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98
98화.
정언의 물음에 상우가 현숙의 눈치를 살폈다. 현숙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 저…… 저희가 친척들하고도 다 인연을 끊고, 그러다 보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방송에 사용될 경우에는 장소하고 대역 전부 섭외해서 새로 찍을 겁니다. 그런 부분은 걱정 안 하시게 하겠습니다. 저희가 기록용으로 필요해서요.”
“아, 네.”
현숙의 대답이 떨어지자 곁에서 윤이 재빨리 촬영 준비를 했다. 윤이 카메라를 세팅하는 동안 상우가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그분은 어떻게 돌아가신 거예요?”
“건설 현장에서 추락사하신 채로 발견됐어요. 사측은 자살이라고 주장했는데 아내분께서는 절대 남편이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셔서 저희한테 제보하신 거고요. 저희가 취재 중에 이분이 서온건설하고 정계 쪽 전달책으로 일하고 계셨다는 증거를 찾았고,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지 조사하던 중에 아버님 일을 알게 된 겁니다.”
정언의 설명을 듣고 있던 현숙이 입을 막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현숙이 중얼거렸다.
“……나는 여태까지, 여태까지 그런 게 우리 남편만 그런 줄 알고…….”
“어머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오래된 관행이고요, 저희는 아버님하고 돌아가신 현장 과장님 말고도 같은 사례가 몇 분 더 계신 걸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현숙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상우가 곁에서 현숙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엄마, 일단 들어가서 좀 쉬어요. 내가 얘기할게요.”
“그렇게 하시죠.”
아무래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라, 정언은 얼른 상우의 말에 동의했다. 상우가 현숙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와서는 다시 소파에 앉으며 얼굴을 두어 번 문질렀다. 긴 한숨을 쉰 상우가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대었다.
“아버지 그렇게 되고 나서부터 안정제 드시고 계세요. 워낙 오래돼서…… 조금만 스트레스 받거나 그러면 상태가 바로 안 좋아지셔서요. 그때 하도 시달려서 아직도 밖에 잘 못 나가세요. 누가 쳐다본다는 생각만 해도 불안해하시고…… 그래서 영우가 피디님들 절대 만나지 말라고 그랬던 거예요.”
“죄송합니다.”
정언이 사과하자 상우가 손을 저었다.
“아이, 아닙니다. 제가 낮에 전화 받고 생각을 진짜 많이 했거든요. 제가 거절 잘 못해서 영우한테 대신 연락해 보라고 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맘에 되게 걸리더라고요. 친척들하고 연 끊게 된 것도 사실, 그때 아버지가 그렇게 되고 나서 욕을 엄청나게 먹었어요. 아버지가 다 알면서, 그러니까 뇌물 주고받고 그런 거 다 알면서 돈 받아 해놓고 이제 와서 정의로운 척, 내부고발자인 척한다고 그러면서…….”
상우가 말끝을 흐렸다. 신상이 밝혀진 제보자들에게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정언이 힘드셨겠어요, 하고 거들자 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에서 진짜 악플 어마어마했단 말이에요. 그때 영우가 고등학생이었는데 영우 신상까지 다 까발리고 그래서 학교로도 기자들 찾아오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애가 기자, 방송, 이런 거에 아주 학을 뗐어요. 영우 이름도 대학 가면서 개명한 거고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이제 와서 증언하기 무서우니까 자살했다, 일부러 사고 낸 거다 사람들이 계속 그러니까.”
“추돌사고였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경찰이 처음에 CCTV 확인했을 때는 음주운전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차가 갑자기 이렇게, 이렇게 커브를 틀면서 차선 위반을 하다가 가드레일을 받았다는 거예요.”
상우가 손으로 구불구불한 모양을 만들어 보이더니 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그게 전형적인 음주운전 형태래요. 그런데 원래 술을 잘 못 드시는 분이고, 대낮부터 술을 마실 이유가 없잖아요. 이해가 안 가는 거죠. 그날 남양주 사는 친구분하고 잠깐 얘기 좀 하러 가신다고 가신 거거든요. 술을 마셔도 친구랑 마시지, 친구 보러 가는 길에 술 먹고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것도 운전을 하는데.”
“실제로 부검 결과 알코올 검출이 됐나요?”
정언의 물음에 상우가 즉시 그 말을 부정했다.
“아뇨. 그런 건 전혀 없었죠. 대신에 그 뭐, 뭐라고 하더라, 아버지가 평소에 비염이 심한 편이라 환절기에는 거의 매일 드시는 약이 있었는데 그거 성분이 나왔대요. 그게 왜, 먹으면 졸린 약 있잖아요.”
“항히스타민제14) 말씀하시는 겁니까?”
상우가 기억을 더듬는 듯 잠시 뭔가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무슨 성분이라고 딱 말을 해 줬는데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아무튼 그랬는데 그때 담당 검사님이 이상하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게 같은 약이라도 졸린 게 있고 안 졸린 게 있고 그렇다면서요. 의료기록 조회했는데 아버지가 평소에 처방받아 먹던 약은 그게 아닌데, 사고 나기 이틀 전인가 새로 처방받은 약이 성분이 다르다고 그랬어요.”
