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95
95화.
다행히 별 의미 없이 물은 것인 듯, 원신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초밥 B세트로 두 개 주시고요, 넌 안 마신다고 그랬지? 청주 하나 주세요.”
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원신이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가방에 쑤셔 넣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근데 아까 감리업체 관련해서 왜 물어본 거야? 그런 거 누가 궁금해하는데?”
“아니, 아는 사람이 뭐 좀 알아봐 달라고 그래서요.”
윤이 말을 돌리자 원신이 낄낄 웃었다.
“나 너랑 전화하고 나서부터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혀 죽는 줄 알았어, 진짜로. 안 그래도 지금 이직하려고 오퍼 넣는 중인데 너까지 그러니까 이게 뭔 신의 계시 같고 그랬다는 거 아냐.”
“이직한다고요? 형 서온 몇 년 다녔죠?”
“나 졸업하고 강영건설 4년 있다가 이리 옮겼으니까, 이제 여기 2년 됐나 보다. 뭐 재정 탄탄하고 그래서 처음엔 좋다고 다녔는데, 시간 지날수록 좀 아닌 거 같아. 은근히 돌아가는 게 주먹구구야. 아까 감리업체 얘기했지? 여기가 일을 다 그런 식으로 한다고.”
원신이 한숨을 뱉으며 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중국 애들 흔히 말하는 시[?系]13)라는 거 아냐? 일하다 보면 나 진짜 뭔 중국 애들하고 일하는 거 같다니까. 시스템이 기능을 못해, 이 회사는. 시스템은 그냥 인맥 받쳐 주는 장식이야, 장식. 들어와 보니까 낙하산도 엄청 많고, 겉보기랑 되게 다르다고. 공채 시즌만 되면 청탁 전화 들어오는 것 때문에 미치겠다니까. 아무래도 뭔 일 터질 거 같아서 그 전에 도망가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자꾸 그런 거 물어보니까 내가 더 불안하고 안 배기냐.”
투덜거린 원신이 충혈된 눈가를 두어 번 누르더니 윤을 마주 보았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힌 채였다.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원신의 표정에 윤이 약간 당황하자, 원신이 심각한 투로 입을 열었다.
“야, 김윤. 이거 누가 부탁한 거길래 일부러 나 만나서까지 이런 거 물어보려고 그래? 솔직히 말해 봐. 까놓고 말하면 내가 얘기해 줄게.”
“형, 그게…….”
“내가 인사과 짬이 얼만데, 인마. 분식집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여. 척하면 척이지. 뜬금없이 오밤중에 문자 돌려서 서온건설 다니는 사람 찾고, 너 감리가 뭔지는 알아? 뭐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거 들어서 뭐할 거야?”
윤은 잠시 망설였다. 원신에게 끝까지 숨길 수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정보를 얻어 낸다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대체 다른 선배들은 어떻게 취재를 하는 걸까, 하고 속으로 생각한 윤은 결국 순순히 대답했다.
“……서온건설 관련해서 취재하는 게 있어요. 진송신도시 현장 문제 때문에 하는 거고, 자세히는 설명 못 해요. 회사에 문제 생길 수 있는 것도 맞아요. 형이 부담스러우면 대답 안 해도 되고요.”
“너 요리프로 하는 거 아니었어?”
원신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윤이 대답 대신 원신을 응시하자 원신이 흠, 하며 턱을 매만졌다. 그때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초밥 두 접시와 사케를 내려놓고 물러갔다. 원신이 젓가락을 집어 들며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낌새가 이상하긴 했는데 너무 또 그렇게 솔직하게 불어 버리니까 갈등되네. 진송신도시 관련 건이면 그 현장 과장 죽은 것 때문에 그래?”
“형 그 사건 알아요?”
윤이 깜짝 놀라 되묻자 원신이 초밥을 하나 입에 욱여넣고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자살했는데 그걸 왜 몰라. 근데 그게 감리업체 비리까지 갈 문제야?”
