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정언, 박규형 씨 전에 출장 다녔다는 그 윤 부장이 윤대석 씨 맞는 거 같지 않아?”
“부고 명단에 다른 윤씨 없었어요?”
“없었어. 시기도 얼추 맞는 것 같고.”
잠시 턱을 괴고 화면을 들여다보던 정언은 흠, 하며 민혜에게 물었다.
“장해나 씨 말로는 윤 부장님 죽은 뒤에 출장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윤대석 씨는 공사관리과니까 현장에 나와 있었던 거 아닐까 싶어. 만약에 이 사람들이 진짜 전달책이면 고정민 씨는 본사 사람이라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몰랐을 수도 있지 않아?”
“말은 되네. 고정민 씨 죽은 다음에 박규형 씨한테 넘어온 거면 시기도 맞고. 일단 알아보죠, 뭐.”
정언은 핸드폰에 연락처를 입력하고 문자를 보냈다. 제작진인데 혹시 가족분의 죽음에 대해 얘기해 주실 수 있느냐, 혹시 돌아가실 당시에 이상한 부분은 없었느냐, 생각나는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달라는 내용이었다.
수도 없이 해 본 일이었지만 이런 연락을 할 때마다 마음이 작은 돌부리에 차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의 죽음을 복기한다는 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쉬운 일이 아닌 탓이었다. 정언 역시 그게 어떤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김 피디, 그 감리업체 말인데…….”
정언은 윤에게 말을 걸다 멈칫했다. 윤이 그새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어서였다. 통화중인 듯 한쪽 어깨에 핸드폰을 끼우고 네, 네, 하고 대답하던 윤이 정언에게 시선을 주더니 잠시만요, 하고 입모양만으로 말하며 살짝 웃어 보였다.
아, 하고 중얼거리며 서둘러 눈을 돌린 정언은 괜히 잠잠한 자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윤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윤은 평소와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의식하는 건가 싶은 순간이 몇 번 있기는 했으나, 정언은 도리어 자신 쪽이 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곧 깨달았다. 먼저 선을 그은 건 자신이었기에 윤이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싶었으나, 독하게 말해 놓고 신경이 쓰이는 건 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여튼 이 더러운 성격, 하며 중얼거린 정언은 한숨을 쉬었다. 윤의 통화가 끝난 건 몇 분쯤 뒤였다. 파티션을 가볍게 노크한 윤이 이쪽으로 몸을 숙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리업체 때문에 선배하고 잠깐 통화했어요. 고원종합기술공사 여기가 아예 거의 서온건설 지정 업체라는데요. 입찰 있어도 형식적인 거라고 하고요. 다른 감리업체 쓰는 거 본 적 없대요. 저녁에 만나서 자세한 얘기 듣기로 했어요.”
시키기도 전에 미리 알아서 잘 하는 건 역시 눈치가 빠른 까닭일 터였다. 윤이 그 기막힌 눈치로 지금 자신의 이 복잡한 심정을 알아차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언은 애써 윤 쪽으로 눈을 두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잘 됐네. 갔다 와서 얘기해 줘.”
“네.”
그때 책상 위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정언은 액정을 확인했다. 주소록에 없는 핸드폰 번호였다. 조금 전 보낸 메시지의 답인가 싶었으나 적혀 있던 번호도 아니었다. 누구지, 하고 생각한 정언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서정언입니다.”
『저, 문자 받고 전화 드렸는데요. …….』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조심스러운 말투로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정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네! 맞습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저희 아버지가 윤 대자 석자 쓰시는데요, 저는 작은아들이고요. 형이 그쪽에서 연락 받았다고 얘기를 해서요.』
“아, 그러시구나. 저희가…….”
『저, 그런데 이런 연락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미처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상대가 말을 끊었다. 그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멈칫한 정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언이 잠시 침묵하자, 건너편에서 낮은 한숨이 돌아왔다.
『엄마도 그렇고 형이랑 저도 그렇고, 이 일로 진짜 너무 힘들었거든요. 엄마는 이것 때문에 병원도 오래 다니셨어요. 방송국에서 이런 연락 계속 오는 거 아시면 엄마 또 쓰러지실지 모르고, 아무튼 저희는 정말 할 얘기 없으니까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답 없으면 계속 연락 올 것 같아서 제가 이렇게 전화 드리는 거니까요.』
그 즉시 전화가 끊어졌다. 당황한 정언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민혜가 왜 그래, 하며 의아한 표정을 했다.
“아니, 윤대석 씨 작은아들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는데 이 일 때문에 자기들이 너무 힘들었대요. 아까 작가님이랑 얘기한 사람은 큰아들인가 봐요. 방송국에서 이런 연락 계속 오는 거 알면 엄마 또 쓰러질 수도 있다면서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데?”
정언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하자 민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도 말하는 거 묘하다, 그치?”
“이런 연락이 계속 온다는 말 이상하지 않아요? 전에도 방송국에서 연락 계속 받았다는 건가?”
“방송국에서 윤대석 씨 죽은 일로 연락이 갈 게 뭐가 있었을까? 사고 난 게 무슨 문제가 있었나? 윤대석, 윤대석…… 가만 있자. 그러고 보니까 어디서 들어 본 거 같기도 하고. 나만 그런가? 김 피디, 윤대석이라는 이름 생각 안 나?”
