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92
92화.
“날짜는 아직 안 정했고, 그냥 일단 섭외만 한 거야. 몇 년 전에 왜 신도시 신축 아파트에서 애들 아토피 발병해서 집단 소송 건 거 있잖아. 거기 원고 측 자문위여서 상생변 최변한테 소개받았어.”
“그러면 이런 쪽은 완전 전문가겠네요. 알았어요. 그러면 일단 서온건설에서 자재를 대체 뭘 어떻게 속여서 쓰나 그게 문제네. 김 피디, 아까 그 선배는 인사과에 있다고?”
남의 속도 모르는 건 정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말에 윤은 차인 사람은 죽을 지경인데 찬 사람은 속 편하다는 건가, 하고 약간 비뚤어진 생각을 했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한 적 없이 차였다는 걸 떠올리자 당장 시멘트 바닥을 파고들어 가고 싶은 기분이 된 윤은 애써 정언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네.”
“그러면 현장 업무는 전혀 모르겠네. 안다고 해도 현장에서 자재 속이는지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정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혜가 옆에서 찌푸려진 미간을 볼펜 뚜껑으로 콕콕 찍으며 물었다.
“단속 나와도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어? 보통 관할 시청에서 준공 허가 낼 때나 단속 나올 때 어떻게 하지?”
“준공 허가 낼 때는 원래 시청에서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게 맞는데 보통 그렇게 안 하죠. 현장 감리11)하고 감리확인서 받아서 이상 없으면 허가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근데 감리를 시행사가 직접 선정하거나, 지자체에서 선정한대도 돈이 시행사에서 나가는 게 문제지. 단속은 시청에서 직접 하긴 하는데 글쎄, 큰 건이면 특별위원회 꾸리는 경우도 있고요. 여긴 지금 시청 단속이 안 먹힌다 그 얘기 같아요. 특위 조사 나갈 정도면 숨기려고 해도 힘드니까.”
“그럼 지금 진송신도시 스타일하우스 감리업체 담당자부터 찾아봐야겠다. 아니, 왜 할 게 이렇게 많아? 미쳐 버리겠네,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성옥이 붙여서 잡무라도 좀 시켜야지 사람 사는 게 아니야, 이게.”
투덜거린 민혜가 으으,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관절이 재조립되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일인 듯 어깨를 몇 번 툭툭 친 민혜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나 작가들하고 점심 먹기로 했는데, 정언하고 김 피디는 알아서 먹을 거지?”
“알아서 먹지 언제는 누가 챙겨 줘서 먹은 것처럼 왜 그래요.”
면박을 준 정언이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아침 포털 메인 뉴스가 싹 녹취록 조작이다 아니면 입수 경로 밝혀라 하면서 난리 났던데요. 는 분위기 어때요?”
“각오야 했겠지. 그거 모르고 저지른 거 아니잖아. 걔들 그렇게 나올 거 알았으니까 터트린 거지 뭐. 계속 발뺌하면 음성변조 없이 이름 까고 목소리 대조라도 해 줄 생각인 거 같더라고. 이사회도 어차피 당분간 못 열리니까 걔들이 막 가면 우리도 막 가자 하는 건가 봐.”
민혜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다이어리와 핸드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점해, 하고 발랄한 인사를 건넨 민혜가 뭐라고 하기도 전 회의실을 나갔다.
그 바람에 얼결에 둘만 남은 걸 깨달은 윤은 황급히 테이블 위의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어색해 죽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정언이 툭 내뱉듯 물었다.
“김 피디는 점심 안 먹어?”
“아, 네. 뭐…… 별로 생각 없어서요.”
윤은 애써 정언 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건 사실이었다. 최고의 다이어트는 실연이라는 말을 이렇게 몸소 깨닫고 싶지는 않았기에 약간 울적해졌다. 윤을 빤히 응시하던 정언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밥 먹으러 가자.”
“네?”