“그냥 뭐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윤이 얼버무리는 말에 원신이 한숨을 뱉었다.
“현장이 말 많긴 하지. 아, 나 진짜 그것도 언제 터질까 그 생각만 한다, 요새. 안 그래도 갑질 논란이니 뭐니 그런 것 때문에 대기업 두들겨 맞는 거 하루 이틀 아닌데, 회사에서 갑질하는 거 보면 언제 터지긴 터질 거 같아. 뭐 나랑은 상관없긴 한데 보고 듣는 게 있잖아.”
“왜요?”
“하청업체들 납품 따려고 접대하는 거 장난 아니거든. 접대만 있는 대로 받아 처먹고 입 닦고 미리 얘기된 업체 쓰고 이러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하청업체가 아무리 을 중의 을이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왜 있는데. 저러다 누가 빡쳐서 확 터트려 버릴까 봐 겁나 죽겠다, 진짜. 그거 받아 처먹는 놈들도 그게 뭐가 잘못됐는지도 몰라. 그게 관행이니까. 갑질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 난 간이 작아서 영…….”
원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술을 마셨다. 윤은 초밥에는 손을 댈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하청업체들이 그런 게 심해요?”
“장난 아니지. 걔들은 완전 목숨 달린 거 아냐. 서온이 대형 공사 수주 많이 하니까 그거 한 번 들어가는 거랑 안 들어가는 거 차이가 얼마나 크겠어. 하청업체 사장들이 갑질 못 이겨 자살하는 것도 한두 번 아니라는데 윗대가리들이 눈 하나 깜짝 안 한다잖아. 듣기로 뭐 간부들이 하청업체 사장 아들딸 불러다가 지네 애들 과외시키고 봉사 활동 대리 출석시키고 대학 리포트까지 쓰게 시킨다는데, 갑질을 아주 대를 이어서 하니까 그걸 누가 버텨.”
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원신을 마주 보았다. 원신이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젓가락 끝으로 초밥 위를 집적거렸다.
“건설사 다 그런 거 알고 일하는 거긴 한데 진짜…… 룸에서 여자 끼고 접대하는 거 기본이고, 지들이 여자 끼고 2차 나가는 돈까지 하청에서 다 내야 돼. 상상이 가냐? 그거 안 해 주면 기분 상해서 니들하고 일 못 한다고 지랄을 한다고. 그렇게 받아 처먹었으면 하청이나 주든가. 희망고문만 죽어라 해대고 뜯어먹을 거 다 뜯어먹으면서 나중에는 어 미안한데 안 되겠어, 이래. 이 짓 몇 번 당하면 자살 안 하고 배겨? 나 같아도 죽고 싶겠다.”
“그런 걸 위에서 다 묵인해요? 아무도 고발 안 하고?”
“고발하면 뭐 하냐, 접대 받는 자리에 판검사 끼고 오는데. 내가 왜 이직하려고 하는데. 접대 안 하고 안 받으면 승진을 못 해, 이 회사는. 안 받는 놈 병신 만든다고. 주는 걸 왜 안 받냐 이런 식이야.”
규형이 접대를 못 해서 승진에서 계속 밀렸다던 동료들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필연적이었다. 말이 없어진 윤을 마주 보던 원신이 초밥을 하나 더 입 안으로 밀어 넣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얘기하니까 입맛 떨어지네. 아까 뭐 알고 싶다고 그랬지? 감리업체?”
“아, 네. 그 고원종합기술공사, 거기 찾아보니까 서온 감리는 거의 다 거기서 하는 거 같던데요. 이거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문제 있지, 왜 없겠어. 감리업체 그런 식으로 선정하면 안 돼. 특히 공공건설 쪽은 더 안 되고. 무조건 입찰 받아서 진행해야 되는데 얘들이 입찰 나오면 더 저렴하고 경력 많은 회사도 떨어뜨린단 말이야. 아니면 타 업체 입찰 막든지.”
“그게 가능해요?”
