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96
96화.
“아, 또 왜 그래요.”
윤이 펄쩍 뛰며 민망해하자 원신이 남은 초밥을 집어 먹으며 낄낄거렸다. 그새 청주 한 병을 더 시켜 마신 원신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술이 올라 빨개진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어우, 간만에 마시니까 확 올라온다. 너 뭐 일 있다며, 그만 일어날까?”
자기 지갑을 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원신을 만류한 윤은 계산서를 집어 들고 먼저 카운터에서 계산을 했다. 형이 돼서 얻어먹어야겠냐고 투덜대는 원신을 달랜 윤은 가게 앞 길가로 나섰다.
택시를 잡아 술이 취하긴 취했는지 꼭 연락하라고, 미정이 청첩장 줄 때 오라고 세 번째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원신을 밀어 넣은 윤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보았다.
정언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벌써 저녁 여덟 시를 넘긴 지 오래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윤은 정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신호가 대여섯 번쯤 가자 정언이 전화를 받았다.
『짧게 얘기해. 전화 기다리는 중이니까.』
입도 떼지 않았는데 돌아온 말은 무정했다. 그러나 더한 말도 들은 이상 이제 이 정도로 상처 받을 윤은 아니었다.
“지금 끝났어요. 어디세요?”
『나 혼자 있어도 돼. 뭐라고 그래?』
“저녁 드셨어요?”
대답 대신 묻는 말에 한숨 섞인 목소리가 넘어왔다.
『짧게 얘기하라고 한 것 같은데.』
“선배 보고 얘기할게요. 전화로 얘기하기 힘들어서요.”
뻔한 수작이었다. 말하면서도 윤은 스스로 기가 막혀 소리 없이 웃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은 지경이라면 이미 중증 환자쯤은 되는 것 같았다.
잠깐 침묵하던 정언이 말했다.
『문자 확인해.』
전화가 끊어졌다. 액정에서 깜빡이는 정언의 이름을 내려다보던 윤은 허공에 낮은 숨을 뱉고는 고개를 들었다. 길 건너편에서 환하게 불을 밝힌 샌드위치 가게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이 뭘 좋아할까 생각하던 윤은 때마침 바뀐 보행신호에 횡단보도를 뛰어 가로질렀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 양천구 신월동 871-15.
정언의 메시지였다.
* * *
정언은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는 긴 숨을 뱉으며 핸들에 잠시 이마를 대었다. 문자를 받은 큰아들이 할 말이 없다고 답을 보냈기에, 계속 전화해 가며 잠깐이라도 좋으니 만나 달라고 사정한 게 몇 시간 전이었다.
정언이 끈질기게 부탁하자 결국 혼자 결정할 수 없다며, 가족들과 얘기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더니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야 밥 먹는 것보다 흔해서 기다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좋으니 편하신 시간에 바로 가겠다고 애걸복걸해 간신히 받아 낸 집 주소 근처에 차를 대고 기다린 지가 벌써 다섯 시간이었다.
차에서 잠시 내린 정언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쭉 펴고는 제자리에서 탁탁 뛰었다. 요즘은 새벽 조깅을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이 영 찌뿌둥했다.
차게 굳었던 몸이 어느 정도 풀릴 때까지 움직이던 정언은 잠잠한 핸드폰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보자, 오래된 단독주택의 거실에 아직 불이 켜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석의 집이었다.
사람이 있긴 있나 보네, 하고 중얼거린 정언은 운전석 문에 기대섰다. 등으로 찬 밤공기 탓에 서늘해진 차체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이대로 밤새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이런 식으로 기다리다 보면 적어도 새벽이든 아침이든 한 번은 사람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욕을 먹을 때 먹더라도 그럴 때 붙잡아 한마디라도 듣는 게 나름의 요령이었다.
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대충 때운 후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게 생각난 건 그때였다. 정언은 필터 끝을 입술로 까딱이며 허공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지면 간혹 회한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렇다 한들 이제 와서 새 직장 구할 것도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이냐, 하고 익숙한 자기 합리화를 한 정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요즘은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가득해 밤에도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꿈들과 때로 식은땀이 날 정도의 악몽이 뒤엉켜 잠이 오는 것이 반갑지 않을 정도였다.
재희의 불면증도 이런 걸까 생각하던 정언은 창에 뒷머리를 대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문득 감은 눈꺼풀 위로 강한 헤드라이트 빛이 스몄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눈가를 가리자 곧 바로 근처에서 시동 꺼지는 소리가 났다. 헤드라이트도 함께 꺼져 사방으로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으며 뭐지,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차 문을 여닫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아직도 연락 안 왔어요?”
윤이었다. 그제야 정언은 아까 윤과의 짧은 통화를 떠올렸다. 윤이 몸을 조금 숙여 정언을 가만히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무심코 그것에 시선을 줬던 정언은 곧 윤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의 샌드위치 가게 로고를 알아보고 멈칫했다. 윤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저녁 안 드셨죠?”
