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91
91화.
“그사이에도 누가 있었다면 왜 박규형 씨한테 이 일이 또 넘어왔을까요?”
“뭐 음모론이지만 내 생각에는 그 사람도 죽은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자꾸.”
민혜가 미간을 찌푸리며 펜 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정언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가능성이 없진 않네요. 이런 비밀 아는 사람들을 회사 입장에서도 그냥 퇴사시키고 놔준다, 이건 리스크 큰 일이지. 전달책 그만두려면 자의든 타의든 죽는 수밖에 없을 거 같긴 하다.”
“정언, 그런 무서운 말은 좀 더 부드럽게 해 주지 않을래?”
질색을 한 민혜가 손가락을 하나 흔들어 보였다.
“아무튼 그래서 서온건설로 사명 변경하고 올라온 뒤부터 사망한 직원이 얼마나 될까, 이게 갑자기 궁금한 거야. 우리도 회사에서 부고 알림 오는 거 보면 당사자 부고 나가는 경우는 드물잖아. 보통 뭐 부모님이나 시가, 처가 쪽, 그렇지. 특히 나이 많은 중역들 아니면 본인이 죽는 경우가 많진 않을 거라고.”
“일리는 있네요.”
“내가 언제 일리 없는 말 하는 거 봤어? 근데 문제는 이걸 어떻게 알아보느냐 그거지. 직원 수 적은 회사가 아닌데.”
그때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윤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윤은 바로 액정으로 눈을 주었다. 유원신. 세 글자의 이름을 확인한 윤은 바로 잠시만요, 하며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정언이 어딜 가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윤을 흘끔 쳐다보자, 그가 핸드폰을 들어 보이고는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어, 형.”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래, 나다. 어젯밤에 부탁한 거 알아봤어.』
원신은 윤의 대학 선배였다. 어젯밤 정언을 방송국에 내려 주고 집에 돌아와 한참을 뒤척이다,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아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대학 동기며 선후배들 연락처로 서온건설에 다니는 사람 있으면 연락 달라고 메시지를 보낸 윤이었다. 원신에게서 전화가 온 건 삼십 분쯤 뒤였다.
윤은 앞뒤 사정 설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혹시 남정건설 시절 중역들에 대해 알 방법이 있겠냐고 물었다. 원신은 너 무슨 약 잘못 먹었냐, 하고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마 뭔가 실마리를 찾은 모양이었다.
비상구로 나와 조용한 계단에 걸터앉은 윤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미안해요, 이상한 거 부탁해서.”
『이상한 거 알긴 아네. 너 요리 프로 하는 거 아니었어? 이런 건 왜 알아봐 달래냐?』
가족한테도 아직 에서 일하게 됐다는 걸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새삼 깨달은 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게…… 뭐 사정이 좀 있어서요. 아무튼 어떻게 됐어요?”
『내가 인사과잖아. 과장님한테 물어보니까 사내 도서관에 연간 일람 비치돼 있다고 한 번 확인해 보라고 하더라고. 조금 전에 가서 찾아봤는데 70년대 일람 몇 권 있던데, 마지막에 사원 명단이랑 뭐 그런 거 있더라. 이런 거 필요한 거야?』
“아, 네!”
윤이 반색을 하며 대답하자 건너편에서 원신이 하품을 크게 하고는 말했다.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 줄게. 메일 주소 좀 쏴 주라. 그리고 인마, 뭐 필요한 거 있을 때만 연락하지 말고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 방송국 들어가니까 볼 수가 없어, 아주. 일 그렇게 바쁘냐?』
“요샌 뭐 좀 그래요. 바쁜 거 끝나면 술 한 잔 살게요.”
『말만 하지 말고, 이 새끼야. 방송국 들어가면 다 연예인이냐? 아주 바쁜 척은 혼자 다 할래? 안 그래도 미정이 결혼한다고 한 번 모이자고 하던데 그때 오든가.』
미정은 학부 시절 과 소학회를 같이하던 후배였다. 미정이가 벌써 결혼을 하나, 하고 속으로 생각한 윤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시간 내 볼게요.”
『그때도 안 오면 넌 나랑 연 끊는 거야, 알간?』
“뭐 또 연을 끊기까지 하려고 그래요, 형은. 바쁠 텐데 그만…….”
짐짓 투덜거린 윤은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퍼뜩 조금 전 민혜의 말을 떠올렸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형, 하고 다급하게 원신을 부른 윤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형, 혹시 총무과랑 친해요?”
『총무과는 또 왜 찾아? 야, 혹시 우리 회사 뭐 터지냐? 그런 거면 빨리 알려 주고.』
뭘 알고 하는 말일 리 없었으나 마음 깊이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사레가 들린 윤은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요. 형, 혹시 서온건설로 사명 바꿨을 때부터 직원 부고 나간 거 알아봐 줄 수 있어요?”
『직원 부고? 몇 십 년 치 부고면 엄청날걸?』
“아니, 가족 부고 말고 직원 본인이 죽은 경우요.”
윤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원신이 성질을 냈다.
『아이 씨, 뭐야 인마. 무섭게!』
“꼭 필요해서 그래요. 나중에 설명할게요.”