민혜가 윤에게 묻자 윤이 미간을 좁혔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는 표정이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윤대석, 윤대석, 하고 중얼거리자 자기 책상에서 뭔가를 적고 있던 재희가 목을 뽑아 이쪽을 보았다.
“셋이 뭐하는 거야? 무슨 주문 외워?”
의아해하는 재희의 얼굴에 민혜가 대답 대신 되물었다.
“강 피디, 혹시 윤대석이라는 이름 들어 본 적 있어?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것 같지?”
“윤대석?”
재희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입가에 손끝을 대고 있다가 바로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프린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 무언가를 찾던 재희는 그 중 하나를 끄집어내 몇 장을 넘겨보더니 여기 있다, 하고 몸을 내밀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이쪽으로 주었다.
“검찰 측에서 첫 번째로 소환했던 증인이야.”
민혜가 어머머, 하며 재희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서온건설 게이트 관련 자료였다. ‘공판 출석 예정이던 증인 윤○○ 사고사’라고 쓰인 부분이 형광펜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정언은 고개를 휙 돌려 재희를 쳐다보았다.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그 사람이요?”
“맞아. 공판 전 주였나, 운전 중에 갑자기 가드레일 들이받아서 즉사했는데 감식하니까 졸음운전이었다고 나왔을걸. 그런데 누가 그 말 믿겠어.”
“이 사람 전달책이었다고 그랬죠? 그거 증언하려고 나가려고 했던 거고.”
“그렇지.”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혜가 펜 끝으로 종이를 탁탁 쳤다.
“맞네, 맞아. 그러면 이거 사고로 죽은 사람들 다 전달책이었을 가능성이 높겠네.”
“가족들 만나 봐야겠어요.”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은아들이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며.”
“큰아들 쪽은 작가님이 연락하니까 얘기해 준 거 아니에요? 밤을 새서라도 일단 설득해 봐야지. 이런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연락하지 말란다고 네 그래요, 그러고 말아?”
차 키를 집어 든 정언이 급히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멨다. 뒤에서 윤이 같이 가요, 하고 따라 일어났으나 정언은 윤 쪽을 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저녁에 약속 잡았다며. 혼자 갔다 올 테니까 만나 보고 전화 줘. 선배, 나 나갔다 올게요.”
재희가 어 그래, 하고 대답했다. 윤이 뭐라고 말하기 전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온 정언은 대석의 큰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비하인드 24 피디 서정언입니다. 아버님 사건 관련해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막 문자를 전송했을 때, 사무실에서 뛰어나온 윤이 정언을 붙들었다.
“뭐야?”
깜짝 놀란 정언이 윤을 돌아보자, 윤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혹시 오래 걸리시면 제가 약속 끝나자마자 그쪽으로 갈게요.”
“아니, 괜찮…….”
정언이 채 문장을 끝맺기도 전 윤이 말을 끊었다.
“밤샘하실 수도 있다면서요. 저녁에 연락할 테니까 어떻게 됐는지 얘기해 주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윤이 정언을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고는 전화할게요, 하며 손짓을 했다.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정언은 엘리베이터 바깥의 윤을 마주 보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언제나처럼 살짝 웃는 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이마를 짚은 정언은 벽에 기대섰다. 아무리 벽을 치고 밀어내도, 어느 순간이면 다시 윤에게 무방비해지는 자신을 깨닫자 겁이 났다. 선을 긋기 위해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건 정언에게 아주 낯선 일이었다.
낮게 웅웅대는 소리만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공기가 머리 위로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긴 한숨을 뱉은 정언은 눈을 감았다. 이래서 그랬던 건데, 중얼거린 말이 그 무거운 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 * *
아직 이른 저녁이라서인지 들어선 일식 술집 안은 조용했다. 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안쪽에서 먼저 윤을 발견한 원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어 형, 하고 마주 손을 흔든 윤은 서둘러 원신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원신이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팔짱을 끼었다.
“야, 김윤 아직 얼굴 좋네. 태훈이는 얼굴 확 상했길래 방송국 들어가면 다 그런가 보다 했더니.”
“원판 불변의 법칙 몰라요?”
윤이 장난스럽게 되묻자 원신이 에라이, 하며 앞에 놓여 있던 물컵을 들어 윤에게 뿌리는 시늉을 했다. 소리를 내어 웃은 윤은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태훈이는 벌써 짬이 얼만데요. 전 이제 2년 차인데 아직 멀었죠.”
“하긴 YBS 요새 뭐 아주 난리라고 그러던데. 나 뉴스 잘 안 보는데도 뭔 일 난 건 알겠더라. 태훈이 걔는 다큐 만들고 그러는 데라 더 그런가?”
“그렇죠 뭐. 위에서 지들 욕하는 거 듣기 싫으니까 입 다물라고 하는 거라서…….”
윤이 말끝을 흐리자 원신이 혀를 찼다.
“요새가 무슨 유신시대도 아니고 뭐 얼마나 가겠냐. 저녁 안 먹었지? 여기 초밥 맛있는데, 그거 하나 시키자. 술 한잔할래?”
“저 술 못 마시잖아요. 형하고 만나고 가 봐야 될 데도 있고요.”
“뭐가 그렇게 바빠? 요리프로도 그렇게 힘드냐?”
원신의 물음에 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걸 말을 해야 되는지 하지 말아야 되는지 선뜻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