이건 선을 넘는 행동일까, 아닐까. 어느 쪽인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윤에게 선을 긋기 위해 일부러 더 차갑게 군다는 걸 뻔히 알 텐데도, 매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건 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정언이 선뜻 그것을 받아들지 못하자, 윤이 봉투를 열어 포장된 샌드위치 두 개를 꺼내더니 하나를 정언에게 건넸다.
“저녁 약속 있었다며. 밥 안 먹었어?”
얼결에 받아 든 정언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묻자 윤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얘기 듣고 있으니까 잘 안 들어가서요. 저 먹으려고 사면서 같이 산 거니까 그냥 드세요.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제 마음대로 샀어요.”
정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 윤이 안에서 음료수 컵을 꺼내 빨대를 꽂더니 정언에게 쥐여 주었다.
정언이 눈을 들어 쳐다보자 윤은 조금 떨어져 차에 기대며 자기 몫의 샌드위치 포장을 풀었다. 정언은 양쪽 손에 들린 샌드위치와 음료수 컵에 번갈아 시선을 두었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보닛 위에 컵을 올려 둔 정언은 포장을 풀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얇은 유산지 안쪽으로 아직 희미하게 빵의 온기가 남은 것이 느껴졌다.
까끌한 입 안에서 햄과 야채, 빵조각, 소스가 모래알처럼 굴러다녔다. 정언이 말없이 샌드위치를 씹고 있는 동안 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란히 서서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뭐라고 그래?”
그 침묵이 어쩐지 견디기 힘들었다. 정언은 결국 샌드위치를 절반쯤 먹다 말고 먼저 윤에게 물었다. 그새 자기 몫을 다 먹고 콜라를 마시던 윤이 빨대를 입에 문 채 네? 하고 되물었다.
“서온건설 다니는 선배 만났다며. 뭐라고 했냐고.”
“아, 그게…….”
윤이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정언의 손에 아직 반쯤 남은 샌드위치가 들린 것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드시면 얘기할게요. 먹다가 일 얘기하면 체하더라고요.”
별 걸 다 챙긴다 소리가 목까지 나왔으나 정언은 애써 그 말을 눌렀다. 거리를 두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윤에게 굳이 못되게 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시선을 돌리며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밀어 넣자 곁에서 그걸 보던 윤이 갑자기 웃는 소리를 냈다. 정언이 입 안을 가득 채운 빵을 씹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윤이 대답 대신 곁에 놓아둔 음료수 컵을 정언의 손에 다시 들려 주었다.
“마시면서 드세요.”
무심결에 콜라를 한 모금 마신 정언은 눈썹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 윤이 시키는 대로 먹으라면 먹고, 마시라면 마시고 고분고분하고 있는 게 어쩐지 말린 기분이 된 탓이었다.
속으로 이건 아닌데, 하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갑자기 마시던 걸 내팽개치며 윤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의 심중을 알 리 없는 윤이 물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하신 거예요? 그런데 아직 연락 없고요?”
“가족들끼리 상의하고 얘기하겠다고 하더라고. 정 안 되면 누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붙잡아서 물어봐야지 뭐. 어머니가 이 일 때문에 병원 다닌다는데 문 두드리면서 나오라고 할 순 없잖아.”
컵을 내려놓고 손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탁탁 털어 낸 정언은 팔짱을 끼고 다시 등을 기댔다.
“그래서,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해야 되는 얘기 뭔지 좀 해 봐.”
깜빡하고 있었다는 듯 아아, 하고 눈썹 위를 두어 번 문지른 윤이 입을 열었다.
“입찰 과정에서 더 좋은 조건 있는데도 고원종합기술공사 선택하거나 아예 단독입찰이 되는 경우가 많대요. 서온건설 자회사라는 소문도 있다는데 일단 자기는 확실히는 모르겠다고 했어요. 겉으로 보이는 거에 비해 시스템이 굉장히 부실하다는 얘기도 여러 번 했고요.”
“시스템이 부실하다고?”
“규모나 그런 거에 비해 회사 돌아가는 게 좀 인맥 위주로, 그런 느낌이 있나 봐요. 공채 시즌에 청탁 전화도 엄청나게 온다고 하더라고요. 하청업체에 대해 갑질이 너무 심해서 조만간 뭐 터질 것 같아서 불안하다, 그 얘기도 했었어요. 접대는 접대대로 받으면서 정작 미리 얘기된 업체 선정하고 이런 식이래요. 하청업체 사장 중에 갑질 못 견뎌서 자살하는 사람도 꽤 있다는 얘기도 했고요.”
갑질 때문에 자살할 정도라면 문제가 심각한 건 틀림없었다. 정언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느 정도길래?”
“2차 나가면서 여자 대는 비용까지 하청 쪽에서 지불하는 건 당연하대요. 이거 안 해 주면 기분 상해서 일 못 하겠다는 경우도 있다고…… 심지어 하청업체 사장 자녀들 불러서 자기 자식들 봉사 활동 대리 출석이나 리포트 대필까지 시킨다고 하더라고요. 자기한테 그러는 것까지는 참아도 자식들한테까지 갑질 이어지니까 하청업체에서 버티기가 힘든가 봐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미친놈들.”
중얼거린 정언은 한숨을 뱉었다. 잠시 말이 없던 윤이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는 말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