 그렇게 유착돼 있던 집안에서 서로 안면 한 번 없었다는 게 더 말이 안 되겠다.”
화이트보드 옆 벽에 기대서 있던 정언이 그렇지,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남강웅하고 엄중길 사이에 유착 관계가 있었으면 남제선하고 엄대진도 그럴 거라는 거 충분히 짐작할 수 있죠. 애초에 남제선이 왜 지역 기반 다 버리고 수도권으로 왔겠어요. 엄대진 끼고 온 거 아냐. 엄대진이 국토위 움직여서 남제선한테 SOC하고 신도시 수주 따게 해 줬으니까 단시간에 그렇게 클 수 있었던 거죠.”
“대신에 남제선은 엄대진에게 정치 자금을 지원해 왔다 이거지. 자기들 나름대로는 사람들 눈 피하려고 일반 직원을 전달책으로 사용했고, 그 중에 한 명이 박규형 씨였고.”
민혜가 뭐라고 빽빽하게 적힌 자기 다이어리 위에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며 정언의 말을 받다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니들 출장 간 사이에 또 생각을 해 봤잖아. 근데 뭔가 맘에 걸리는 게 딱 있더라고. 그 장해나 씨 있잖아, 제보해 준 사람.”
“그분이 왜요?”
곁에 앉아 있던 윤이 대신 묻자, 민혜가 윤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며 테이블 위에 널린 프린트 물을 뒤적거리다 그 중의 한 장을 뽑아 올려놓았다. 해나와의 통화 녹취록이었다. 민혜는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 놓은 부분을 가리켰다.
“김 피디, 이거 한 번 봐봐. ‘저 여기 왔을 때 윤 부장님이라고 계셨는데, 원래 그분이 하시던 일이래요. 근데 윤 부장님이 뭐 어떻게 돌아가시고 한동안 그거 하는 사람 없다가, 그게 본사 찍히면서 박 과장님이 하시게 된 거죠.’ 박규형 씨가 출장 업무를 하기 전에 그 자리에 윤 부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얘기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도 전달책이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잖아, 우리가.”
“음, 그러네. 통화할 때는 그냥 별생각 없이 들었는데.”
가까이 다가온 정언이 민혜 곁에서 몸을 숙이며 녹취록을 들여다보았다. 윤은 민혜에게 물었다.
“이게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된 거라면 이전에도 전달책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계속 있었다는 뜻이죠?”
“그렇지, 그런데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건 이거란 말이에요. 이런 일은 아는 사람들이 적을수록 좋잖아. 누가 배신을 할 줄 알고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면서 시키겠어.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찍어 놓고 계속 써먹는 게 회사 입장에서도 좋을 거 아니에요. 근데 윤 부장이라는 사람이 죽고 박규형 씨한테 그 일이 넘어가는 사이에는 뇌물을 안 줬을까? 그사이에도 누가 일을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