“생각 없어도 먹어. 남들도 다 입맛 있어서 먹는 거 아니니까.”
아니 저, 하고 뭐라고 말하기도 전 정언이 회의실을 나갔다. 윤은 테이블 위에 널려 있던 프린트를 품에 안은 채 멍하니 서서 잠시 고뇌했다. 매몰차게 선을 그어 놓고 이렇게 구는 건 왜일까.
자신은 절대 정언처럼 쿨하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건 쉽지 않았다. 늘 차는 쪽보다는 차이는 쪽이 마음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정언과 자신은 그렇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윤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 한들 자신이 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으리라는 걸 이미 잘 아는 탓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반한 놈이 죄인이었다.
회사에서, 사수에게, 그것도 빈틈이라고는 바늘 찔러 넣을 틈만큼도 없는 사람에게 빠져 버린 게 이 모든 고통의 시작이었다. 빠졌다는 걸 알았으면 빨리 정신을 차릴 일이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유턴도 없이 일방통행로를 질주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뭐해? 밥 먹자니까 종이 뜯고 있어?”
회의실 문으로 다시 머리를 들이민 정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화들짝 놀란 윤은 아 네, 하고 저도 모르게 대답하며 프린트를 품에 더 꼭 안았다.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정언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 자존심도 없는 자식, 넌 싫다는 말 못 해서 언젠가는 망할 거야! 속으로 절규한 윤은 조종당하는 로봇처럼 뻣뻣하게 굳어 회의실을 나섰다. 안고 있던 프린트를 책상에 내려놓은 윤은 옆자리에서 모니터를 끄는 정언을 흘끔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정언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윤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서늘하고 무표정한 눈동자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붙들렸던 윤은 제풀에 깜짝 놀라 시선을 내렸다. 목덜미가 확 뜨거워졌다. 이건 이미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모든 감각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윤은 사무실을 나서는 정언의 뒤에서 말없이 반걸음 정도 떨어져 걸었다. 새까만 단발머리, 창백한 목덜미, 루스한 검은색 재킷 아래의 깡마른 실루엣.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듯한 그 뒷모습이 눈에 박혔다.
“김 피디, 어디 안 좋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정언이 앞을 보며 물었다. 멈칫한 윤이 고개를 들자, 정언이 엘리베이터 문으로 비치는 윤의 시선을 비껴 피하며 말했다.
“몸 잘 챙겨. 아프지 말고.”
문득 좋은 선배 원하는 거라면 내가 더 노력하겠지만, 하고 나지막하게 떨어지던 그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좋은 선배, 윤은 그 말을 입 안으로 소리 없이 뇌어 보았다. 정언이 말한 노력이라는 게 이런 걸까 생각하자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지났다.
캔디의 모서리에 입 안을 베이는 순간처럼 달콤하고 선뜩한 그 감각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설령 유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도,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자신은 어차피 똑같은 선택을 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단 하나뿐이었다.
“선배도요.”
윤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그 말을 들은 정언이 눈썹을 약간 좁혔다. 무슨 뜻인지 읽을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후회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 * *
재희에게서 ‘전한동 부장님이 서 피디 2층 휴게실에서 잠깐 보자고 그러시더라.’ 하는 메시지가 온 건 조금 전의 일이었다. 윤과 지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사기 무섭게 날아든 메시지에, 윤을 먼저 사무실로 올려 보낸 정언은 휴게실 문을 열었다.
한적한 휴게실 구석에 앉아 있던 한동은 정언을 보자마자 인사도 하기 전 다짜고짜 너 뭐하려고 그러는 거야, 하며 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정언이 대강의 개요를 설명하자, 한동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정언의 말을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한동이 슬슬 숱이 적어지기 시작하는 앞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야, 서정언아. 너 진짜 이거 꼭 해야겠냐?”
정언이 짐짓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선배도 못 말린 걸 부장님이 말리시려고요?”