“같은 병원에서 처방받으셨는데 그랬다고요?”
“네. 그런데 담당 의사 말로는 아버지가 평소에 드시던 게 잘 안 듣는 것 같다고 해서 다른 약으로 바꾼 거다, 그렇게 얘기를 했대요. 그게 누가 일부러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건지, 진짜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약을 그렇게 드셨으니까. 그래서 결과적으로 졸음운전이 된 거고, 우리는 억울해도 할 말이 없잖아요.”
상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이어리에 메모를 하던 정언은 잠시 손을 멈췄다. 비염은 감기처럼 하루 이틀 앓는 병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먹던 약이 있었다면 상당히 오랫동안 같은 약을 먹어 왔을 것이 분명했다.
증언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약을 바꿨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담당 검사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정언은 상우에게 물었다.
“담당 검사님이라면 이정수 검사님하고 진형은 검사님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면 당시에 아버님이 서온건설 게이트 관련 증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상우가 흠, 하며 눈을 굴리다 약간 자신 없는 표정을 했다.
“일단 저희는 알고 있었어요. 엄마가 반대를 많이 했거든요. 일이 좀, 이렇게 될 수도 있다 그걸 엄마는 짐작을 했던 거 같아요. 아버지가 일단 그, 전달책 일을 오래 했고…… 아버지 얘기로는 처음에는 그런 일인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건설사에 워낙 그런 게 많대요. 많으니까, 아버지는 그냥 관행적인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윗선에서 아버지를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신 부분도 있었던 것 같고요.”
“인정이요?”
“그런 일을 아무한테나 시키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런 거 있잖아요.”
그 말을 발음할 때 상우의 얼굴에 헛웃음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가 곧 지워졌다. 정언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런데 왜 그 부분에 대해 증언하시기로 결심을 하신 겁니까? 회사에 대해 상당히 충성심이 강하셨던 것 같은데, 쉬운 결정은 아니잖아요.”
상우는 정언의 말을 쉽게 수긍했다.
“그렇죠. 사실 아버지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무조건 해야 된다, 이건 사회를 위해서도 해야 되고, 너희들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도 해야 된다,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진짜 평범한 분이었거든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냥 진짜 딱 남들 같은 그런 분이었어요. 평소에도 막 대단하게 정의감이 있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고 그런 분은 아니었다고요.”
마지막 말에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정언은 영우의 목소리에서 느꼈던 감정의 층위를 떠올렸다. 결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을 굳이 정의해야 한다면, 그건 고통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 같았다.
상우의 말속에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인지, 풀리지 않는 의아함인지, 후회인지 명확하게 경계를 그을 수 없는 감정들이 숨은 채였다.
상우가 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아까 영우랑 통화하시는 거 제가 옆에서 들었는데, 피디님이 아버지랑 똑같은 사람이 또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위안이 좀 되더라고요. 우리 아버지만 바보 같은 짓 한 게 아니구나, 우리 아버지만 멍청해서 당한 게 아니구나 싶고 그래서…….”
몸을 조금 숙인 상우는 한동안 침묵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정언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의 끝이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생각이 제일 괴로운 거예요.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그런 건 다 참겠는데…… 우리 아버지가 바보 같아서 그런 일에 휘말린 건가, 남들은 안 그러는데 왜 아버지는 그런 짓을 해서 우리 가족을 이렇게 만들어 놨나, 그렇게 살 거면 끝까지 입 다물고 살지 왜 그랬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드니까 너무 원망스럽고. 아버지는 그냥 좋은 일 하려고 했던 건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범죄자처럼 도망 다니고, 이름까지 바꾸고…….”
이럴 때는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기 마련이었다. 정언은 그저 묵묵히 상우를 지켜보았다. 곁에 있던 윤이 시선을 피했다. 윤이 이런 순간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흘끔 윤 쪽을 보자 윤이 빨개진 눈가를 감추기 위해 공연히 머리를 만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이나 더 말이 없던 상우가 얼굴을 들며 애써 웃었다.
“아, 죄송해요. 옛날 생각하니까 기분이 또 좀 그래서요.”
“괜찮습니다. 그러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의혹이 있는 부분에 대해 직접 문제 제기를 하시거나 그런 적은 없었나요?”
정언이 말을 돌리자 상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네. 검사님이 뭐 이것저것 알아보셨는데 의사도 조사가 안 된다고 그러고, 경찰에서도 약물 복용 부주의로 인한 사고라고 하니까. 저희는 당연히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증거가 없다고 하잖아요.”
“의심 가는 부분이요?”
14) 항히스타민제 : 두드러기, 발적(發赤), 소양감 등의 알레르기성 반응에 관여하는 히스타민의 작용을 억제하는 약물.