『그런 케이스는 진짜 드물 텐데. 총무과에 아는 사람 있으니까 혹시 기록 있는지 한 번 물어는 봐 줄게. 이 새끼 하여튼 엄청 수상하네. 너 뭐 이런 데로 옮긴 거 아니지?』
이 형 돗자리 깔아야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한 윤은 말을 돌렸다.
“부탁 좀 할게요, 형. 모임 때 봐요.”
『알았어, 알았어. 이거 뭐 김윤 얼굴 한 번 보려고 별짓 다 해야 되네, 아주 그냥. 또 전화하자고. 메일 주소 문자로 보내 주고.』
“네, 진짜 고마워요.”
원신의 전화가 끊어졌다. 원신에게 메일 주소를 전송한 윤은 잠깐 고개를 젖혔다. 비상구 복도의 벽에는 이사진 퇴진 요구 포스터가 끝없이 붙어 있었다. 한동안 그 포스터를 보고 있던 윤은 몸을 숙여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속이 답답했다.
시보국은 늘 전시 상황이었다.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좋든 싫든 정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한다는 것 역시도.
선을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업무 외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정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데, 윤은 자신이 기꺼이 그 불편함을 택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누구보다 질색하던 윤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하는 짓이 딱 그렇다는 걸 생각하자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정신을 차리면 이미 시선이 정언을 따라가고 있었다. 애써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정언의 목소리에 온 신경이 기울어졌다. 아예 다른 공간에 있으면 어느 순간 정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곤 했다.
이 정도까지 오면 이미 부모가 뜯어말린다 해도 소용이 없는 레벨이었다. 다시 한 번 땅이 꺼질 정도로 긴 한숨을 뱉은 윤은 몸을 일으켰다.
회의실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민혜와 정언이 이쪽을 보았다. 민혜가 먼저 물었다.
“갑자기 무슨 전화예요? 중요한 거였어?”
“학교 선배가 서온건설 인사과에 있어서요. 어제 혹시 남정건설 시절 중역들에 대해서 좀 알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요. 지금 연간 일람이 몇 개 남아 있다고, 거기 사원 명단 같은 게 있는데 스캔해서 보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총무과 통해서 직원 본인 부고 사항 있는지도 확인해 줄 수 있냐고 부탁했는데 알아보겠다고 했어요.”
“어머, 말도 안 했는데 혼자 사부작사부작 뭐야? 김 피디, 이렇게 아주 이쁜 짓만 골라서 할 거야?”
불시에 한쪽 볼을 잡아 흔드는 민혜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어어, 하고 당황하자 민혜가 손을 놓아 주며 깔깔거렸다. 귀까지 빨개진 윤은 방금 잡혔던 볼을 문질렀다. 윤이 그러거나 말거나, 민혜는 테이블 위의 백지에 볼펜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흠,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일단 김 피디가 그쪽에서 명단 받으면 내가 지금 연락이 되고 우리 인터뷰에 응해 줄 수 있는 사람 있는지 체크하고, 당시에 남제선한테 회사 그렇게 스무드하게 넘어간 이유 한 번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엄중길 재단, 그거 뭐랬지?”
“정화재단이요.”
곁에 있던 정언이 대답했다. 민혜가 종이 위에 정화재단이라는 글자를 적고 동그라미를 쳤다.
“그래, 정화재단. 여기도 뭐 있는지 내가 일단 찾아볼게. 혹시 우리 DB에도 뉴스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직원 부고 받으면…….”
민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윤의 핸드폰에서 메일 알람이 울렸다. 윤은 메일 앱의 알람 아이콘을 클릭했다. 원신이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스캔 파일 몇 개와 함께 원신이 적어 놓은 메시지를 보던 윤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메일 왔는데, 최근 십 년 사이에 직원 본인 부고가 나간 케이스가 여덟 명이래요. 그 전 사항은 확인하기 어렵다고 그러네요. 일단 포워딩해 드릴게요.”
“십 년 사이에 여덟 명? 많은 거야, 적은 거야?”
민혜가 펜 끝으로 이마를 긁으며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했다. 정언이 팔짱을 끼며 몸을 조금 내밀어 윤 쪽을 보았다.
“일 년에 한 명도 안 되는 거긴 한데, 글쎄. 사인이 뭔지가 궁금하네. 사인 같은 건 안 나와 있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정언과 눈이 마주친 윤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아, 저기, 네. 그런 건 없고 그냥 날짜, 이름, 부서명, 장례식장, 연락처 이렇게…….”
말을 더듬은 윤은 저도 모르게 아직 화끈거리는 귓가로 손을 가져갔다. 최대한 태연한 척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스스로에게 조금 짜증이 났다. 정언이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민혜가 턱을 괴었다.
“연락처 있으니까 다행이네. 혹시 사인 알 수 있나 연락 돌려 보지 뭐. 아, 그 다른 주소 인근 CCTV 화면 있잖아. 의정부서에 협조 공문 보냈는데 답 오는 대로 얘기해 줄게. 그리고 그 자재 관련해서 전문가 하나 섭외했어. 환경부 등록 법인 한국공기청정협회라는 데가 있는데 여기서 친환경 건축자재 인증제 주관하거든. 여기 소속 전문가 중에 한양대 건축공학과 오상근 교수님이라고 있는데, 이분이 그거 관련해서 자문 주겠대.”
“약속 잡았어요?”
정언의 물음에 민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