“하기야 강재희도 못하는데 내가 뭔 수로 하겠냐마는…….”
말끝을 흐린 한동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너 이거 우습게 보면 안 돼. 나 당할 때 이사진 바뀌기도 전인데 걔들 어떻게 하는지 봤잖아. 사장님이 나 불러서 아주 신신당부를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싫으면 그만하라고. 엄대진이 이거 아직 모를 거 같냐?”
“글쎄요. 눈치 깠을 거 같은데요. 모른다고 해도 시간문제고.”
태평하게 대꾸하자 한동이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했다.
“뭘 남 얘기처럼 하고 있어?”
“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애초에 저도 서온건설 게이트는 생각도 안 했는데요. 파다 보니 거기까지 간 건데, 무서우면 찔릴 짓을 말아야죠.”
정언의 대답에 한동이 앞에 놓여 있던 자판기 커피를 원샷하고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뱉었다.
“하수도인 줄 알고 팠더니 간첩 땅굴이었다? 근데 잘못 들어가면 땅굴에서 총 맞아 죽는다고, 인마. 걔들이 찔릴 짓 하면서 들킬 거 생각하는 줄 아냐? 들키면 발견한 놈 묻으면 그만이지.”
“걔들이 저 묻는 동안 저는 가만히 있고요?”
“지금 우리 꼴 보면 모르냐? 우리가 주둥이가 없어서 지금 이래?”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왜 있는데요.”
“하여튼 한마디를 안 지냐, 한마디를 안 져. 아주 강재희고 너고…… 니들이 내 밑에 있었으면 나 벌써 혈압 올라 죽었어.”
진담처럼 들리는 농담을 던진 한동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걷어 내며 의자를 조금 더 당겨 앉았다.
“그래서, 그 CCTV에서 주고받은 게 뇌물인지는 어떻게 증명할 거야?”
“자금 흐름 파악해야죠. 현금 받아서 집에 쌓아 두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검찰에서 그거 못 해서 엄대진 못 엮었는데 무슨 수로?”
“검찰에서 못 한 겁니까, 안 한 겁니까? 그리고 실수 하나 안 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엮인 사람 많은데 전부 입막음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정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동이 흠, 하며 팔짱을 끼었다.
“엄대진 만만한 위인 아니야. 특검 실패한 거 이유 다 있다. 몸조심해. 내가 뭐 어떻게 좀 도와주고 싶긴 한데, 모가지 오늘 잘릴지 내일 잘릴지 그것만 기다리는 판에 이건 뭐 같이 잘리자고 할 수도 없고. 우리 팀 애들도 못 챙기는 마당에…….”
“자료 주신 것만 해도 충분한데요 뭐.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손을 내젓는 정언을 물끄러미 보던 한동이 아이구 모르겠다, 하고 한탄 같은 소리를 냈다. 정언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위에서 징계 관련해서 무슨 얘기 들으셨어요?”
“일단 이사회 못 열렸으니까, 뭐. 근데 가만히 있겠냐? 아주 청와대에서 사장님 잡아 죽이려고 서슬이 시퍼렇다는데…… 사장님이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지금 프레셔 장난 아닐걸. 기사 나가는 거 못 봤어? 음성파일 조작이라잖아. 조한일보에서 아주 우리 골로 보내려고 난리야. 댓글에 뭐라는지 아냐? 북한 소행이래, 북한 소행. 북한에서 원규천 홍보수석 목소리를 컴퓨터로 조작해서 뿌렸댄다. 우리 기자들이 간첩이라 북한에서 조작한 파일 받아서 틀었고.”
“창의적이긴 하네요.”
기가 막힌다는 정언의 얼굴에 한동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포털 메인에 무조건 우리가 조작했다고 댓글 달고 SNS에 퍼트리면서 여론 흔드는 거지, 뭐.”
“그게 먹혀요? 그걸 누가 믿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