윤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묻자 원신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거기가 서온 자회사라는 얘기가 있더라고. 내가 내부 사정 다 아는 거 아니니까 뭐 여기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는데, 오너 일가에서 차명으로 주식 갖고 있다, 대주주다 그런 소문만 들었어. 그렇게 업체 선정하고 차액은 다른 주머니로 챙기고 그러는 거겠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만약 이걸 방송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어디서부터 손을 댈 수 있는 건지도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현장 과장 한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다는 걸 과연 누가 믿어 줄지도 알 수 없었다.
문득 그렇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 걸까 생각하자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윤의 표정을 보고 있던 원신이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턱짓으로 앞에 놓인 접시를 가리켰다.
“먹어, 인마.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돌아가는 꼴 거지같다고 안 먹고 살 수 있냐.”
윤은 마지못해 앞에 놓인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맛인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이사이 술을 한두 모금씩 홀짝이던 원신은 긴 숨을 뱉으며 천장을 쳐다보다 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가 여기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냐? 익숙해지는 거야. 내가 이직하려고 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 여기 있으면 그런 게 다 당연해질 거 같아서 무섭다고, 지금. 남한테 갑질 하고, 돈이면 다 되는 거 같고. 남들은 세상이 다 그런 거라는데 회사가 진짜 다 그렇게 돌아가냐? 방송국도 그래? 너도 그런 생각 해 봤냐?”
윤은 대답 대신 원신을 마주 보았다. 윤을 빤히 응시하던 원신이 피식 웃고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사는 게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냥 다들 정직하게 살면 좋은 거 아니냐? 그게 왜 안 되지? 다들 왜 그렇게 겁이 없어? 해먹는 놈들은 겁 없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겁난다는 거 뭐가 잘못된 거 아냐?”
그 말에 누군가 뒤통수를 내리친 것 같은 감각이 지났다. 몇 번이나 정언에게 물었던 것이 생각난 탓이었다. 선배는 겁 안 나요? 무섭지 않아요?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왜 평범한 사람들이 겁을 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도 여긴 적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숨는 것이 당연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문득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이 씨, 모르겠다 진짜. 나라고 뭐 잘나서 이런 말 하냐. 막상 안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는데. 밖에 나오니까 좋은 사람인 척, 정의로운 사람인 척해 보는 거지.”
머리를 흩은 원신이 남은 술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윤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형이 그런 생각 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예요.”
“뭐가 대단해, 인마.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데. 망가지는 거 진짜 순식간이야. 넌 그러지 마라, 정말로. 나도 가끔 그런 짓 하다가 정신 들면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정색을 한 원신이 가방을 열어 명함 케이스를 꺼내더니 무언가를 한참 뒤적이다 윤에게 명함 한 장을 빼어 건넸다. 명함에는 ‘고원종합기술공사 감리CM본부 민간1팀장 이종규’라고 적혀 있었다. 윤이 의아한 표정을 하자 원신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거 진송신도시 감리 담당자야. 나도 현장 감리 쪽은 잘 몰라서 뭐라고 말은 못 하겠고, 혹시 필요할까 싶어서 주는 거니까 뭐 알아볼 거 있으면 거기 물어봐.”
“고마워요, 형.”
“고마울 거 퍽도 없다. 또 어디 간다며, 빨리 마저 먹어. 속 비어서 무슨 일을 하냐. 아, 그리고 미정이 청첩장 돌릴 때 꼭 와. 이런 일 있을 때만 연락하지 말고.”
“아까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 진짜 간다니까요. 형 그동안 나 못 봐서 되게 서운했어요?”
윤이 농담처럼 묻자 원신이 젓가락 끝으로 윤의 이마를 찔렀다. 윤이 아야, 하며 이마를 문지르자 원신이 손가락질을 했다.
“그래, 이 새끼야. 회사 여직원들이 소개팅 한 번 시켜 달라는데 시켜 줄 놈 없어서 서운해 죽겠더라. 그래도 김윤 정도는 내보내야 체면 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